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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누리 Sep 19. 2022

세상만사가 이렇게도 어리석다니!

여행과 음식에 관한 고찰(이라기 보단 푸념)

당황할 건 아무것도 없어. 모두가 육체적인 장애 때문이야! 고작 맥주 한 잔, 빵 한 조각으로... 이렇게 금방 명석해지고 의식이 맑아지고 의지도 확고해지니 말야! 쳇, 세상만사가 이렇게도 어리석다니!


도스토옙스키의 걸작 '죄와 벌'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며칠간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주인공이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또렷한 정신을 되찾으며 뇌까리는 말이다. 오랜만에 죄와 벌을 다시 읽으며 뜬금없이 이 문장에 꽂혔다. 예전엔 평범하게 넘겼을 부분이다. 맞아. 먹는 게 가장 중요하지. 며칠간 굶은 청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맥주 한 모금에 정신이 또렷이 살아나는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저 문장을 내 기준으로 치환한다면 '고작 흰쌀밥, 김치 한 줄기로... 이렇게 금방 머리가 명석해지고 의식이 맑아지고... 어쩌고' 쯤 되겠다.


해외살이가 길어지니 먹는 게 전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가장 큰 고민은 '오늘 뭐 먹지?'. 가장 큰 소망은 '아, 쌀밥에 국 한 그릇만 있으면 딱 좋겠다' 정도. 그도 그럴 것이 난 지독한 '한식 쟁이'다. 토속적인 입맛(?)의 부모님 덕분에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각종 나물, 김치, 쌈채소, 자반고등어로 구성된 우리네 밥상을 즐겨 먹었다. 친구들은 맛없다고 남기는 생선구이, 미역줄기 볶음 같은 급식도 나는 늘 만족하며 먹었다. 치킨, 햄버거도 좋아하지만 그건 가끔 먹을 때나 맛있게 느껴진다. 나는 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 가장 좋아하는 조합은 쌀밥+미역국+파김치. 여기에 잡채까지 있으면 그날은 뭐 성인돼지파티 하는 거다.


세계여행 떠나오면서 가장 걱정한 부분도 바로 먹는 거였다. 이 정도 장기여행은 처음이었기에 타지에서의 매 끼니가 상상이 안 됐다. '매일 뭐 먹고살지? 나 김치 없으면 밥 못 먹는데, 김치는 어디서 구하지?' 같은. 지금이야 많이 내려놓은 상태지만, 여전히 하루하루 먹는 게 가장 큰 고민이다. 특히 튀르키예와 이집트를 거치면서 고생깨나 했다. 튀르키예는 세계 3대 미식 국가라면서, 죄다 종류만 다른 케밥뿐이었다. 그래도 초반인지라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는 뽕에 취해 막 힘들진 않았다. 진짜 힘든 건 이집트부터. 이집트 전통 음식은 먹기 싫고, 그렇다고 한 끼에 3~4만 원씩 나오는 한식당을 매일 갈 수도 없고 미칠 노릇이었다. 그나마도 한식당은 카이로에나 있었지, 다른 데선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다. 룩소르에선 얼마나 먹을 게 없었으면 전날 먹고 남긴 치킨으로 이틀을 연명(?) 한 적도 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말. 그. 대.로. 먹을 만한 게 없었다. 세끼 연속 치킨으로 배 채우는 슬픔을 아시는지.. 그래서 요즘엔 라면이나 김치가 보일 때마다 틈틈이 쟁여두는 이상한 병에 걸려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못 먹고 다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오히려 세계여행자치고 "지금 한국이니?"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한식을 자주 먹는 편이다. 한식당과 아시아 식료품점이 많은 유럽으로 넘어오면서 먹을 고민이 조금 사라지긴 했다. 당장 복기해봐도 어제저녁은 삼겹살에 비빔면, 어묵탕을, 오늘 아침엔 해장으로 신라면을 먹었다.


무엇이든 먹을 땐 참 맛있게 먹는다. 이보다 끝내주는 밥상은 없을 거라며 참 맛있게도 해치운다. 하지만 여기선 뭘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다. 사실 해외에서 사 먹는 한식이야 거기서 거기다. 적당히 현지화된, 혹은 적당히 김밥해븐 맛이 나는. 대충 식재료 사다 숙소에서 해 먹는 음식이 훨씬 맛있다. 루마니아에서 먹은 삼겹살과 쌈장 조합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근데 아직까지 흰쌀밥과 국을 못 해 먹었다! 그래서 속이 허한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건 따뜻한 밥, 국, 그리고 서너 가지의 반찬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매일같이 이동해야 하는 여행자에겐 참 어려운 밥상이다. 일단 국을 끓이려면(가장 좋아하는 미역국 기준) 국간장도 있어야 하고 참기름도 있어야 하는데, 이걸 다 살 수가 없다. 한 끼 먹자고 국간장과 참기름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닐 수 없고 허허.


아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지금은 따뜻한 미역국 한 그릇에 밥 말아먹고 싶다. 거기에 잘 익은 파김치 하나 착 올려서! 다른 반찬은 다 필요 없다. 술 잔뜩 마신 다음 날이면 무교동 북엇국이 그렇게 생각난다. 뽀얀 북엇국에 오이지 잔뜩 넣어서 우걱우걱 퍼먹는 게 포인트다. 회사 다닐 때 참 자주 갔던 참치집에서 얼큰한 도미탕도 한그릇 하고 싶다. 충무로 인현시장에서 먹었던 갈치조림도 생각나고, 매콤한 쭈꾸미 불고기도 그립다. 덕수궁 근처 허름한 삼겹살집에서 삼겹살에 오징어볶음, 찌개까지 풀코스로 먹고 싶다. 아 맞아! 아마 세계여행 끝날 때까지 절대 먹지 못할... 조개구이..! 조개구이! 정말 먹고 싶다. 그리고 여기 사람들은 왜 생선을 죄다 굽거나 튀길까? 초장이랑 막장에 신선한 광어회 딱 찍은 다음에 깻잎에 야무지게 싸서 한 입. 멍게, 해삼, 산낙지, 개불, 문어 같은 해산물도 미친 듯이 먹고 싶고.. 또 뭐 당기지? 아직 배는 부른데 왜 침 고이냐..


함께 여행하는 남자친구는 삼시세끼 피자만 먹고도 살 수 있다고 한다. 근데도 틈만 나면 하는 말이 "우리 한국 가면 그거 먹자. 크~ 거기에 딱 김치 하나 올려서! 어때 미쳤지"다. 그럼 내가 "아 거기 미쳤지. 그리고 그것도 무조건 먹어야 돼" 하면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한국에서 갔던 맛집 이야기하는 거다. 거봐! 당신도 한국(에서 먹는) 음식 그립잖아! 비싼 돈 들여가며 세계여행 나와놓고, 늘 하는 이야기라곤 한국 음식뿐이라니 하하.


이제 세계여행 시작한 지 140일이 넘었다. 적당히 대충 먹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시점이다. 하나 확실한 건 지나고 보면 이것도 다 추억이 될 거란 사실. 딱 한 조각(?) 남은 김치 버리기 아쉬워서 지퍼백에 싸들고 온 사연, 끼니때마다 매콤한 맛이 땡겨서 쌈장 꺼내 먹은 사연 등. 지금 생각해도 웃기네 뭐!



p.s. 사진은 어제자 저녁. 삼겹살과 비빔면, 모두 쟁쟁한 녀석들인데 유독 이날은 어묵탕 앞에서 기를 못 폈다. 어묵탕 승. 엄청난 맛이었다. 무려 네 번이나 다시 끓여 먹은 끝에 보내주었다. 소인에겐 아직 어묵탕 재료 2분의 1이 남았습니다! 내일 저녁 또 해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들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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