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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스콘 Nov 02. 2021

의도가 발목을 잡다

<블랙 위도우>가 의도적으로 놓친 것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마블 영화 관람은 매년 열리는 의례 행사가 된 것 같았다.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기본 이상의 재미가 보장된다는 점이었다. 아쉽게도 작년에 코로나19가 전세계적인 유행으로 번지면서 한 해를 건너뛰게 됐다. 따라서 <블랙 위도우>는 2년 만에 찾아온 마블 영화라는 점에서, 그리고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에서 장렬한 희생을 선택한 블랙 위도우/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조핸슨)의 고별식이라는 점에서 더 뭉클하게 다가왔다.


<블랙 위도우>를 보고 난 후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첫 번째로, 액션이 꽤 만족스러웠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만큼의 처절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액션까지는 아니었지만 맨몸 액션으로 볼 때 마블 영화들 중 준수한 편에 속한다. 노르웨이에서 펼쳐지는 태스크마스터(올가 쿠릴렌코)와 블랙 위도우의 대결은 짧지만 묵직하다. 또한 부다페스트에서 옐레나(플로렌스 퓨)와의 액션은 현실적이며, 곧바로 이어지는 추격전은 박진감이 상당하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IMAX 활용이 뛰어나다. 나는 <블랙 위도우>를 IMAX관에서 관람했는데 부다페스트 시퀀스와 러시아 교도소 시퀀스, 그리고 후반부 고공 액션 시퀀스에서 IMAX 화면비로 바뀐다. 이 덕분에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장면들을 더욱 몰입하면서 볼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세대교체가 원활히 이루어졌다. 차기 블랙 위도우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옐레나는 기대 이상으로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솔직히 이 영화에서 가장 눈부신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차기 블랙 위도우로 활약하기 충분한 자격을 얻었다.


그렇게 <블랙 위도우>는 이번에도 준수한 완성도의 마블 영화로 남아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에 잠길수록 <블랙 위도우>의 부정적인 요소가 더 크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블랙 위도우>는 실망스러운 영화일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크게 실패한 영화다.


여성해방을 위해 포기한 것들

<블랙 위도우>는 페미니즘과 실존주의 메시지를 설파한다. 드레이코프(레이 윈스턴)는 노골적으로 하비 와인스틴을 닮았다. 그가 이끄는 레드룸은 가부장적 세계관과 다름없다. 그리고 레드룸 요원들은 칩이 이식돼 드레이코프의 명령대로 요원의 임무를 수행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남성은 주체이다. 남성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여성은 타자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 드레이코프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남성의 지배, 그리고 이러한 지배 속에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위도우들의 상황과 딱 맞는다. 이후 나타샤가 위도우들을 구출하자 위도우들은 "이제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나타샤는 "이제 너희들이 스스로 결정하라"라고 답한다. 이는 장 폴 사르트르(시몬 드 보부아르의 남편이다)의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명언을 떠올리게 만든다. 수동적인 객체에서 주체적인 존재가 된 위도우들은 이제 스스로의 본질을 찾기 위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여정을 떠나야 한다는 의미다. 현대 페미니즘의 핵심이 실존주의인만큼, 이 영화는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흔적이 짙다. <블랙 위도우>가 찬사를 받는 이유는 이렇듯 페미니즘, 여성 해방의 메시지를 내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점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점 탓에 완성도가 크게 낮아졌다고 여긴다. 단순히 여성 해방 메시지가 문제라는 뜻이 아니다. 여성 해방을 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놓친 것들이 많았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블랙 위도우>가 놓친 첫 번째는 매력적인 빌런이다. 영화의 메인 빌런 태스크마스터의 활약은 처참할 정도로 적다. 타인의 능력을 복사한다는 흥미로운 설정을 가졌음에도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태스크마스터가 활약할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스크마스터는 블랙 위도우를 위협할 최대의 적이 아니라 다른 위도우들과 마찬가지로 억압적인 남성의 지배를 받는 피해자여야만 했다. 따라서 빌런으로서의 매력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피해자로서의 고통을 부각했다. 그렇다면 진정한 빌런이었던 드레이코프 장군은 어떨까. 그는 어린 소녀들을 납치해 비밀 병기로 키우는 레드룸의 설계자이자 지배자다. 그러나 이 인물은 굉장히 멍청하다. 동시에 블랙 위도우를 위협하지도 못하는 매력 없는 빌런이다. 단지 영화는 드레이코프 장군을 가리키며 관객들에게 '저 자는 어린 소녀들 위에 군림한 멍청하고 악질적이며 더러운 남성일뿐이다'라고 호소한다. 그는 그렇게 여성 해방의 제물이 되어버린다.


매력적인 빌런의 부재는 곧 허술한 전개로 이어진다. <블랙 위도우>는 흥미진진한 전개마저 놓치고 만다. 가장 심각했던 건 세럼과 페로몬이다. 블랙 위도우와 달리 지금의 위도우들은 긴 시간 동안 세뇌를 받아 완성된 게 아닌, 화학 작용과 칩으로 인해 조종당한다. 세럼은 그런 위도우들을 해방시킬 해독제다. 그리고 페로몬은 블랙 위도우가 냄새를 맡으면 절대 공격을 못하도록 만든다. 이 역시 위압적인 남성과 착취당하는 여성을 은유한 것이지만, 너무 쉽게 가려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화학 작용으로 간편하게 세뇌시킨다는 설정과 이를 멈출 해독제가 재빨리 나온 설정은 이해하기 어렵다. 위도우들이 모인 곳에서 해독제만 뿌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이 간편한 설정에서 어떻게 서스펜스와 간절함을 느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렇게나 간단하게 세뇌가 된다면, 차라리 FBI나 CIA, 쉴드 요원 몇 명 납치해서 세뇌시키면 될 일 아닌가. 굳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린 소녀들을 납치해 비밀 병기로 양성하는 건 효율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결국 <블랙 위도우>는 여성 해방이라는 해피 엔딩을 어떻게든 성립시키기 위해 얄팍한 전개를 택했다.


자신의 영화에서조차 중심이 되지 못하다

블랙 위도우는 첫 등장을 했던 <아이언맨 2>에서부터 언제나 주변으로 밀려난 조력자였다. 또한 그녀는 냉혹한 킬러 혹은 뛰어난 스파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섹스 심벌의 이미지가 강했다. <아이언맨 2>에서 뒷좌석에서 옷을 갈아입는 신이나, <어벤져스>에서 결박된 그녀가 탈출할 때 흔들리는 가슴을 카메라가 부각한다거나, 호크아이와 캡틴 아메리카, 그리고 브루스 배너와 유사 로맨스 관계를 형성하는 신들은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블랙 위도우의 가슴골을 보이게 하는 복장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나이의 나였음에도 블랙 위도우는 왜 지퍼를 끝까지 올리지 않았는지 정말 궁금해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듯 지금까지의 마블은 블랙 위도우를 히어로로서 존중해주었다기보다 섹시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에 의도적으로 가두었다.


결국 블랙 위도우는 온전히 블랙 위도우였던 적이 매우 드물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블랙 위도우의 활약이 높아졌고 그녀의 솔로 무비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따라서 <블랙 위도우>는 마블의 반성문이기도 하다. 이렇게나 훌륭한 히어로를 이상한 방향으로 소비시킨 적이 있었음을 밝히고 그녀를 그녀로서 온전히 존중해주겠다고 위로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하지만 참담하게도, <블랙 위도우>는 블랙 위도우를 온전히 존중해준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블랙 위도우: 최종편> 같은 느낌이다. 알다시피 블랙 위도우는 <엔드게임>에서 희생을 택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 영화가 나왔다. 그렇다면 <블랙 위도우>는 고별식이다. 마블 특성상 고별식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건 신고식이다. 차기 블랙 위도우가 될 옐레나에 주목하게 되는 건 그 이유다. 이 영화는 오로지 블랙 위도우에게 집중하기 어렵게 만든다.


영화의 후반부, 블랙 위도우가 세뇌된 위도우들에게 고전한다. 때마침 옐레나가 나서 해독제를 살포하고 위도우들이 세뇌에서 풀려난다. 이 광경이 <블랙 위도우>의 태도를 대변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위도우들을 구원해주는 것도 블랙 위도우가 아닌 옐레나다. '블랙 위도우 보러 갔다가 옐레나에게 반했다'는 평이 많은 것도 그 이유다. 따라서 이 영화의 절반은 실패했다. 차라리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개봉 전에 오로지 블랙 위도우만을 위한 솔로 무비를 하나 만들고, 이때쯤 지금의 전개와 비슷하게 <블랙 위도우 2>를 만들었다면 더 납득이 되었을 것이다.


<블랙 위도우>는 예정된 메시지로 향하기 위해 포기한 것들이 많았다. 또한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만을 위한 영화가 되는 것도 실패했다. 그럼에도 뭉클하게 느껴지는 건 지난 마블 영화에서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두 번 다시 그녀의 활약을 볼 수는 없겠지만 우린 그녀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얼마나 멋진 히어로였는지, 얼마나 용감한 인물이었는지 알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블랙 위도우가 임무를 위해 퀸젯에 타고 저 너머로 사라진다. 우리는 그녀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묵묵히 그녀를 보내줄 뿐이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놓인 한 나무에서 반딧불이들이 빛을 낸다. 이 반딧불이들은 그녀가 살린 위도우들이다. 이들은 블랙 위도우가 준 희망과 용기를 안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잘 가요.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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