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튀르키예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여전히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탓에 해외에서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외국에서 만난 한국인은 대개 둘 중 하나였다. 작정하고 나온 세계 여행자 거나, 설레는 마음으로 신혼여행을 떠나온 부부 거나. 구별 방법은 간단하다. 행색을 보면 된다. 한껏 멋 낸 이들은 단기 여행자. 반면 티와 반바지로 구성된 단출한 옷차림, 살짝 닳은 힙색, 자기 몸집 만한 가방 등은 세계 여행자의 표식과도 같다. 특히 100일 정도 긴 경험이 쌓인 세계 여행자는 그들만의 진한 바이브를 풍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 단기 여행자 물이 덜 빠졌다)
여느 평범한 아침이었다. 호텔 로비에서 딱 봐도 '올~ 여행 좀 했나 본데?' 하는 한국인을 만났다.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의 남성은 정신없이 영상편집을 하고 있었다. 아마 유튜버겠지. 방해하고 싶지 않아 '오마낫, 한국인이세요?' 하는 뻔한 인사는 자체 생략. 그때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상대가 먼저 "안녕하세요~" 하며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대화의 물꼬가 트였고, 우린 이런저런 수박 겉핥기 식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두 달 차 세계 여행자였다. 한 달간 인도 여행을 마치고 이제 막 튀르키예로 넘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유튜버였다. 유튜브를 시작한 지는 이제 한 달 남짓 됐으며, 그 사이 구독자가 600명 넘게 모였다고 이야기했다(완전 부러웠다. 참고로 그는 지금 1만 명 넘는 구독자를 모은 셀럽!). 그때만 해도 우리 구독자는 0명이었으므로 유튜브 한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채널 알려주세요~ 구독할게요~!"를 마지막으로 우린 방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했다. 살짝 불안하기까지 했다. '아, 여행 유튜버 진짜 많네. 더 많은 후발주자가 생기기 전에 우리도 빨리 시작해야 하는데' 하는.. 그랬다. 정말 오랜만에 느낀 이 불안감의 정체는 경쟁 심리였다. 그걸 깨닫고는 어이없어서 혼자 허허실실 웃었다. 나 왜 여기까지 와서 남이랑 경쟁하려고 그러니. 유튜브 하려고 세계여행 온 게 아니잖아. 그냥 더 행복하려고, 길 위에서 많은 것을 배우려고, 인생에 다시없을 경험 하려고 선택한 길이잖아. 주객이 전도되면 이렇게 우스워진다.
근데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한국인이라면 거의 대부분, 너무나 어릴 때부터 누군가와 경쟁하는 삶을 살아왔으니까. 쟤보다 공부 잘해야지, 쟤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지, 쟤보다 좋은 직장 잡아야지, 쟤보다 먼저 돈 불리고 집 사야지 같은. 심지어 어릴 땐 발육 상태로도 경쟁하지 않나. 기자로 밥벌이할 때 알게 된 사실인데 요즘 성장호르몬 주사 놔주는 병원이 문전성시란다. 금지옥엽 키운 내 자식이 또래보다 뒤처진다는 건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인 거다. 나 역시 늘 누군가와(때론 내 스스로와) 경쟁했고, 어떻게든 뒤처지지 않으려 안간힘 쓰며 살아왔다. 한국인 몸안엔 경쟁 DNA가 인처럼 박혀있는 게 확실해.
그래서 슬픈 거다. 다들 뭐 좋아서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받아가며 경쟁하겠나. 사회 분위기가 우릴 경쟁의 괴물로 만드는 거겠지. 남보다 잘나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끊임없이 경고하기 때문이겠지. 경쟁에서 살아남거나, 도태되거나. 탈락한 자들을 위한 패자부활전은 없다. 제때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제때 좋은 직장을 잡아, 제때 멋진 상대를 만나 결혼하는 '그럴듯한' 삶이 ‘이상’이라고 믿으며 모두가 경주마처럼 달릴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이렇게 아픈 게 아닐까. 3050클럽 같은 그럴듯한 겉싸개만 있으면 뭐하나.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십수 년째 OECD 자살률 1위라는 타이틀이 우리 사회가 병들었다는 걸 증명하는데. 너무 많은 한국인이 경쟁했고, 여전히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간다.
이제는 그런 두려움과 압박감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지고 싶다. 누군가와 경쟁하며 스스로를 갉아먹고 싶지 않다. 나만의 속도로, 내게 주어진 삶을 천천히 음미하며 살고 싶다. 남들 다 집 살 때 혼자 원룸 살면 어때! 남들 다 결혼해서 애 낳을 때 나 혼자 여전히 길 위의 방랑자면 어때! 남들 과장 달 때 다시 0년 차 직장인이 되면 어때!라고 자신만만하게 외쳐본다. 나이 지긋한 어른이 보기엔 치기 어린 구호처럼 들릴까? 하지만 내 진심이 그렇다. 지금껏 너무도 많은 비교와 경쟁 속에서 내 삶이 소진됐다. 안락한 둥지를 과감하게 벗어난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온전한 내 자신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