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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스콘 Nov 29. 2021

다시 신화로 돌아오다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당시의 그 감정을 나는 잊지 못한다. 2017년 11월, 극장에서 마주한 잭 스나이더, 아니 조스 웨던의 <저스티스 리그>(이하 웨던 컷)를 관람했을 때의 그 충격, 그 절망, 그 분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하 <배트맨 대 슈퍼맨>)과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이어 <웨던 컷>으로 DCEU는 종말을 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끔찍한 완성도였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DC 히어로 영화를 보는 이유가 <웨던 컷>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마블 영화에는 없는 DC만의 신화적 요소, 어두운 톤, 묵직한 액션, 웅장한 스코어가 전부 사라져 버렸다. 완성도에 이어 정체성마저 상실한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DC 팬들이 잭 스나이더의 버전, 이른바 '스나이더 컷'을 바라게 된 계기가 되었다. 조스 웨던과 워너 브라더스 경영진들이 잘라버린 그 장면들과 비전을 복구하길 바란 염원은 잭 스나이더의 진심과 맞물렸다. 외롭고도 힘든 싸움 끝에, 드디어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이하 <스나이더 컷>)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우리가 그토록 바란 선물

이 영화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선물'일 것이다. <스나이더 컷>은 존재 자체가 선물이다. 우리가 바라던 것들이 총집합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려 4시간이나 되는 긴 러닝타임 덕분이기도 하다. 이 4시간에는 추가된 캐릭터들의 서사가 극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그 덕분에 <웨던 컷>에 비해 개연성을 갖게 되었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웨던 컷>은 급하게 만든 영화인 티가 역력했다. 아쿠아맨(제이슨 모모아)과 플래시(에즈라 밀러), 사이보그(레이 피셔)를 소개해야 할 뿐 아니라 부랴부랴 팀을 꾸려야 했다. 소개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팀업 무비로서의 재미도 적으니 감흥이 없을 수밖에 없다. <스나이더 컷>은 어떠한가. 늘어난 러닝타임에 처음 소개되는 히어로들의 고뇌와 성장이 담겨있고, 마침내 결성된 팀의 멤버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해내며 제대로 된 활약을 해냈다.


팬들을 향한 존중도 이 영화에 가득 담겼다. 슈퍼맨(헨리 카빌)의 각성과 신적인 파워를 훌륭한 연출로 담아낸 <맨 오브 스틸> 때처럼 <스나이더 컷>에도 팬을 의식한 듯한 장면들이 많다. 이를테면 궁극의 빌런 다크사이드(레이 포터)가 참전한 고대 전투, 마샨 맨헌터(해리 레닉스)의 깜짝 등장, 나이트메어 시퀀스에서 배트맨(벤 애플렉)과 조커(자레드 레토)의 대화 시퀀스는 DC 팬들이 열광할 만한 역사적인 장면이다. 이는 잭 스나이더의 작별에 대한 기념이자 지금까지 자신을 믿어준 팬들을 향한 헌사와 같다. 다행히 이 헌사는 훌륭하게 담겨 팬들에겐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다.


다시 쓴 대서사시, 신화

가장 감격스러웠던 건, 다시 DC가 정체성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잭 스나이더 특유의 어두운 톤과 묵직한 액션, 정키 XL의 웅장한 스코어는 DC 영화의 화려한 복귀를 알리는 거나 다름없다. 이를 잘 나타낸 원더우먼(갤 가돗)이 박물관에서 테러리스트들을 처치하는 장면을 보자. <웨던 컷>이 밋밋하게 다룬 이 장면을 <스나이더 컷>에서는 원더우먼의 막강한 파워와 범접할 수 없는 스피드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연출했다. 또한 아마존 전사들과 스테픈 울프의 전투는 아마존인들의 처절함을 훌륭히 담아냈고, 리거들과 스테픈 울프의 전투도 묵직하게 연출됐다.


가장 좋았던 마지막 액션도 살펴보자. <웨던 컷>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았던 슈퍼맨 혼자만의 활약으로 싱겁게 끝났다면, <스나이더 컷>은 DC 유니버스 영화들 중 가장 드라마틱하게 담아냈다. 다크사이드의 등장과 마더 박스의 융합으로 계획이 실패하면서 절망의 국면으로 향한다. 이때 플래시가 빛보다 빠르게 달리면서 시간을 역행하는데, 정키 XL의 웅장한 스코어와 놀라운 시각효과가 감정적인 격정을 불러일으킨다. 이후 마더 박스를 분리하고, 아쿠아맨-슈퍼맨-원더우먼이 차례대로 스테픈 울프를 공격하며 마무리 짓는다. 팀업 무비로서의 재미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면서 다크사이드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멋진 장면이 탄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각 히어로들의 고뇌와 성장, 연합은 물론 불필요한 유머의 최소화, 압도적인 액션과 드라마틱한 하이라이트 시퀀스 덕분에 <스나이더 컷>은 기나긴 여정을 담은 대서사시이자 히어로들의 신화가 되었다. 초반 고대 전투를 담은 벽화를 기억하는가. <스나이더 컷>은 그 벽화와 같다. 마침내 뭉친 히어로들은 악에 맞서 승리했다. 그리고 곧 다가올 거대 악, 다크사이드에 맞서기 위해 다시 준비를 할 것이다. 다크사이드도 예전처럼 대침공을 준비할 것이다. 즉, <스나이더 컷>은 하나의 신화이면서 다음의 전설을 예고하는 예언서다.



고쳐지지 않은 DC 유니버스의 고질적인 문제들

그럼에도 <스나이더 컷>에는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난다. 이는 그간의 DCEU 영화들에서 볼 수 있던 고질적인 문제들이다. 바로, 팬서비스다. 분명 <스나이더 컷>에는 멋진 팬서비스가 가득하다. 다크사이드의 고대 전투, 플래시의 아이리스 구출, 히어로들의 죽음과 황폐화된 미래, 마샨 맨헌터의 등장이나 나이트메어 시퀀스는 멋지다. 특히 배트맨과 조커의 대화 시퀀스는 두고두고 회자될 만하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연극적이면서 스스로를 미친놈이라고 세뇌한 듯한 조커가 아닌, 자레드 레토만의 흥미로운 조커의 재탄생은 분명 유의미하다.


하지만 과연 필수적인 장면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알다시피 잭 스나이더는 공식적으로 이 영화를 끝으로 DC 유니버스를 떠난다. 다크사이드도, 나이트메어 시퀀스 속 미래도, 마샨 맨헌터도 기약이 없다. 오히려 <웨던 컷>이 정사로 취급받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저 팬서비스에 그칠 뿐 향후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물론 앞서 말했듯 잭 스나이더의 헌사 개념이지만 결국 사족인 셈이다. 아무리 좋게 봐도 해당 장면들은 사족에 불과하다. 이는 <배트맨 대 슈퍼맨>의 문제점과 동일하다. 솔로 영화로 빌드업을 다지지 않으니 이렇게나 러닝타임을 길게 늘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특히 플래시의 아이리스 구출이나 마샨 맨헌터의 등장, 나이트메어 시퀀스, 렉스 루터(제시 아이젠버그)의 빌런 연합 계획은 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잭 스나이더가 집착하는 슬로모션 남용도 몇 장면 덜어냈다면 러닝타임을 꽤 단축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슈퍼맨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마찬가지다. 슈퍼맨은 최강이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다. 스테픈 울프를 손쉽게 처치하는 장면은 <웨던 컷>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탓에 초반과 중반에 나타난 스테픈 울프의 카리스마는 증발해버린다. 차라리 스테픈 울프를 둠스데이만큼 강하게 설정해 후반부 전투의 처절함을 부각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히어로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빌런을 좋아하는 내게 스테픈 울프는 <웨던 컷>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이외에도 후반부 스테픈 울프를 처치하는 데 배트맨이 빠진 것도 아쉬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나이더 컷>은 분명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DC 유니버스 영화들 중 가장 의미 있는 영화다. 다시 DC의 정체성을 회복함과 동시에 잭 스나이더의 비전이 그대로 담긴 기념비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팬도 함께 만든 영화라는 점에서 더 뜻깊게 다가온다. 팬들의 바람과 응원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나오는 과정마저 영화 같았던 <스나이더 컷>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이제 모든 것을 쏟아낸 잭 스나이더는 떠난다. 미완성된 대서사시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긴 하지만, 길고 힘들고 외로운 싸움을 겪었을 잭 스나이더의 마음이 담긴 영화를 만났다는 점, 긴 여정을 끝까지 함께 한 팬들을 떠올리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 있다. 다시 만날 지도 모르지만, 잭 스나이더에게 작별인사를 보내고 싶다.


잭 스나이더 감독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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