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문

넷째 날

by 도린


방앗간 일로 늘 바쁜 큰언니를 대신해, 고향집 부엌은 언제나 내 차지다. 오늘은 대구에 계신 시어머니를 뵈러 가는 날이라, 이른 아침부터 마음이 바쁘다.

찹쌀을 미리 물에 불려 두고 뒷마당 텃밭으로 나갔다. 땅콩, 상추, 열무, 부추, 고추, 대파, 가지, 호박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철조망에 기대어 자란 노각은 무심한 듯 넉넉하고 풍만한 자태로 두리뭉실 매달려 있었다.

나는 가지 몇 개와 여물기 직전의 애호박을 땄다. 가지는 살짝 쪄 갖은양념으로 무쳤다. 불린 찹쌀은 곱게 갈아 뭉근히 끓이고, 마지막에 흑임자 가루를 풀어 넣으니 고소한 향이 부엌 가득 퍼졌다. 어제

저녁 내가 만든 고추장 멸치조림을 과하게 먹은 조카가 체기가 돈다고 해서 끓인 흑임자 죽이다. 유정란으로 부드러운 계란찜도 완성되었다.

아침을 먹고 시댁으로 향하기 전, 방앗간 일로 분주할 큰언니가 점심때 먹을 수 있도록 호박전도 부쳐놓았다. 시누이들에게 줄 고춧가루, 참기름, 볶음깨를 챙겨 두 손 무겁게 버스에 올랐다.

나를 실은 버스는 대구로 달리고, 스쳐 지나간 가을 풍경은 다시 의성으로 돌아간다. 누렇게 익은 벼 이삭, 빨갛게 물든 사과, 나지막한 산자락과 마을들이 뒤로, 뒤로 줄지어 흘러간다.




큰 시누이 내외가 버스정류장까지 마중을 나와 주었다.
시어머니가 계신 막내 시누이 댁에 도착하니, 아주버님 내외도 와 있었다. 얼마 전 대상포진으로 크게 고생하신 시어머니가 걱정되어, 문안 겸 모인 자리였다.

대상포진이 얼굴로 번져 음식조차 삼키기 힘드셨다니, 신경을 따라 번지는 고통이 얼마나 깊었을까 싶었다. 그래도 다행히 큰 고비는 넘기신 듯 보였다.

동기간들은 차를 마시며 과일을 나누고 담소를 이어갔다. 나는 그 사이 누워계신 시어머니 곁에 앉아, 그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다들 잠시 얼굴만 비추고는 자기들 이야기 속에 푹 빠져 있다가, 간단히 기도만 하고는 금세 자리를 떴다.


소아병동은 가벼운 병증에도 조부모, 삼촌, 고모, 이모들로 북적이지만, 노인들이 머무는 병동은 참바람만 썰렁하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딸과 아들, 며느리와 시누이들이 모였다가도 저들끼리 하하 호호 웃음소리만 남기고 휙 돌아서는 풍경이 흔하다는 것이다.


늙는다는 건 서럽다. 늙어서 아프면 더 외로워진다. 기능이 떨어지고 감각이 둔해지며 몸은 불편해져도, 마음만은 여전히 누군가 곁에 머물러 주기를,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 나는 잠시나마 시어머니의 따뜻한 곁이 되어 드리고 싶었다.
그 마음 하나로, 조용히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 잔을 드시고 다시 곤히 잠드실 때까지, 나는 시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다른 동기간들은 한국에 있어 일 년에 서너 차례는 어머님을 찾아뵙지만, 나는 고작 일 년에 한 번, 그것도 며칠이 전부이니, 내가 제일 불효자다.


짧은 시간이나마, 불꽃효부 코스프레라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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