<소설> 빨강 21

by 전영칠


도쿄 칸다의 진보초 고서점가는 낮에도 침침한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요한은 그곳에서 '언어의 지문'을 찾는 탐정이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일본 공산당의 이론가 다카하시가 쓴 저작들이었다. 안기부의 지원금으로 매수한 정보원들과 함께 요한은 수만 권의 책더미를 뒤졌다.


"찾았다."

요한의 손에 들린 것은 1970년대 후반에 발간된 사회구성체론 관련 서적이었다. 그 안에는 한국 운동권 유인물에서 신물 나게 보았던 문장들이 박혀 있었다. '~에 있어서', '~으로의 지양', '~함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번역 투가 아니었다. 일본 좌익의 뇌를 한국의 청년들에게 이식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는 이 문장들을 한국에서 압수된 지평 출판사의 유인물과 대조했다. 활자 하나, 쉼표 하나까지 일치했다. 요한은 차가운 전율을 느꼈다. 최은과 박동열이 탐독하던 그 '해방의 언어'는 사실 이곳 진보초의 눅눅한 골목에서 만들어져 해협을 건너간 '수입품'이었다.


요한은 조총련 내부 협력자를 통해 '부선 연락선 루트'의 실체를 파악했다.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부관훼리는 단순히 보따리상과 여행객을 나르는 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사상적 동맥이었다.

시모노세키 항구의 컨테이너 구석, 혹은 재일교포 학생들의 이중 바닥 가방 속에 숨겨진 마이크로필름과 일본어판 원전들. 이것들은 부산항을 거쳐 서울의 대학가와 구로공단의 지하 인쇄소로 흘러들었다. 요한은 이 루트를 설계한 인물이 바로 자신의 신학대 동기였던 강철수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철수는 일본의 세련된 인쇄 기술과 조총련의 자금력을 동원해 한국의 '학출'들에게 사상의 자양분을 공급했다. 요한은 시모노세키의 부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배가 싣고 오는 것은 희망인가, 아니면 한반도를 다시 불태울 붉은 화마인가.


1980년대 중반, 도쿄 신주쿠는 네 개의 거대한 힘이 부딪히는 사상의 각축장이었다.

한국 안기부와 우익 기독교 세력은 요한과 박 노 회장과 함께 하는 세력이다. 그들은 국가의 질서와 승공(勝共)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믿으며 자금을 뿌렸다.


일본 우익과 공안 당국은 조총련의 확장을 극도로 경계하며 요한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루트 차단을 도왔다.

조총련과 북한 연계 조직은 강철수를 중심으로 한국 내 학생 운동권을 원격 조정하며 혁명의 불씨를 지폈다.

자생적 좌파 학생운동권과 학출들은 현재 대학을 이끌어가는 총학과 각종 학생조직, 박동열 같은 이들과 사회과학 전문 서적들이 그 이론을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위 세 세력의 거대한 음모 속에서 순수한 해방을 꿈꿨지만, 결국 '사상적 소모품'으로 이용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요한은 이 4파전의 한복판에서 자신이 '심판자'이자 '사냥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는 일본 우익 학생들에게 거액을 쥐여주며 조총련계 학교의 동태를 감시하게 했고, 안기부 요원들과 함께 연락책들의 은신처를 덮쳤다.


- 장 목사, 지평 출판사를 비롯한 4개의 사회과학 서적 출판사의 배후 기지가 확인되었소.

권 실장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요한이 제공한 일본어 대조본 덕분에 지평 포함 4개의 출판사는 이제 단순한 출판사가 아닌 '국제 간첩단과 연계된 사상 전파 거점'으로 규정되었다. 이제 곧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 것이다.

요한은 호텔 방 창가에 서서 신주쿠의 붉은 노을을 보았다. 그의 손에는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또 다른 적수정이 쥐어져 있었다. 최은에게 준 수정이 자비였다면, 그가 쥔 이 돌은 심판의 상징이었다.


'은아, 너를 지키기 위해 나는 너의 세상을 무너뜨려야 한다.'

요한은 스스로가 전사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신앙은 나의 최후의 보루다. 신앙을 놓치면 나는 이 바닥에서 괴물이 되고 만다.

최은이 속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예수'와 자신이 믿는 '국가와 질서를 수호하는 예수'는 이제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신이었다. 해방신학의 열정은 민중의 고통을 껴안았지만, 요한의 승공을 바탕으로 한 구공신학은 좌경화로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 잡아줄 현실적 대안이다. 그 열정이 불러올 피바람을 막기 위해 철갑을 둘러야 한다.


요한은 마지막 보고서를 작성했다. 거기에는 부산 연락선을 통해 입국할 예정인 조총련계 공작원들과 한국 내 접선책들의 명단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이 명단이 넘어가면 수십 명의 인생이 끝장날 것이다.

그는 문득 안병무와 서남동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이 말한 '오클로스'는 지금 가리봉동에서 최은과 함께 울고 있는 여공들이었다. 하지만 요한이 보는 오클로스는 강철수 같은 자들에게 선동당해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위험한 군중'이었다.

요한은 수표 뭉치를 챙겨 신주쿠의 밤거리로 나섰다. 이제 그는 다시 가면을 쓰고 박 노 회장과 권 실장의 충실한 일꾼으로 돌아가야 했다.


"가자. 이 붉은 망령을 끝장내러."

신주쿠역의 전광판은 핏빛처럼 붉게 반짝였다. 도쿄에서 서울로,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사상의 바다는 이제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최은과 요한을 삼키려 하고 있었다. 요한은 해협을 건너오는 유령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자신 또한 어둠 속의 유령이 되기로 결심했다.




8. 전략가들의 전쟁


1)

강철수가 조총련을 통해 한국 대학가에 침투시킨 '위장된 신학 교재'는 1980년대 한국 학생운동의 사상적 지형을 흔들어 놓은 치밀한 심리전의 산물이었다. 이 교재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신앙 서적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그 속에는 체제 전복을 위한 정교한 혁명 이론이 맥박치고 있었다.


강철수는 안기부와 경찰의 삼엄한 검열을 피하기 위해 교재의 외피를 철저히 위장했다.

위장 제목으로는 『신약성서 배경 연구』, 『갈릴리의 목수와 현대인』, 『기독교 윤리와 사회 정의』와 같이 보수적인 신학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제목을 채택했다.

그리고 조총련계 출판사인 '학우서방'의 고도화된 인쇄 기술을 이용했다. 성경책처럼 얇은 종이(인디아 페이퍼)를 사용하여 방대한 분량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압축해 넣었으며, 표지 안쪽에 마이크로필름을 숨겨 부산-시모노세키 연락선을 통해 밀수입했다.


교재의 내부 문법은 기독교 용어를 사회과학적 언어로 치환하는 '사상적 번역'에 집중했다.

성서 용어인 출애굽을 제국주의와 독재 정권으로부터의 민족 해방(NL)으로 , 하나님나라를 계급 착취가 없는 사회주의 지상 낙원으로 , 죄를 개인의 도덕적 잘못이 아닌 자본주의적 구조적 악으로, 회개를 부르주아적 삶의 방식을 버리고 혁명 대열에 합류하는 결단으로, 오클로스 (민중)를 역사를 변혁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주체로 바꿔치기했다.


이것은 성서적 은유를 빌린 플로레타리아(노동자계급)가 부르주아(자본가 계급)를 타도하여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한다는 플로레타리아 혁명론이었다. 교묘한 사상적 위장이었다.


또한 강철수는 "예수는 인류 최초의 공산주의자였으며, 십자가 사건은 로마 제국주의에 맞선 노동자 계급의 장렬한 투쟁이었다"라고 서술하여 학생들에게 종교적 숭고함과 혁명적 열정을 동시에 주입했다.


이 교재들이 대학가 지하 서점과 야학(夜學)을 통해 퍼지면서 발생한 파장은 파괴적이었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은 무신론적 성격 때문에 기독교 학생들에게 거부감이 있었다. 그러나 강철수의 교재는 "독재에 맞선 화염병 투척이 곧 이웃 사랑의 실천이자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행위"라고 가르쳤다. 이는 학생들에게 체포와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력한 '순교자적 투쟁 정신'을 부여했다.


구로공단 등지의 노동 야학에서 이 교재들은 교사(대학생)와 학생(노동자)을 묶는 강력한 고리가 되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존엄한 존재"라는 선언은 곧 "사장과 정권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검찰과 안기부는 한동안 이 교재들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압수수색에서 발견되어도 내용이 성서 구절로 가득했기에 단순한 신앙 서적으로 간주하고 넘기기 일쑤였다. 하지만 훗날 요한이 발견한 '일본어 직역체'와 '특정 이론가의 문체'가 단서가 되어 이 교재들이 조총련의 사상 공작물임이 밝혀진 것이다.


장요한은 이 교재들을 분석하며 강철수의 치밀함에 치를 떨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신학의 언어가 체제를 무너뜨리는 암호로 사용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 철수, 자네는 성경을 읽은 게 아니라 성경의 페이지를 찢어 혁명의 화약으로 썼군.

요한은 이 '위장된 신학'에 맞서기 위해 더 강력한 '국가 수호적 구공 신학'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강철수가 쏜 화살이 학생들의 가슴에 박혔다면, 요한은 그 화살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화살을 쏜 활시위를 끊어버리기로 결심했다.

강철수의 이 위험한 교재들은 결국 '도서출판 지평 등'의 압수수색 사건으로 이어지며 최은을 포함한 수많은 지식인을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도쿄 신주쿠의 뒷골목은 비릿한 비 내음과 기계적인 전철 소음으로 가득했다. 장요한은 강철수가 남긴 '언어적 지문'을 추적한 끝에, 요요기 공원 인근의 한 폐쇄된 인쇄소 건물에서 마침내 그와 마주했다. 그곳은 조총련의 비밀 유인물이 제작되던 사상의 공장이자, 두 신학도가 마지막 결판을 내야 할 운명의 장소였다.


먼지 쌓인 인쇄기들이 거대한 고철 괴물처럼 늘어선 어둠 속에서 강철수가 먼저 입을 뗐다. 그의 손에는 요한이 분석했던 그 '위장된 신학 교재' 한 권이 들려 있었다.


- 요한, 자네가 남산의 사냥개가 되어 내 문장을 분석하고 다녔다지? 진보초의 고서점을 뒤지며 찾아낸 그 '말투'가 그렇게 대단하던가?


요한은 젖은 코트를 벗으며 철수를 똑바로 응시했다.

- 철수, 자네는 신의 언어를 도둑질했어. 가난한 자들의 비명을 자본론의 주석으로 갈아치웠지. 자네가 만든 그 책들은 구원의 복음이 아니라, 아이들의 손에 화염병을 쥐여주는 살인 면허일 뿐이다.


철수가 비웃듯 책을 바닥에 던졌다.

- 살인? 진짜 살인은 자네가 지키려는 그 정권이 광주에서 저질렀네. 나는 민중의 손에 방어용 칼을 쥐여준 것이고, 자네는 그 칼을 뺏기 위해 신의 이름을 빌려 독재의 발등을 핥고 있는 거야. 누가 더 가증스러운가?


- 나는 질서를 지키려는 거다. 신이 세운 국가를 무신론의 불길로부터 보호하려는 거야!

- 국가? 그건 기득권의 성벽일 뿐이다. 예수는 그 성벽을 허물러 왔네. 자네의 '승공'은 복음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우상에게 바치는 제물일 뿐이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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