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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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치복(發祥致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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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 박두익 시인
세상사 너무 가까이에서
세밀하게만 들여다보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 안목을 넓혀
사물을 바라보니
발상치복(發祥致福) 생각이 바뀌는 자리에서 상서로운 일들이 의외로 자주 일어나 행복에 닿는다
주위에 꾸준히 마음을 나누다 보면
이것저것 쌓인 것들이 어느 날
생각보다 빠르게 되돌아오기도 한다
상서로운 일들이 자꾸 이어지고
이모저모 도움을 받으며 살다 보니
이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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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해학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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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치복’이 보여주는 관점의 이동과 삶의 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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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교훈이 아니라 시선이 바뀌는 순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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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치복〉을 처음 읽을 때, 잠시 덕담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몇 줄을 더 읽는 순간, 이 시는 곧 다른 방향으로 걸어간다.
이 시는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어디에서 보고 있었는지를 바꿔 보자고 조용히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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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붙잡고 있는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가’에 가깝다.
시인은 세상을 “미시적으로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태도를 내려놓는다.
이 미시는 관찰이기보다 집착에 가깝다.
손익을 따지고, 속도를 재고, 억울함을 계산하는
오늘의 삶을 지배하는 사고방식이다.
그 지점에서 시인은 한 발 물러선다.
안목을 넓히는 순간,
사물과 관계는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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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치복’은 운이 아니라 시간을 믿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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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치복(發祥致福)’이라는 말은
자칫 길흉화복의 언어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를 읽다 보면 그런 오해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 작품이 말하는 복은
갑자기 떨어지는 행운이 아니다.
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이미 와 있었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결과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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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풀다 보면
이것저것 누적이 되어
바로 돌아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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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솔직한 역설이 있다.
‘누적’은 오랜 시간을 뜻하지만,
‘바로 돌아온다’는 말에는 체감의 언어가 담겨 있다.
오래 쌓인 태도는
어느 순간 갑자기 돌아온 것처럼 느껴진다.
복은 느닷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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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해학은 웃음보다 힘을 빼는 방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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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치복〉에는 독한 풍자도,
세태를 향한 분노도 없다.
그 대신 이 시는 세상을
조금 가볍게 내려놓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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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이모저모’
이 말들은 애매해서 좋다.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자신의 삶을 자연스럽게 겹쳐 읽게 된다.
시인은 세상의 계산서를 펼쳐 보이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이.
이 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정답이 아니라 태도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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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받으니”에서 멈추는 사람다운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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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결말에서 가장 오래 머물게 된다.
시인은 끝내 이렇게 말한다.
“도움을 받으니.”
성공했다거나, 이루었다거나,
남들보다 앞섰다고 말하지 않는다.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이 인식은
자기 완결적인 성공 서사를 조용히 무너뜨린다.
이 시의 화자는
혼자 잘난 사람도,
홀로 견뎌낸 영웅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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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이다.
그래서 결론도 크지 않다.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로다”
이 문장은 낙관이라기보다
조심스러운 합의에 가깝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함께 살아볼 수는 있다는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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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말하는 시가 아니라 삶의 밀도를 조정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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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치복〉은 성공을 부추기지 않는다.
행복을 목표로 내세우지도 않는다.
대신 삶의 초점을 조금 옮겨 보자고 말한다.
세밀함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세상을 조금 크게 바라볼 때,
행복은 애써 붙잡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살다 보면 곁에 와 있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 시는 요란하지 않다.
그러나 읽고 난 뒤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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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미 ― 시와 삶이 만나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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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독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래,
이 세상은 아직은 살 만한 곳이고,
그렇게 살기로 선택한 사람의 삶은
시로 남을 만하다고.
젊은 시절 고등고시에 합격하며
세속적 성공의 가장 빠른 길 위에 섰던 시인은,
그 전망을 내려놓고
언어와 사유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
시인으로서
속도보다 깊이를,
지위보다 태도를 선택한 한 문학인의
두 번째 삶을 조용히 실현해 가고 있다.
내가 이 시에서 끝내 믿게 된 발상치복은
바로 그 선택의 시간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도달한 삶의 결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