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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아 둔 자리예요

by 송알송알


“이 자리 있어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자리 있다는 말의 의미를 아주 잠깐 알아듣지 못했다. 동네 도서관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강연회가 열렸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강연 시작 시간보다 20여분 일찍 갔다. 출석부를 보니 도착한 사람이 아직 몇 명 되지 않았다. 이 말인즉슨 내가 원하는 자리는 어디든지 앉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앞에서 두 번째 줄의 가운데 자리를 선호한다. 구석보다는 가운데가 집중하기 좋다. 눈과 귀의 신체적 사정으로 말미암아 조금 더 잘 보이고 잘 들리는 앞쪽에 주로 앉는데, 첫째 줄은 마치 강연자와 독대하는 것 같아 부담스러워 둘째 줄을 좋아한다. 아~ 이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누군가 앉아 있었다. 다음에는 더 일찍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아니 앉으려고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의자를 빼는 중에 ‘자리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 자리를 맡아 놓으셨구나. 아~ 네.”

보통 자리를 맡을 때는 뭔가를 올려 두지 않나. 가방, 책 아니면 휴지라도 올려놓는 정성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것도 없이 말끔하고 깨끗한 자리는 빈자리가 확실하지 않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보다 더 늦게 온 누군가에 밀려 내가 앉고 싶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이 언짢았다. 기분이 나쁘지만 어쩌랴. 강연장은 넓고 앉을 수 있는 자리는 많다. 작가와 독대할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예전부터 ‘자리 대신 맡아주기’가 싫었다. 강연에서 친구와 바로 옆자리에 앉을 필요가 있나? 강연 때 수다라도 떨 생각인가. 오는 대로 빈자리에 앉아 강연에 집중하고, 강연이 끝난 후 인사하고 얘기를 나누면 될 일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도자기‘라는 말이 있었다. 도서관 자리 대신 맡아주는 기둥서방이라는 말이다. 일찍 온 친구 하나가 자신의 소지품을 총 동원해 자리를 맡아주곤 했다. 그렇게 일찍 오지 않아도 되는 친구들은 느지막이 나타났다. 오죽 꼴 보기 싫었으면 ’ 기둥서방‘이라는 멸칭을 썼겠나. 도서관 자리가 워낙 부족해서 생긴 일이지만 아닌 것은 아닌 거다.


뭔가를 위해 줄을 설 때도 마찬가지다. 내 앞에 분명히 몇 명 없었는데 때가 되면 어디선가 우르르 떼를 지어 나타나 내 앞줄에 당당하게 아무렇지도 자기 차례처럼 줄 속에 끼어들던 사람들이 많았다. 내 어릴 때는 왕왕 그랬다. 요즘은 이런 새치기는 거의 사라졌다고 하니 다행이다 싶다. 대신 주차장 자리 맡기로 시끄럽다. 가끔 뉴스에서 볼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또 다른 누군가가 맡아 놓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명당이니까 당연하다. 강연 시작 때까지 자리 임자가 오지 않거나, 강연 시작 후 들어오면 억울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한 마디를 해야 하나? 어떻게 말해야 기분 나쁘지 않을까? 조금 떨리는데? 다행(?)으로 맡은 자리의 주인이 강연 시작에 딱 맞춰 들어왔다. 그 사람은 늦게 왔지만 좋은 자리에 앉아서 행운이라고 생각할까. 친구 잘 둬서 기분이 좋을까. 나는 참 민망할 것 같다. 게다가 살다 보면 반대의 경우가 될 수 있다. 그때는 기분 상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나.


강연은 참 좋았다. 마음이 풀렸다. 그런데 한참 지나 이 글을 쓰다 다시 화가 난다. (옹졸한지고) 그때 맡아 놓았던 그 자리가 만약 마지막 남은 한 자리였다면 나는 그 강연에 참석 못했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지 뭔가. 아니면 항의를 해서 그 자리에 앉았을까? 설령 앉았다한들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으리라. 아이 참. 자리 맡아주기는 그만합시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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