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문학박사 정근옥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를 기리며~하얼빈역에서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하얼빈역에서 ― 안중근 의사를 기리며


정근옥(시인)


돌길에 피멍이 맺혀도 비열하지 않으련다/

모든 걸 내려놓고, 의로움의 숨으로 선다


꺾이지 않는 목숨으로, 부끄럼 없이/

대장부의 삶 곧게 세우고 방아쇠를 당긴다


찬 서리에 떨어지는 꽃잎에 묻혀/

이등박문 (生)의 꽃도 진다


흰빛의 백성들아, 나라보다 소중한 게 있는가/

작은 등불 서로 건네며 독립의 길을 가라


누런 달빛 스미는 밤, 목숨마저 비우고,/

한 점 별이 되어, 참의 길을 장대히 가리라





피로 쓴 장소, 별로 남은 이름


장소가 먼저 울린다


이 시를 읽으면 인물이 아니라 장소가 먼저 떠오른다.

하얼빈역.

총성이 울렸던 자리, 눈발이 흩날리던 공기, 기차의 쇳소리.

정근옥 시인은 단순히 안중근을 기념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처럼 쓴다.

이 시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가 아니라

역사 속에 서서 쓰는 시다.

그래서 읽는 이도 자연스레 그 돌길 위에 서게 된다.

돌은 차갑다.

그러나 그 위에 맺힌 피는 뜨겁다.

시의 첫 행이 이미 온도를 갖는다.




“비열하지 않으련다”라는 윤리


“돌길에 피멍이 맺혀도 비열하지 않으련다.”


이 한 문장은 단순한 결의가 아니다.

이것은 죽음보다 앞선 선택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흔히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비열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자기 영혼 앞에서 하는 고백이다.

안중근은 총을 들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을 재판대 위에 세웠을 것이다.

이 시는 바로 그 내면의 법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은 영웅의 신화를 쓰지 않는다.

양심의 기록을 남긴다.


내려놓음과 섬


“모든 걸 내려놓고, 의로움의 숨으로 선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포기와 다르다.

욕망을 내려놓고, 두려움을 내려놓고,

심지어 생에 대한 집착까지 내려놓는 일이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하나, ‘숨’이다.

의로움의 숨.

시인은 의를 추상으로 말하지 않는다.

호흡으로 말한다.

숨은 살아 있음의 증거다.

그 호흡이 의로움이라면

그 삶은 이미 방향을 정한 것이다.


방아쇠 이전의 고요


“대장부의 삶 곧게 세우고 방아쇠를 당긴다.”


많은 글들이 이 장면을 격정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정근옥 시인의 시는 차분하다.

‘곧게 세운다’는 표현 속에는

내면의 수직이 들어 있다.

마음이 기울지 않도록

영혼이 흔들리지 않도록

한 번 더 자신을 세우는 행위.

총성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을 만들기까지의 시간은 길다.

이 시는 그 긴 시간을 압축해 보여준다.


꽃이라는 단어의 무게


“이등박문 생(生)의 꽃도 진다.”


놀랍도록 절제된 표현이다.

분노도, 저주도 없다.

대신 ‘꽃’이 있다.

꽃은 피고 지는 존재다.

한 생도 결국은 지는 꽃이다.

시인은 적을 미워하는 언어 대신

덧없음을 말한다.

이 장면에서 시는 폭력이 아니라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총은 인간을 죽이지만

시인은 생을 꽃으로 부른다.

이 절제는

시인의 품격이다.


백성을 향한 질문


“흰빛의 백성들아, 나라보다 소중한 게 있는가.”

이 문장은 외침이 아니라 질문이다.

질문은 강요보다 강하다.

스스로 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흰빛은 순수이자 고통의 색이다.

억눌리고 상처받은 백성의 빛이다.

시인은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는다.

등불을 건네라 말한다.

혁명은 거대한 불길이 아니라

작은 등불이 이어지는 일임을

이 한 구절이 보여준다.


별로 남는 존재


마지막 연은 시 전체를 들어 올린다.


“한 점 별이 되어, 참의 길을 장대히 가리라.”


총성은 역사 속 사건이다.

그러나 별은 상징이다.

별은 어둠이 있어야 보인다.

그리고 오래 빛난다.

안중근의 행위는 한순간이었지만

그 정신은 별처럼 남는다.

시인은 그를 별로 만든다.

그것은 미화가 아니라

시간을 건너는 방식이다.


그 자리에서 쓴다는 것


이 시가 더욱 깊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장소’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그 자리.

그 역사적 공간을 떠올리며 쓰는 일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공간은 기억을 품는다.

그리고 시는 그 기억을 깨운다.

정근옥 시인의 언어는

관광이 아니라 경건에 가깝다.

그래서 이 작품은 기념시가 아니라

참배시처럼 느껴진다.


영웅을 넘어 오늘로


이 시는 과거를 말하지만

결국 오늘을 묻는다.

우리는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시대에 살지 않는다.

그러나 비열하지 않을 용기는 여전히 필요하다.

나라보다 소중한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 던져진다.



정근옥 시인의 시는

안중근을 높이 세워두고 끝내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작은 등불 하나를 건넨다.

총성이 아니라

조용한 결의다.

피의 자리가

별빛으로 바뀌는 순간.

이 시는 바로 그 변화를 기록한다.

그래서 이 작품을 덮고 나면

우리는 묻게 된다.

나는

비열하지 않은가.

나는

곧게 서 있는가.

그리고 한가지

이 시의 가장 깊은 울림은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장소에서 시를 써내려간 정근옥 시인의 굳게 다문

일자형 입술, 상상만해도 울림을 남기는 시로 시는 시인을 오래 기억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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