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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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화 시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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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바위 얼굴
영달산이 가장 먼저 깨어나는 새벽,
수천 년 흐르는 적막의 강줄기 위로
현재와 미래의 꿈결 같은 아홉 풍경이 번진다.
겹겹이 쌓인 기암절벽,
쇠말뚝의 상처조차 산맥의 맥을 꺾지 못하고
노적봉 다산목의 뿌리 깊은 숨결은
역사의 혼란마저 품어 이어진다.
한 시대의 상처를 껴안은 항구,
섬처럼 외로이 남은 시련과 수탈의 기억 속에서도
보리 마당 타작 소리는
굶주린 민족의 배고픔을 달래주었다.
다도해 연안, 물과 바다가 어우러진 길목,
유달산의 줄기는 동해로 뻗어가는데
당신의 별빛은 어디로 흘러간 것인가.
파도 소리 산을 적시면 눈물샘도 메말라,
실타래처럼 이어지는 인연 속에
철새의 노랫소리 당신 곁으로 돌아오고,
유달산 자락엔 이별의 연습조차 없이
애틋한 그날의 역사가 노래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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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불심 깊은 사유로 읽는 〈큰 바위 얼굴〉
서두》
깨어나는 산의 얼굴
시의 첫머리 “영달산이 가장 먼저 깨어나는 새벽”은 자연의 각성을 인간의 정신적 각성으로 비유한 장엄한 시작이다.
산은 불가에서 ‘부동(不動)’과 ‘청정’의 상징이다. 새벽에 깨어나는 산의 모습은 곧 불가의 무명(無明)을 걷어내고 지혜광명(智慧光明)이 솟아오르는 순간을 드러낸다. 시인은 이 산을 통해 인간 정신의 큰 얼굴, 곧 깨달음의 거울을 세운다.
<적막의 강줄기 공(空)의 자리>
“수천 년 흐르는 적막의 강줄기”는 소리 없는 법음(法音)이다. 유수는 흘러가되 자취를 남기지 않고, 적막은 단절이 아니라 무아(無我)의 본래 자리다. 강은 단순한 자연의 흐름이 아니라 불가의 ‘연기(緣起)’를 드러내는 장엄한 시간의 강물이다. 그 위에 현재와 미래의 꿈결 같은 풍경이 비친다는 구절은, 시간과 존재가 본질적으로 허공과 같이 비어 있으나 동시에 무궁히 펼쳐지는 가능성임을 시사한다.
< 기암절벽과 쇠말뚝 업(業)과 불굴의 법신>
겹겹이 쌓인 기암절벽은 무수한 업력(業力)의 퇴적을 떠올리게 한다. 일제강점기의 쇠말뚝은 민족의 혼맥을 끊으려는 폭력의 흔적이지만, 시는 단언한다. “산맥의 맥을 꺾지 못하고.” 이는 업력 속에서도 본래면목(本來面目)은 훼손되지 않음을 증언한다. 불법(佛法)에서 법신불(法身佛)은 결코 훼손되지 않듯, 유달산 또한 상처를 안으면서도 여전히 이어져 있다.
< 노적봉 다산목 뿌리 깊은 생명력의 상징>
“노적봉 다산목의 뿌리 깊은 숨결”은 단순한 자연의 묘사가 아니다. 다산목은 세속의 풍랑에도 끄떡없는 불굴의 생명력을 드러내며, 불가의 ‘심지(心地)’와 같다.
뿌리는 땅속 깊은 곳,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자양분을 끌어올린다.
이는 곧 무수한 고난 속에서도 불심은 땅속에서 끊임없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 항구와 시련 바다의 고해(苦海)>
“한 시대의 상처를 껴안은 항구”는 고해의 바다와 같다. 식민과 수탈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섬처럼 고립되어 남아 있다.
그러나 “보리 마당 타작 소리”는 민중의 배고픔을 달래는 자비의 울림으로 울려 퍼진다.
이 장면은 무상(無常)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민중의 생활력, 곧 불법이 민중의 땀방울 속에서 살아 있음을 드러낸다.
< 다도해와 유달산 지혜의 방편>
“물과 바다가 어우러진 길목”은 중도(中道)의 자리다.
다도해는 무수한 섬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상호의존의 세계이며, 유달산은 그것을 동해로 뻗어 나가는 통로로 제시한다. 여기서 시인은 묻는다. “당신의 별빛은 어디로 흘러간 것인가.” 이 질문은 곧 깨달음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불가의 화두와 같다.
별빛은 보리심(菩提心)의 은유이며, 그 행방은 곧 수행자의 자각에 달려 있다.
<파도와 눈물샘 대자비의 감응>
“파도 소리 산을 적시면 눈물샘도 메말라”는 구절은 대자비(大慈悲)의 감응이다.
파도가 산을 적시는 이미지는, 거대한 불보살의 눈물이 고해를 씻어내는 장면과도 같다. 그러나 동시에 “눈물샘도 메말라”라는 역설적 구절은 무상 속에서 더 이상 울 수 없는 자리에 이른 존재의 고독을 말한다.
이는 곧 열반의 고요와도 연결된다.
<실타래 같은 인연 연기(緣起)의 법칙>
“실타래처럼 이어지는 인연 속에”라는 구절은 불교적 핵심 교리인 연기를 드러낸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얽히고설켜 있으며, 그 인연의 매듭 속에서 생멸이 반복된다.
철새의 노래가 돌아오는 장면은 업력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은유로 읽힌다.
<이별 없는 자락 무상과 자비의 화음>
“유달산 자락엔 이별의 연습조차 없이”라는 표현은 무상한 세상에서조차 진정한 이별이 없음을 암시한다. 불심의 깊은 자리에서는 죽음조차 단절이 아니라 변용이며, 모든 존재가 다시 법계 속에서 만나게 된다. 시인은 이 불교적 세계관을 “애틋한 그날의 역사가 노래로 피어난다”는 서정으로 담아낸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 울리는 불가의 진리다.
< ‘큰 바위 얼굴’의 상징 본래면목(本來面目)>
제목의 ‘큰 바위 얼굴’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존재의 얼굴이다. 그것은 단순한 지형적 바위가 아니라, 역사와 민족, 그리고 인간 본성의 본래 모습이다. 불가에서는 ‘본래면목’이라 부르는 깨달음의 얼굴이다.
시인은 자연과 역사의 상처를 관통해 그 본래 얼굴을 찾아 나서는 길에 독자를 동참시킨다.
<역사와 불심의 화해>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와 민족 수난사의 흔적을 곳곳에 배치하면서도 단순히 고통을 회고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심의 자비와 연기 사상으로 그 상처들을 화해시키고, 미래로 열어가는 큰 얼굴의 형상을 보여준다.
이는 역사가 불법의 장 안에서 성찰될 때,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지혜로 전환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 불교적 시선과 민족적 정체성>
이 시는 불교적 사유를 토대로 민족의 정체성을 성찰한다. 유달산, 영달산, 다도해 등 구체적 지명을 통해 민족적 뿌리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뿌리 위에 불심의 깊이를 더한다. 민족적 기억과 불교적 깨달음이 결합할 때, 시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영속적 진리로 거듭난다.
<불심과 예술의 교차>
이 시는 불심을 철저히 시적 언어로 구현한다. 불교의 추상적 개념들이 자연 이미지와 역사적 기억 속에서 구체적 감각으로 살아난다.
그 과정에서 예술과 종교는 하나의 길을 걷는다.
시는 불심을 인간적 감수성으로 번역하며, 독자가 일상의 자리에서 깨달음을 체험하게 만든다.
<불심의 현대적 의미>
현대사회는 과거와 달리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으나, 여전히 정신적 결핍과 단절에 시달린다. 이 시는 그런 현대인에게 불심의 길을 제시한다. 큰 바위 얼굴처럼 흔들리지 않는 본래면목을 찾아야만, 우리는 역사의 상처를 화해시키고 미래를 향한 지혜를 얻게 된다는 메시지다.
<맺음말 불심의 등불로서의 시>
〈큰 바위 얼굴〉은 단순한 자연시도, 단순한 역사시도 아니다. 그것은 불심의 등불로 역사의 어둠을 비추는 서사적 서정시다. 산과 바다, 별빛과 파도, 항구와 인연의 이미지들은 모두 하나의 얼굴로 모인다. 그것은 곧 불심 깊은 자각의 얼굴이며, 우리 모두가 마침내 마주해야 할 깨달음의 얼굴이다. 이 시는 그 얼굴을 향한 집단적 수행의 노래라 할 수 있다.
평론을 하면서 와닿는 천도화 시인은 불심의 깊은 사유로 시를 쓰는 깊이 있는 시인으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