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번째 날
가을비 속의 망중한
천고마비의 계절,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10월의 아름다운 가을에 올해도 어김없이 내 나라를 찾았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기후 변화 앞에서는 어디도 비켜 갈 수 없나 보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가을의 청명함 대신 자주 비가 내렸다. 매년 기록을 갈아치우는 살인적인 더위 탓에 해수면 온도까지 올라, 이제는 10월에도 비가 잦다고 한다.
양양 여행 둘째 날도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호텔 조식 뷔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창밖을 바라본다. 촉촉이 젖어드는 풍경 속에 마음도 따라 젖어든다.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이렇게 비와 함께하는 여유가 얼마나 반가운지.
비가 잠시 그친 오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커피숍 'PEI Coffee'에 들렀다.
카페 문을 열자마자, 어디선가 낯익은 소녀가 반겨오는 듯했다.
빨간 머리에 주근깨,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빨강머리 앤’이 바로 여기 있었다.
캐나다 동쪽,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Prince Edward Island)를 배경으로 쓰인 빨강머리 앤을 모티브로 꾸며 놓은 카페였다.
어릴 적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나고, 캐나다에 와서는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DVD를 사 온 가족이 몇 번이고 함께 보며 내 마음속의 고전이 되어버린 이야기라서, 그 풍경이 더없이 반가웠다.
창 너머로 펼쳐진 양양의 바다는
어쩐지 캐나다의 해안선을 닮아 있는 듯했다.
넘실대는 파도 너머, 앤이 살았을 것 같은 초록 지붕의 집(Green Gable)이 어렴풋이 보일 것도 같았다.
커피 한 잔, 루이보스 티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으니
불현듯 매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사내아이를 원해 앤을 ‘잘못’ 입양했지만,
결국 진심으로 앤을 사랑하게 된 매튜가 조용히 건넨 그 한마디.
“Well now, I’d rather have you than a dozen boys, Anne.”
"난 열두 명의 남자아이보다 너 하나가 더 좋단다, 앤."
그 한 문장이 주는 울림은 언제 들어도 깊고 따뜻하다.
앤은 태어날 때부터 원치 않던 존재였지만,
진심 어린 선택과 사랑이 그녀를 진짜 가족으로 만들었다.
예정되지 않았던 인연, 기대하지 않았던 사랑—그 모든 것이 삶을 아름답게 바꿔놓는다.
맑고 청명한 가을 날씨를 기대했지만,
비 오는 날이 가져다준 건 오히려 더 깊은 여유와 따뜻한 사색이었다.
빨강머리 앤처럼, 인생은 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지만
그 길 끝에는 때로 가장 소중한 인연과 마주치기도 한다.
양양의 바다와 가을비, 그리고 한 잔의 티 속에서
소설 속 앤이 그랬던 것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며 조용한 망중한의 시간을 흠뻑 누렸다.
빨강머리 앤에서 앤을 키워준 초록 지붕 집의 머릴라 커스버트(Marilla Cuthbert).
앤을 다소 엄격하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돌봐 주며, 앤의 성장과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죠.
길버트 블라이드(Gilbert Blythe)는 앤의 친구이자 나중에는 사랑이 되는 인물입니다.
어릴 적 학교에서 처음 만나 앤과 티격태격하다가, 성장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면서 깊은 인연을 쌓아가는 캐릭터죠.
양양의 바다를 따라 걷다 보면, 언뜻 마음 한켠이 캐나다 동쪽의 PEI 바다와 맞닿는 듯한 기분이 든다.
멀리 떨어진 두 바다는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그 끝없는 수평선과 파도 소리 속에서 느껴지는 고요와 설렘은 서로 닮아 있었다.
캐나다 동쪽,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어린 시절 이 섬의 자연과 마을 풍경 속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