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신화처럼 숨 쉬는 고래에게로 ‘가자’

이 상의 「날개」를 읽으며

by 윤슬

현란을 극한 정오!!

밤의 여왕이 노래를 부른다.

아스피린과 아달린 사이에서 어찔어찔함을 느끼며 잘 끓은 커피 한 잔을 찾아 경성역으로 달려간다. 숱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눈을 마주쳐도 얼굴을 마주 봐도 알 리 없는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간다. 빠-앙 경적을 울려대던 자동차가 급하게 멈춰 선다. 한 곳으로 몰려드는 눈동자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는 남자에게 한 잔의 커피는 사방을 둘러봐도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을 힘겹게 걸어온 낙타의 늙은 주인에게 쓰디쓴 입맛을 거두기 위해 남겨진 한 모금의 물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주머니엔 돈이 없다. 낙타의 늙은 주인에게 얻어 마실 한 모금의 커피를 살 돈 이 없는 남자……그 남자, 이상……그는 떠나고, 그가 남긴 문학의 방, 볕이 들지 않는 장지(葬地), 그곳에서 싸구려 커피를 마시던 놈들이 둘러앉아 격정에 휩싸인 ‘밤의 여왕’을 본다.


지옥의 복수심이 내 가슴에 끓어오르고

죽음 그리고 절망이

죽음과 절망이 내 주위에 불타오르네

만일 자라스트로가 너로 인해 죽음의 고통을 맛보지 않는다면

자라스트로가 죽음의 고통을 맛보지 않는다면

그러면 너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

그러면 너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

영원토록 버림받고

영원토록 빈궁하고

영원토록 파괴될 것이다

혈육으로 이어진 모든 끈이

버려지고 빈궁해지고 파괴될 것이다

혈육을 이은 모든 끈이

모든 모오드은 끈이

모든 자연의 끈이 끊어질 것이다

만일 네 손으로 자라스트로를 죽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들어주소서

복수의 신들이여!

들어주소서 이 어미의 소원을……


남자가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던 날은 무척이나 서글픈 날이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전차의 날카로운 또는 우렁찬 기적 소리가 모차르트보다 더 가까웠다고 말하던 그날에 남자는 메뉴에 적힌 음식의 이름을 여러 번 읽어 내렸다. 치읽고 내리읽고, 읽고 또 읽고……그 속에서 어머니를 부르며 별을 헤던 어느 시인의 시구에 나오는 이름들……패(佩), 경(鏡), 옥(玉)을 자신의 어릴 적 동무들 이름처럼 느껴보고, 별을 헤는 시인의 마음처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짬,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떠올려보는 시상(詩想)에 이름은 몰라도 빠뜨리지 않고 떠오르는 얼굴들, 삼십삼 번지 십팔 가구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밤빛에 환하게 물든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점원들은 가게를 정리해가고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또 일어서야 하는 열한 시가 좀 지났을 무렵, 남자는 내몰리는 감각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어디서든 자정을 넘겨야 하는 것이다.

연심(蓮心)이!!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 그녀에게로 가는 시간은 밤 열두 시를 넘겨야 한다.


어쨌든 나섰다. 나는 좀 야맹증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밝은 거리로 골라서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러고는 경성역 일이등 대합실 한곁 티룸에를 들렀다. 그것은 내게는 큰 발견이었다. 거기는 우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안 온다. 설사 왔다가도 곧들 가니까 좋다. 나는 날마다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내리라 속으로 생각하여 두었다. 제일 여기 시계가 어느 시계보다도 정확하리라는 것이 좋았다. 섣불리 서투른 시계를 보고 그것을 믿고 시간 전에 집에 돌아갔다가 큰코를 다쳐서는 안 된다. 나는 한 복스에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마주 앉아서 잘 끓은 커피를 마셨다. 총총한 가운데 여객들은 그래도 한 잔 커피가 즐거운가 보다. 얼른얼른 마시고 무얼 좀 생각하는 것같이 담벼락도 좀 쳐다보고 하다가 곧 나가버린다. 서글프다. 그러나 내게는 이 서글픈 분위기가 거리의 티룸들의 거추장스러운 분위기보다는 절실하고 마음에 들었다. 이따금 들리는 날카로운 혹은 우렁찬 기적소리가 모차르트보다도 더 가깝다. 나는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 번 읽었다. 그것들은 아물아물한 것들이 어딘가 내 어렸을 때 동무들 이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거기서 내가 얼마나 오래 앉았는지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중에 객이 슬며시 뜸해지면서 이 구석 저 구석 걷어치우는 것을 보면 아마 닫을 시간이 된 모양이다. 11시가 좀 지났구나. 여기도 결코 내 안주의 곳은 아니구나. 어디 가서 자정을 넘길까. 두루 걱정을 하면서 나는 밖으로 나섰다. 비가 온다. 빗발이 제법 굵은 것이 우비도 우산도 없는 나 고생을 시킬 작정이다. 그렇다고 이런 괴이한 풍모를 차리고 이 홀에서 어물어물하는 수는 없고 예이 비를 맞으면 맞았지 하고 나는 그냥 나서버렸다.

대단히 선선해서 견딜 수가 없다. 코르덴 옷이 젖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속속들이 스며들면서 처근거린다. 비를 맞아가면서라도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거리를 돌아다녀서 시간을 보내려 하였으나 인제는 선선해서 이 이상은 더 견딜 수가 없다. 오한이 자꾸 일어나면서 이가 딱딱 맞부딪는다.

나는 걸음을 재우치면서 생각하였다. 오늘 같은 궂은 날도 아내에게 내객이 있을라구.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집으로 가야겠다. 아내에게 불행히 내객이 있거든 내 사정을 하리라. 사정을 하면 이렇게 비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알아주겠지.

부리나케 와 보니까 그러나 아내에게는 내객이 있었다. 나는 그만 너무 춥고 척척해서 얼떨김에 노크하는 것을 잊었다. 그래서 나는 보면 아내가 덜 좋아할 것을 그만 보았다. 나는 갑발(도자기를 구울 때 그릇을 담는 큰 그릇) 자국 같은 발자국을 내면서 덤벙덤벙 아내 방을 디디고 그리고 내 방으로 가서 쭉 빠진 옷을 활활 벗어버리고 이불을 뒤썼다. 덜덜 떨린다. 오한이 점점 더 심해 들어온다. 여전히 땅이 꺼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만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이상 「날개」(문학과 지성사, 한국문학전집, 이상 단편선 290~291쪽) 이하 동일


그날, 아내의 목소리는 은근한 것이 무척이나 다정했다. 변소간 똥통에 처넣어버린 벙어리 속 은화들보다 가뿐한 음향으로 날개라도 달린 듯 날아와 남자에게 안기던 지폐는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한줄기 소낙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돈이 없어 우는 것이 아니냐며 어린아이 엉덩이를 두들기듯 다정한 말로 엣소, 던져주며 오늘일랑 어제보다 좀 더 늦게 들어와도 좋다고 속삭이던 연심에게서 이는 변심의 기운은 느끼지 못해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모차르트의 여인 ‘밤의 여왕’은 그 모습이 휘황하고 찬란하였다. 그 등장은 시녀들과 함께였고, 그 무대는 휘황하고 찬란한 별의 무리들이 갖가지 빛깔로 반짝이며 그녀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을 받아 구슬처럼 꿰어 밤의 막을 수놓고 있었다. 검은 불길이 유황불처럼 타오르는 격정의 순간들에 그녀를 호위하는 무수한 별들이 그녀의 열망을, 분노에 찬 열망을 탱글탱글 익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빛을 잃어버린 여인, 남편인 태양왕이 죽음을 맞으며 했던 말들, 자신이 그동안 일구고 가꾸어왔던 제국의 빛나는 업적들은 모두 자라스트로에게 돌아갈 것이니……그대는 다만 딸과 자신의 안위만을 지키기 위해 지난날의 모든 영광을 잊고 수더분하게 살아가라며 남긴 마지막 말……그 말과 함께 빼앗긴 빛의 세계를 되찾기 위해 몰두했던 여왕의 몸은 이미 잿빛이었다. 붉은 기운은 열망으로 골몰한 시간들 속에서 타고 또 타고 또 타오르는 동안에 새까맣게 물들어 잿빛으로 너울거리는 춤사위가 되고 말았다. 팔에 낀 토시를 타고 너울거리는 분노의 춤사위, 몸에 꼭 끼게 입은 드레스를 밀고 올라오는 풍만한 가슴을 할긋거리며 넘보는 불길, 그것의 춤사위……이 모든 것들이 빼앗긴 것들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에서 터져 나온 것들이었다. 왕관을 휘감고 내리는 얇은 사(絲) 요염한 면사포엔 따스한 기온이라곤 느껴볼 수 없는 음습한 밤의 기운만이 자르르 흐르며 빛나고 여왕은 놀라 비틀거리는 딸 파미나 공주에게 명령을 내린다.

단호한 명령, 그것은 자라스트로를 죽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남편 태양왕에게 몰락의 수모를 안기고, 자신의 딸 파미나 공주마저 끌어가며 어미의 가슴에 엄마를 부르는 딸의 두려움에 떠는 공포의 목소리를 메아리처럼 남기고 간 그 고통의 시간들 속에서 끊임없이 연구를 거듭해 온 여왕의 명령……자라스트로를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만일 자라스트로가 너로 인해 죽음의 고통을 맛보지 않는다면, 자라스트로가 죽음의 고통을 맛보지 않는다면……그러면 너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 그러면 너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어대며 내리는 명령, 그 차가운 명령이 사랑으로 충만한 로즈빛 처녀 파미나의 가슴에 균열을 일으킨다. 지옥의 복수심으로 끓어오르는 여왕의 눈빛, 죽음의 절망만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여왕의 분노에 찬 가슴속 절규가 밤의 기운을 타고 흘러내린다. 두 개로 나누어 부를 음을 셋으로 나누고 한 음 한 음 끊어서 부르는 격정의 아리아가 쇳물의 용솟음으로 밀려들어온다. 이미 사람의 목에서 튕겨 나오는 음이 아니다. 용광로의 이글거리는 불속에서 녹아내리고 차가운 물속에 처박혀 움츠러들다가 수십만 번 두들겨 맞은 소리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숲을 가득 메운 가시나무새의 마지막 몸부림이라 해도 이르지 못할 음의 정점, 그 세계가 여왕의 가슴에서 이글거리며 포효하는 분노의 절정으로 치달아 오른다. 사랑으로 충만한 로즈빛 처녀 파미나 공주의 손에 쥐어진 칼이 균열이 인 가슴에 금을 그어댄다. 금이 그어진 곳곳에 슬픔이 스며든다.


비는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 자정이 되기까지 한 시간이나 남은 그 밤의 거리에 비는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 예정에 없던 비가 살이 부러져 제멋대로 찌그러져버린 우산조차 없는 남자의 밤에 내려 발길을 묶어버린 것은 얄궂은 운명이 아달린의 세계로 이끌어가기 위한 모략, 치밀하게 짜여진 덫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마리 슬픈 짐승을 포획하기 위한 그물……제멋대로 자라난 나무들이 저희들끼리 어우러져 음습한 냄새를 풍기며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쯤에 드리워져 있는 거미줄처럼 어떤 위기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온 몸에 척척 감기어드는 덫, 그날 밤 경성역에 내린 비는 남자를 아달린의 환각 속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포획의 그물, 아스피린의 향기를 품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나는 고 벙어리를 변소에 갖다 넣어버렸다. 그때 벙어리 속에는 몇 푼이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고 은화들이 꽤 들어 있었다.

나는 내가 지구 위에 살며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지구가 질풍신뢰의 속력으로 광대무변의 공간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참 허망하였다. 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는 현기증도 날 것 같고 해서 한시바삐 내려버리고 싶었다.

이불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난 뒤에는 나는 고 은화를 고 벙어리에 넣고 하는 것조차가 귀찮아졌다. 나는 아내가 손수 벙어리를 사용하였으면 하고 희망하였다. 벙어리도 돈도 사실에는 아내에게만 필요한 것이지 내게는 애초부터 의미가 전연 없는 것이었으니까 될 수만 있으면 그 벙어리를 아내는 아내 방으로 가져갔으면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아내는 가져가지 않는다. 나는 내 아내 방으로 가져다둘까 하고 생각하여보았으나 그 즈음에는 아내의 내객이 원체 많아서 내가 아내 방에 가볼 기회가 도무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변소에 갖다 집어넣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서글픈 마음으로 아내의 꾸지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내는 끝내 아무 말도 나에게 묻지도 하지도 않았다. 않았을 뿐 아니라 돈은 돈대로 내 머리맡에 놓고 가지 않나? 내 머리맡에는 어느덧 은화가 꽤 많이 모였다. ― 이상 「날개」 (280~281쪽)


아내에게 내객은 절대적이다. 남자가 비로소 찾아낸 일종의 쾌감, 그것의 대가인 돈을 주고 가는 사람들, 아내를 찾아오는 객들……그러나 남자에게 그것의 실체는 아직 모호하다. 아내가 자신에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 싫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다만 돈이 자신의 손가락에 닿는 순간에서부터 벙어리 주둥이에서 자취를 감추기까지의 하잘것없는 짧은 촉각이 좋았을 뿐 아무 기쁨도 없었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왜 내객들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는가의 까닭은 아직 모호한 거기 어디쯤이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남자가 살고 있는 지구, 질풍신뢰의 속력으로 광대무변의 공간을 달리고 있지만 그것이 뭐? 어쨌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허무한 세상, 그 언저리에서 자꾸만 밀려드는 감정 허망함, 한시바삐 내려버리고 싶은 지구라는 이름의 열차, 그 속에서 남자는 내객이 원체 많아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아내의 방을 두고 변소의 똥통에 집어넣어 버리고 만 것, 그것은 도덕인가, 예술인가, 이미 무너져버린 자리에서 또다시 허물어져버려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20세기의 인간성 상실 그 폐허 두엄자리인가?


나는 이불 속에서 아내에게 사죄하였다. 그것은 네 오해라고……

나는 사실 밤이 퍽이나 이슥한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것이 네 말마따나 자장 전인 줄은 나는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너무 피곤하였다. 오래간만에 나는 너무 오래 걸은 것이 잘못이다. 내 잘못이라면 잘못은 그것밖에는 없다. 외출은 왜 하였더냐고?

나는 그 머리맡에 저절로 모인 5원 돈을 아무에게라도 좋으니 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내 잘못이라면 그렇게 알겠다. 나는 후회하고 있지 않나?

내가 그 5원 돈을 써버릴 수가 있었던들 나는 자정 안에 집에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리는 너무 복잡하였고 사람은 너무도 들끓었다. 나는 어느 사람을 붙들고 그 5원 돈을 내어주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여지없이 피곤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좀 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 짐작 같아서는 밤이 어지간히 늦은 줄만 알았는데 그것이 불행히도 자정 전이었다는 것은 참 안된 일이다. 미안한 일이다. 나는 얼마든지 사죄하여도 좋다. 그러나 종시 아내의 오해를 풀지 못하였다 하면 내가 이렇게까지 사죄하는 보람은 그럼 어디 있나? 한심하였다. ― 이상 「날개」 (284~285쪽)


따라서 나는 또 오늘 밤에도 외출하고 싶었다. 나는 엊저녁에 그 돈 5원을 한꺼번에 아내에게 주어버린 것을 후회하였다. 또 고 벙어리를 변소에 갖다 처넣어버린 것도 후회하였다. 나는 실없이 실망하면서 습관처럼 그 돈 5원이 들어 있던 내 바지 포켓에 손을 넣어 한번 휘둘러보았다. 뜻밖에도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있었다. 2원밖에 없다. 그러나 많아야 맛은 아니다. 얼마간이고 있으면 된다. 나는 그만한 것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기운을 얻었다. 나는 그 단벌 다 떨어진 코르덴 양복을 걸치고 배고픈 것도 주제 사나운 것도 다 잊어버리고 활갯짓을 하면서 또 거리로 나섰다. 나서면서 나는 제발 시간이 화살 닫듯 해서 자정이 어서 홱 지나버렸으면 하고 조바심을 태웠다. 아내에게 돈을 주고 아내 방에서 자보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좋았지만 만일 잘못해서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갔다가 아내의 눈총을 맞는 것은 그것은 여간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저물도록 길가 시계를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고 하면서 또 지향 없이 거리를 방황하였다. 그러나 이날은 좀처럼 피곤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간이 좀 너무 더디게 가는 것만 같아서 안타까웠다. ― 이상 「날개」 (287~288쪽)


남자는 외출을 했다. 한 번은 5원짜리 외출이었고, 또 한 번은 2원짜리 외출이었다. 처음 5원을 주머니에 넣고 목적을 잃어버리기 위하여 거리를 헤맸던 남자는 깨달았다. 장지(葬地) 밖 거리는 경이에 가까울 만큼 빠르게 변화하여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그 속에서 자신은 급속도로 피로감에 휩싸이게 되었고, 밤이 이슥하도록 지향 없이 걸어보았지만 돈을 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자신은 몰려드는 피로를 어쩔 수 없어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자신의 머리맡에 저절로 모인 돈이 주는 일종의 쾌감을 알아보기 위해 나갔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 돈을 주어볼 수 없었다고 말하던 남자는 결국 집에서 ‘심리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내객과 함께 있는 아내의 방을 지나 장지(壯紙)로 나뉘어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며 아내의 눈초리를 따갑게 느낄 수밖에 없었고, 외출한 것을 후회하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동안 내객과 소곤거리는 아내의 낯선 행동을 느끼게 되고, 금방이라도 벼락을 내리칠 것 같은 기세로 노기 총총한 눈초리로 입술을 바르르 떠는 아내에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아내의 의심은 결국 털어내지 못한 남자, 그 남자가 비칠 비칠 의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달려가 아내에게 주머니 속 5원을 쥐어주고서야 아내의 방에서 잠을 자게 된 이튿날 깨닫게 된 것이다. 삼십삼 번지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 아내의 방에서 아내의 이불을 덮고 잠을 자본 맨 처음의 기억……이것이 남자가 비로소 깨닫게 된 내객들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는 심리, 아내가 자신에게 돈을 놓고 가는 ‘심리의 비밀’ 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어깨춤이 절로 나는 새로운 발견, 이제 남자는 많아야 맛은 아니지 않나 라고 추임새를 넣으며 거리로 나간다. 다 떨어진 코르덴 양복에 배는 고파도 모양새는 좀 구겨도 자정만 지나면 다시 아내의 방에서 잠을 잘 수 있지 않은가. 시간만 쏘아놓은 화살처럼 홱 지나가주면 되는 것 아닌가, 스스로 물으며 네활개를 휘저으며 거리로 나선다. 웃음이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삐져나오는 웃음……슬프다.

스스로 아내의 내객이 되어버린 남자, 그 남자의 거리에 비가 내린다. 연심이에게로 갈 수 있는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복수의 신들을 부르며 딸에게 칼을 쥐어주던 ‘밤의 여왕’도 퇴근을 한 모양인데, 다 떨어진 코르덴 양복을 입은 누추한 남자의 거리에는 남의 속도 모르고 눈물처럼 비가 내린다. 코르덴 양복은 빠르게 젖어들고 한두 개의 털이 꼬불거리며 붙어 있는 새까만 사마귀 같은 젖꼭지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고, 덥수룩한 털들이 꼬질꼬질 들러붙어 간질거리는 겨드랑이 사이로도 빗물이 스며들어간다. 몸은 추위로 오그라들고 덜덜 떨리면서 이가 딱딱거리며 맞부딪친다. 차가운 빗물이 등으로 파고들어 척추 마디마디를 훑으며 엉덩이께로 내려간다.

그렇게 갑발 자국을 내며 아내와 내객의 수준 높은 행위를 비집고 지나간 다음 날부터 남자는 쌉싸름한 것이 짐작 같아서는 아스피린인가 싶은 정제약 네 개씩을 먹고 죽은 것처럼 잠을 잤다. 감기가 다 나은 후에도 소태처럼 쓴 입맛의 여운 속에서도 남자는 또다시 외출을 꿈꾸었지만 다시금 돌아올 외출은 없었다.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맑스, 말사스, 마도로스, 다시……아스피린, 아달린. 조금씩 죽어가던 날들 끝에서 튕겨 나온 깨달음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이 남자의 발걸음을 아내에게로 옮겨놓지는 못했다. 밤새워가면서 도적질 하러 다니느냐, 계집질하러 다니느냐며 살을 물어뜯던 마당에서의 악다구니의 진위를 가리는 것에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한 남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외출을 목전에 두고 바지 포켓 속에 남은 돈 몇 원 몇십 전을 가만히 꺼내서는 미닫이를 열고 살며시 문지방 밑에다 놓고서 줄달음질을 쳐 나가고 만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코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온 스물여섯 해를 회고하여보았다. 몽롱한 기억 속에서는 이렇다는 아무 제목도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

나는 또 내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그런 대답은 하기가 싫었다. 나는 거의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

허리를 굽혀서 나는 그저 금붕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붕어는 참 잘들 생겼다. 작은 놈은 작은 놈대로 큰 놈은 큰 놈대로 다 싱싱하니 보기 좋았다. 내리비치는 5월 햇살에 금붕어들은 그릇바탕에 그림자를 내려뜨렸다. 지느러미는 하늘하늘 손수건을 흔드는 흉내를 낸다. 나는 이 지느러미 수효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굽힌 허리를 좀처럼 펴지 않았다. 등어리가 따뜻하다.

나는 또 회탁(灰濁, 회색의 탁한 이라는 뜻)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비적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오지들을 못한다. 나는 피로와 공복 때문에 무너져 들어가는 몸뚱이를 끌고 그 회탁의 거리 속으로 섞여 들어가지 않는 수도 없다 생각하였다. 나서서 나는 또 문득 생각하여보았다. 이 발길이 지금 어디로 향하여 가는 것인가를……. ― 이상 「날개」 (298쪽)


폐허의 두엄자리, 그곳에 몇 원 몇십 전을 꺼내놓고 달아난 남자를 향해 사이렌이 울린다.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 현란을 극한 정오. 남자가 숨을 쉰다. 남자의 폐가 소생의 숨을 쉰다.

장미는 언제쯤 다시 피어날지 모른다. 한 세기가 다 지나가도 삶에 희망을 불어넣을 한 모금의 ‘숨’을 소생시킬 싱그러운 향기, 한 송이의 장미가 언제쯤 다시 피어날지 짐작하지 못한다. 그러나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격정에 휩싸인 ‘밤의 여왕’을 보던 껄쩍지근한 놈들 중 한 놈이 일어나 외친다. 달에게로 가자고 외친다. 갈급한 목소리로 외친다.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고……달은 내일이면 다 차오르는데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며 부추긴다. 오늘도 여태껏처럼 그냥 잠들어버려서 못 갈지도 모른다고 조급해한다. 그래놓고도 소년의 눈에는 저기 뜬 달이 너무나 떨리더라며 가자고 가자고 조른다.

현란을 극한 정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떠는 듯한 찰나, 남자의 머릿속에서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이는 정오……그때 남자는 겨드랑이에 가려움증을 느끼고 자신의 인공의 날개가 돋았었던 자국, 그곳에 다시 소생의 날개가 돋는 것을 느낀다. 어렴풋이. 그리고 주문을 외운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다시 한번만 날아보자꾸나~ 외치며 두 팔을 머리 위로 한껏 쳐들어 올린다.

화정의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한 세기 전에 뜨겁게 한 생을 살다 간 소설가의 시와 수필을 떠올리고, 아직도 해석이 불가능한 작품을 해설서를 짚어가며 읽다가 접어두고서 모차르를 불러내고 밤의 여왕을 불러내고 타미노 왕자의 손에 든 마술피리를 생각하고 허풍쟁이 새잡이꾼 파파게노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문학을 생각한다.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이상을 탐독했던 놈들의 갈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달에게로 가자고 조르는 놈들의 소년을 떠올리며 문학을 떠올리며 눈물을 닦는다.

순수한 열정으로 사람들을 믿고 그 사람들에게서 다른 빛깔의 얼굴을 보고 떠밀려 나오고……그랬으면 말지. 또다시 사람을 믿고 그들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다가 촘촘하게 짜여진 그물에 덥석 안겨 들어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버려진 그곳에서 내려놓는 시간을 보내느라 흠뻑 젖은 화정 자신을 데리고 달려가려 한다.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에게로 달려가려 한다. 격정을 덜어내고 집착을 덜어내고 미련을 덜어내고……다만 이름이 있었을 뿐 실상은 없었던 무(無)의 세상으로 달려가려 한다. 문학, 그것의 아름다운 이름을 빌려서……숨 쉬는 고래에게 입술을 주고~ 고래의 등에 올라타 끝없는 바다, 푸르른 바다 그곳을 헤엄쳐보리라.


*대문 사진: ⓒnorbibuvar.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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