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둘째 날
오공주의 대구 여행 1
― 어디로 가느냐보다, 누구와 함께하느냐 ―
작년 제주도 여행에 이어, 올해는 남해로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여행일정동안 운전을 하기로 한 친구가 성묘길에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일정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급히 그 친구가 사는 대구로 모여 이박삼일 여행을 함께 하기로 했다.
시어머니, 시누이들이 살고 있는 대구에서 고향 친구들과 여행이라니—, 이 얼마나 짜릿한 일탈인가!
북쪽에는 팔공산 자락이, 남쪽에는 비슬산 등이 둘러싼 분지로 이루어진 대구는 지형상 연교차가 심하고, 비구름이 통과하기 어려워 여름엔 찜통더위, 겨울엔 칼바람이 부는 추위로 악명이 높다. 전 지구적 기상 변화로 해마다 최고 기온을 경신하니, ‘대프리카’라는 별명이 괜히 붙었겠는가!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한 밴쿠버의 건조한 여름날씨에 익숙해 있던 몸이,
오랜만에 마주한 대구의 눅눅한 습기와 공기 속 열기에 나는 금세 파김치가 되어갔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라는 사실이, 그 모든 더위를 단숨에 날려주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학교를 거쳐 80~90년대까지
같은 교회에서 청춘을 함께 보냈던 친구 둘, 그리고 일 년 선배 둘.
그 시절 반짝이던 웃음과 설렘을 고스란히 간직한 오공주가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대구에서 다시 뭉쳤다.
여행 첫날, 우리는 오후 늦게 숙소에 모여 여장을 풀었다.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겨 청라언덕과 계산성당을 둘러보았다.
6·25 전쟁 이후 피해가 적었던 지역적 이점과, 피난민 유입으로 인한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대구는 한때 한국 최대의 섬유 도시로 번성했던 곳이다.
1960~1980년대의 전성기를 지나, 저임금 노동력에 의존한 방직산업 구조와 글로벌 경쟁의 파고 속에서 섬유산업은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한때 대구는 서양 사과가 처음 도입된 도시 중 하나이기도 했다.
‘대구에 미인이 많은 것이 사과 덕분’이라는 속설이 생길 만큼, 사과는 이 도시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로 재배 환경이 변하면서 지금은 사과농사의 중심이 안동과 예천, 문경으로 옮겨갔다. 대구의 사과는 그렇게, 기억 속의 풍경이 되고 말았다.
섬유산업과 사과농사, 한때 대구를 상징하던 이 두 산업은 이제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지금은 자동차 부품과 기계금속이 도시의 주력 산업이 되었다.
이렇다 할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부족한 탓일까.
타 광역시에 비해 발전과 성장의 속도가 더딘 점이 늘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가 둘러본 곳들은
오랜 역사와 기록의 흔적이 남아있어 대구 여행의 나름의 의미를 전해 주었다.
한국 3대 성당 중 하나인 계산성당은 웅장한 고딕 양식으로 대구의 깊은 역사를 조용히 품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바닥 위로 부서지고, 마치 시간마저 잠시 멈춘 듯 마음이 고요해진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에 나오는 금명과 충섭의 결혼식 내부 촬영 장소였다는 이곳에서, 나는 잠시 내년에 있을 둘째의 결혼식을 상상해 보았다. 화면 속 웨딩드레스와 향기로운 꽃내음이 이 공간에 살아 숨 쉬는 듯 느껴지면서, 나도 모르게 결혼식 날의 기쁨과 긴장감에 미리 설레어보았다.
청라언덕은 그 풍경과 역사적 의미 덕분에
‘한국의 몽마르뜨 언덕’이라 불리는 곳이다.
초기 기독교의 근간을 세운 프랑스 선교사들의 주택과 방갈로 양식의 챔니스 주택이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우리는 계산성당에서 청라언덕으로 이어지는 3·1 운동 계단을 천천히 걸었다.
3·1 만세운동 당시, 이 길은 독립을 외치던 사람들이 오가던 통로였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한 계단 위에서, 그날의 함성이 후덥지근한 공기 사이로 간간이 스쳐오는 바람결에 실려왔다. 짧지만 익숙한 대구에서, 그렇게 하루를 보내며, 나는 역사 속을 거닐고 또 마음속으로 반추해 보았다.
저녁으로는 한우 숯불갈비를 먹었다.
숯불에 구운 야들야들한 갈비 한 점 위에, 의성 사투리 한 스푼을 얹은 저녁 식사.
한때 청춘을 함께했던 오공주들의 추억이
고소한 연기 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언어에도 회귀성이 있다던가.
만날 때마다 사투리로 쏟아내는 변함없는 레퍼토리, 배꼽 잡는 농담과 반복되어도 늘 새로운 듯한 옛이야기에, 봉인된 삶의 의무와 계급장이 하나둘 해제되고 있었다
이제는 환갑팀 진갑팀으로 나뉠 만큼 초로(初老)에 접어든 오공주들. 하지만 마음만큼은 여전히 그 시절 그대로다.
계획했던 남해 여행은 무산되었지만, 교통사고에도 크게 다치지 않아 이렇게 같이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했다.
숙소로 정한 한옥마을의 고즈넉한 정취는 오공주들의 수다 한 바가지에 와르르 깨져버렸다.
우리의 외형은 세월의 길이만큼 변해 있었다.
겸손하게 내려앉은 눈꼬리,
염색으로도 가릴 수 없어 희끗희끗 해진 머리카락,
눈가와 입가에 겹겹이 새겨진 주름은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담고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밤늦도록 이어진 웃음과 옛이야기, 사이사이로 번지는 장난스럽고도 걸쭉한 농담들이 끝이 없었다.
세월이 우리를 달라지게 했어도, 마음은 여전히 그 시절 그대로, 왁자한 격려와 수다가 우주의 한 귀퉁이를 시끄럽게 흔들어 놓고 있었다.
다음 날 시장 구경을 앞두고,
우리는 매달 모은 회비에서 ‘공주 품위 유지비’를 하사 받았다.
“서문시장에서 십만 원 쓰기 프로젝트!”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폭소가 터지고,
내일 펼쳐질 시장 구경과 쇼핑이 벌써부터
오공주들의 마음을 들썩이게 했다.
결국, 여행의 이유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