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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스콘 Oct 10. 2022

대지의 경계를 지우다

<힐다, 산속의 왕과 마주치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힐다>가 스페셜 무비 <힐다, 산속의 왕과 마주치다>(이하 <산속의 왕>)로 돌아왔다. 나로서는 이 영화를 반드시 볼 수밖에 없었는데, <힐다>는 내가 근래 본 애니메이션 시리즈 중 최고였기 때문이다. 일단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우리의 마음을 녹인다. 그리고 북유럽 신화에 기반한 신비로운 세계와 극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비주얼, 스코어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힐다> 시리즈의 가장 큰 강점은 자연친화적이고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교훈적인 이야기에 있다. 결국은 이야기하는 태도와 메시지인 것이다. <산속의 왕> 역시 그러한 태도,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들이 되어보기

다행히도 나의 기대는 정확했다. <산속의 왕>은 하나의 거대한 갈등을 해결하는 것에서 최선의 선택을 보여준다. <힐다> 세계관에는 인간과 트롤의 대립이 가장 크게 두드러진다. 트롤을 막기 위해 도시 '트롤버그' 주위로 장벽을 세운 인간들은 트롤을 적대시해왔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인간은 왜 트롤을 '적'으로 설정했을까? 그들이 거대해서? 포효가 무서워서? 물론 그것들도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트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는 혐오를 낳았고 그 혐오를 바탕으로 편견을 만들어냈다. 알버그를 비롯한 순찰대는 트롤버그의 시민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언론에서 트롤의 위협을 부각하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트롤의 공포를 과장하면서 거짓된 정보를 생산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선과 악의 이분법,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의 흔적이기도 하다. 인간은 선이며 트롤은 악이라는 이분법. '우리'와 다른 인종 혹은 민족을 구분하고 배제시켜 '그들'을 만들어 낸 후 적대시하는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그리하여 우리(인간)의 결속력을 공고히 하는 것. <힐다> 시리즈는 내내 이러한 근대적 산물에 대항해왔다. 먼저 트롤버그시를 보자. 그 도시에는 백인과 흑인, 히스패닉 등 다인종이 거주하고 있으며 히잡을 두른 여인 등 종교의 자유도 보장되어 있다. 또한 높은 직책에 남성과 여성 모두 등장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성 평등을 내세운다. 이번 영화에서는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트롤을 향한 혐오를 멈출 것을 촉구하며 시위까지 하면서 주체적인 학생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힐다는 어떨까? 힐다는 항상 대화로 풀어나갔다. 마녀, 거인, 엘프, 유령 등이 문제를 일으키면 힐다는 이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맞서 싸우지 않았다. 왜 이런 짓을 벌이게 된 것인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힐다는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리고 이해와 공감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힐다에게는 선과 악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각자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다른 목적을 지닌 존재들, 친구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산속의 왕>은 더 나아간다. 이제는 '그들이 되어보기'로 넘어간 것이다. 힐다는 대화로 이해와 공감하려 노력해왔다. 대화는 갈등을 푸는 좋은 방법이지만 완전한 이해나 공감이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언제나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방법은 그들이 되는 것이다. 힐다는 트롤의 딸인 바바와 위치가 뒤바뀌어 트롤 아이가 되어버렸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힐다는 혼란스러워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며 절망에 빠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트롤의 역사와 트롤의 능력, 그리고 트롤이 처한 어려움, 트롤의 삶을 알아가고 체험했다. 트롤(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된 힐다는 비로소 트롤에 대한 편견과 공포, 혐오를 버리게 되었다. 이렇듯 <산속의 왕>이 택한 전개 방식은 매우 영리하며 눈부신 성과다.


가이아의 자손들

힐다는 깨달았다. 더 이상 트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전히 트롤버그 시민들은 트롤을 무서워한다. 순찰대는 트롤을 퇴치하기 위해 무력을 감행한다. 아무리 힐다가 트롤의 삶을 체험한 소녀일지라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트롤을 향한 혐오를 멈추라고 촉구할지라도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놀랍게도 <산속의 왕>은 다시 한번 영리한 방식을 택한다. 지난 시즌부터 궁금했던 부분은 왜 트롤이 트롤버그시 주위에 몰려 있고, 계속 도시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지였다. 마침내 이 영화에서 그 이유가 나오게 되는데, 트롤버그시가 위치한 깊숙한 지하에 모든 트롤의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트롤의 어머니의 부름에 트롤이 반응을 한 것이다. 이를 알게 됐을 때 인상적인 장면들이 나온다. 힐다가 산속의 왕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붉은 구슬을 만지자 환상 속으로 빨려 들어간 장면을 주목해 보자. 환상 속에서 힐다는 굉음과 함께 깊숙한 땅속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형상을 마주하게 된다. 그 형상은 힐다의 어머니였고 자신을 계속 부르고 있었다. 이는 프리다와 순찰대장 알버그에게도 똑같이 나타난다. 모두 자신의 어머니가 자기를 부르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땅속에 있는 건 트롤의 어머니다. 어째서 환상 속에서는 인간, 각 캐릭터의 어머니 형상으로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우리 모두 대지에서 태어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딛고 있는 땅에서 태어나 지금까지도 살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 땅을 어머니로 형상화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연상케 한다. 우리는 가이아의 자손이다. 인간과 트롤 모두 대지에서 태어난 가이아의 자손이므로 서로 다른 모습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서워하고 혐오할 필요가 없다. <산속의 왕>은 대화를 넘어 그들이 되어보기로 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뿌리를 대지로 설정하면서 인간과 트롤, 혹은 다른 종족 모두 대지의 자손임을 역설해 우리와 그들의 경계를 지웠다. 이러한 연출과 태도에 나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속의 왕>은 영리한 방식으로 포용의 가능성, 공생과 화합의 길을 만들었다. 이러한 성취는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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