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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Apr 03. 2023

잘 차려입고 갈 데가 없다?(3)

  태양을 향해 활쏘기

     우화 한 토막 / 과녁과 화살


옛날 궁수들에게 태양을 향하여 활을 쏘라고 명령한 왕이 있었다.


왕이 보유한 최정예 궁수들은 가장 훌륭한 장비들을 사용해 온종일 태양을 향해 활을 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쏘는 족족 화살은 태양에 미치지도,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였다.


궁수들은 밤을 새워 화살을 광 내고 새로운 결심을 다진 후 활쏘기를 계속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왕은 진노하여 태양을 맞추지 못하면 살려두지 않겠노라 위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장 어린 궁수 한 사람이 작은 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가 정오에 동산 연못가에 앉아 있던 왕에게 나아가더니 연못 속에 반사되는 태양을 향해 활을 쏴 단 한 방에 태양의 중심을 꿰뚫어 버렸다.


이 우화는 헛된 목표에 사로잡혀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에게 주는 잠언이다.


남들이 쏘니까 나도 쏘고 남들이 준비하니까 나도 준비하는 것이다. 결국 의미 없이 삶을 낭비하고 남는 건 빈 주머니뿐이다.


하드웨어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면 소프트웨어 또한 온전치 못한 건 당연한 일일 터.


이렇게 평범한 진리를 나이 들어서야 깨닫는 이유가 뭘까? 만시지탄!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부터라도 태양을 향해 헛되이 쏘아대는 화살을 거두어들일 때다.

무모한 도전을 거둘 시간이 된 것이다.



      캐나다 인디언 커뮤니티 이야기


선교사역의 일환으로 수개월간 캐나다 인디언 커뮤니티에 동참한 경험이 있다.


캐나다 서부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서 알래스카 방향으로 쭉 뻗어 있는 로키 산맥 줄기는 태고의 원시림을 품고 있다.


하늘에 맞닿은 고산준봉들은 수많은 협곡들을 만들어 깎아지른 벼랑으로 내달리면서 처음부터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다.


암벽사이 크고 작은 크랙에서 떨어지는 도도한 물줄기는 구불구불 산기슭을 타고 내려와 수많은 호수들을 만든다.


검푸른 하늘 아래 정글처럼 빼곡히 들어선 숲 속에는 곰과 산양 같은 야생의 동물들이 무리 지어 살아간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오로라가 우주의 대파노라마를 연출할 무렵 은하수는 산골 통나무집 누각에서 빛을 뿌리고 있다.


인디언 원주민들의 삶의 본거지는 이런 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할리웃 영화는 그들의 원시적 생태계를 부정적 이미지로 바꿔 놓은 공로자다.


자금에 와서 그걸 바로잡기란 표범의 검은 반점을 지우는 것만큼이나 어려워 보이지만.


그들은 때 묻지 않은 원시성을 간직한 인류의 몇 안 되는 족속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 선입견은 금물이다.

현재 미국과 캐나다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인디언 커뮤니티는 주정부의 보호 아래 있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고 했던가.

이제는 박힌 돌들이 내쫓은 돌들을 긍휼히 여겨 보호해 주는 정책까지 펴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자비가 또 있을까 싶다.


참으로 인생의 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니까.


사정이 그러다 보니 인디언들의 삶은 상당히 안정되어 갔다.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말이다.


안정과 풍요는 때로 주머니 속에 든 칼과 같아서 언제든 자신을 찌르는 흉기로 돌변할 수 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는 빛과 어둠이 교차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돈, 풍요의 이중성


돈이란 물질도 예외는 아니다.

돈에는 강력한 이중의 스펙트럼이 작동한다. 왜 갑자기 돈 얘기일까.


인디언들이 가진 귀중한 유산인 공동체의식과 원시적 순수성을 돈이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물질의 풍요로움이란 강도가 그들의 삶을 침범해 소중한 보물을 강탈해 간 것이다.


화려한 돈의 광채 뒤에는 파괴의 어둠이 공존함을 인디언 공동체가 보여주고 있었다.


이십 세기 위대한 심리학자 칼 융은 북미 지역의 인디언 커뮤니티를 방문한 후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굳건한 가족애와 공동체의식 특별히 현역에서 은퇴한 어른들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은퇴한 원주민들은 사실상 인디언 커뮤니티 전체의 기둥이자 존경받는 리더였던 셈이다.


그러나 현재 경험해 본 바로는 융이 방문했을 때의 현실과는 모든 게 딴판이었다.


시간차이 때문일까?

그들에게는 태양이라는 목표지점도 그것을 향해 쏠 화살도 필요 없어 보였다.


목표의식 없이 그저 하루하루 컨베이어벨트처럼 기계적인 일상이 계속될 뿐이었다.


백인들의 돈이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는 순간 원주민들의 삶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풍요의 빛이 무기력이란 그늘을 만든 것이다. 물론 모든 원인이 돈에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자연은 빈 공간을 싫어한다'.

아주 오래된 물리학의 이 테제는 우리의 내면에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원주민들의 목표상실의 빈자리엔 정부와 다른 사람들 특히 백인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퍼주는 사람을 미워하는 역설의 심리가 맴도는 곳이 인디언 커뮤니티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아이들을 시작으로 장년과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악성 종양처럼 퍼져 있는 일종의 질병이었다.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자. 은퇴 후 풍요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복지의 혜택도 연금의 보장도 두둑한 퇴직금도 별로 없다.


보장되는 게 없는 것이다. 생활의 지독한 살풍경을 경험하는 일이 상여금으로 주어진다. 맨 땅에 헤딩이라도 해야 하는 형편이다.


만일 우리에게 인디언들처럼 모든 게 보장되는 풍요의 혜택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처럼 목표도 방향도 없는 무기력 인생으로 전락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감사하지 않은가.



      감사하며 살기


마약중독자들이 대다수인 그들 삶에 감사란 없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죽음이었다.


백인들에게 당한 트라우마가 마치 강력 접착제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오래전에 떠난 악령이 아직도 그들 마음에 찾아와 생명을 갉아먹고 있던 셈이다.


행복의 파랑새는 이런 류의 멘털 소유자들에게 가까이하지 않는다.


은퇴는 제 이의 인생을 여는 장엄한 출사표와 같다.

지난날 불행을 몰고 온 까마귀 떼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요놈들이 떠나지 않고 머리 위를 맴돌고 있다면 큰 일이다.


원망 분노 후회 낙심 우울...

까마귀들이 우리 안에서 이런 똥을 싸고 있지 않나 점검해 볼 일이다.


쫓아내지 않으면 머지않아 무기력에 빠지고 만다. 그렇다면 인디언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것이 은퇴자들을 기다리는 함정이다.


인디언들에게 은퇴 이후 혹은 노년의 삶이니 하는 따위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인디언 커뮤니티는 현재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시계제로의 원시사회와 방불한 곳이었다.


여기서 진실 한 가지를 배운다.

과거의 삶이 어떻든 지금 나를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교훈 말이다.


과거집착은 도전과 역동성이라는 액셀레이터를 부숴버린다.


인디언 원주민들이나 태양을 향해 화살을 쏘는 허무 개그의 주인공들 모두 은퇴자들이 그려 넣을 오마주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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