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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스콘 Oct 06. 2021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강철비> 속 묵직한 대사는 누구에게 향하는가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대담하고 영리하다. 이것이야말로 <강철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아닐까? 2017년 12월은 그야말로 대작들의 격전이었다. <강철비>와 <신과 함께-죄와 벌>(이하 <신과 함께>), <1987> 순으로 개봉했으며 결과는 각각 달랐다. <신과 함께>는 한국 상업 영화의 새로운 지표를 열었다는 평과 함께 천만 돌파 흥행을 기록하였다. <1987>은 '올해 최고의 한국 영화'라는 찬사를 받으며 역시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강철비>는 두 작품에 비하면 초라했다. 많은 관심도 없었고 논쟁도 없었다.


나는 이러한 <강철비>에 대한 무관심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개인적으로, <강철비>는 앞서 말한 두 작품보다 돋보이는 영화였다. 나에게는 감성에 젖어 방황하는 다수의 한국 영화에게 강력한 한 방을 날린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양우석 감독이 향후 한국 영화계를 이끌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묵직하고 날카로운 화법

그동안 남북 소재의 영화는 숱하게 많았다. 코미디부터 드라마, 액션 등 다양한 장르로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강철비>는 그러한 영화들과 차별화되었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주제를 밀고 들어가는 힘이다. 무거운 주제를 가진 한국 영화 중 상당수는 우회적으로 돌려서 말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는 안전성을 추구하면서 생긴 결과물이며 주제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반면 <강철비>는 위험할 정도로 강력하게 돌진한다. 북한 쿠데타 발생과 북한 지도자가 남한으로 내려오는 설정, 핵전쟁 발발 위험 등 논란이 될 여지가 있는 주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마 양우석 감독 본인이 냉철한 시선으로 고찰한 현 남북 상황에 대해 말하고 싶은 부분이 많았고, 그 이야기를 하는 데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대표적으로 곽철우의 서울대학교 강의 장면과 인천공항에서 이루어진 각 나라 고위 관계자들과의 만남, 그리고 결말이 그렇다. 해당 장면들은 과해 보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관객에게 주제를 확실히 전달하려는 길로 보인다. "핵은 핵으로 밖에 이길 수 없는 거 알잖아.", "그래, 멀쩡한 나라 두 동강 내놓으니까 이렇게 서로 고생하잖아." 등의 대사는 감독의 노골적이면서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으려 애쓴 모습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대개 이러한 소재의 영화는 북한을 조금이라도 미화하거나 절대악으로 비추기만 해도 양쪽 진영에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 <강철비>는 균형을 맞춘다. 보수 진영의 대통령과 진보 진영의 당선인의 입장 차이나 대한민국이 북한의 핵을 갖는다는 설정, 평화 통일 주장 등은 보수-진보 편 가르기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는 영리한 접근이다. 특히 현 대통령과 당선인의 입장은 극명하게 다르지만 정당성을 가짐으로써 관객이 두 인물에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에선 하나의 이념만이 옳고 그른 게 아니다. 이렇듯 무거운 주제를 정공법으로 돌파하고 묵직한 대사들을 통해 이야기를 쉽게 풀어놓는 양우석 감독의 능력은 한국 영화가 배워야 할 기술이다.


그들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

우린 오랫동안 남북문제를 그들만의 이야기로 여겨왔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시큰둥했고 미국의 선제공격설에도 무관심했다. <강철비>는 남북문제가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곽철우와 엄철우가 각각 남과 북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면 단숨에 와닿는다. 극 중 곽철우는 엄철우에게 음식과 옷을 사준다. 마치 남한의 대북 지원을 연상케 한다. 또한 식당에서 마주 보고 앉은 장면이나 쇠사슬 사이에서 작별하는 모습은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멀리 있는 남과 북의 상황을 대변한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 중 하나인 식당에서의 장면을 주목해보자. 엄철우는 수갑을 찬 상태다. 곽철우는 그런 엄철우와 마주 보며 앉아있다. 음식이 나오자 엄철우는 불편하게 먹는다. 이를 지켜본 곽철우는 그의 옆에 앉아 수갑을 함께 찬다. 이후 식당에서 나가려 할 때 수갑을 벗기려고 하지만 잘 안 되자 엄철우가 열쇠를 넘겨받아 풀어준다. 이 장면에서는 현 남북 상황을 압축하고 이후의 상황을 기대하는 모습이 다 담겨있다. 수갑을 엄철우에게 채운 것은 남한이 북한을 고립시켰음을 의미한다. 음식을 건네준 건 앞서 말했듯 대북 지원이다. 옆에 나란히 앉아 서로 수갑을 찬 채 음식을 먹는 건 한쪽 손을 못 쓰고 떨어질 수 없는 남북의 상황을 은유한다. 마지막으로 엄철우가 수갑을 푼 것은 어찌 보면 통일을 의미한다. 남한을 대표하는 곽철우가 풀려고 하는데 잘 안 되자 엄철우가 열쇠를 넘겨받고 푸는 행동은 통일이 남한만의 노력이 아닌 북한의 적극성, 태도에 있음을 말해준다.


논란의 결말에 대하여

<강철비>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관객이나 호평을 한 관객 일부는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해 강하게 부정한다(몇몇 영화평론가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제껏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장면인 탓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사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평화 통일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남과 북이 핵을 공동으로 소유하게 되는 결말은 관객 입장에선 당혹스러울 수 있다. 만약 핵 이전이 아닌 북한의 비핵화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관객의 비판은 줄어들었을까?


그럼에도 나는 영화의 결말이 큰 불만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우선, 한국의 핵 보유는 곽철우가 이전부터 원해왔던 꿈이다. 혹자는 결말이 작품의 전개와 이질적이며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이라고 강하게 반박은 못하겠지만 극 중 곽철우의 대사나 이념을 생각해본다면 크게 내용과 엇갈리지 않는다. 영화 초반, 통일부 장관 정세영과의 대화에서 곽철우는 끊임없이 복잡한 국제정세에서 살아남으려면 핵을 보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듯 곽철우는 (이전 양우석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밝혀졌듯) 제대로 된 보수적 가치를 지닌 우익으로 등장하며 영화의 결말은 이러한 곽철우의 신념이 현실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힘의 균형을 이루어야만 어느 한쪽이 괴멸당하지 않으며 함께 평화를 논의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또한 감독이 (매우 위험하게 보이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억지스러운 결말로 이끌어냈다는 비판이 있다. <씨네21> 1172호 안시환, 송형국, 김소희 평론가 대담에서 <강철비>의 결말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어 매우 위험하다고 밝혔다. 이는 곧 영화 내 세계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만들어낸 원인이 된다고도 덧붙였다. 내 생각은 다르다. 작품의 메시지가 반드시 창작자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김중혁 소설가가 영화당에서 밝혔듯 작품 속의 의견을 창작자의 의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래된 오해이다. 이어 해당 장면에 대한 토론이 관객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길 바란 것이라고 유추했는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양우석 감독이 이 작품을 만든 이유는 현재 한국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점검하는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어서다. 즉,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결말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를 감독은 원했을 것이다. 단순히 비핵화에만 집착하는 게 아닌 다른 방안들도 염두해야 한다는 감독의 메시지를 우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강철비>는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지 못했다. 일반 관객들이나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이렇다 할 담론이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영화는 묻혔다. 이 작품만큼 현실과 소통하고자 하는 영화는 드물기에 더 아쉽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는 양우석 감독이 지금처럼 욕심을 갖고 우직하게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그로 인해 담론의 장이 활짝 열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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