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

선물교환과 새벽송

by 도린

어릴 쩍 나의 크리스마스이브(선물교환과 새벽송)


예배당에 모여 선물교환을 하며 톳밥난로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밤을 지새우던 크리스마스이브.

게임에서 진 사람은 늘 교회 창고에 가서 톳밥을 날라와야 했다.

톳밥가루를 난로 위에 뿌려 불똥을 불어 날리며 장난을 치던 친구들,

옷에 빵꾸가 나도, 이참에 새 옷 하나 얻어 입을 심산으로 오히려 이죽거리며 휘파람을 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빨갛게 타오르다 금세 꺼지던 톳밥향이 그윽하고 좋았다.


이성에 일찍 눈을 뜬 친구들은 슬그머니 예배당 밖으로 나가 교회 오빠야 손도 슬쩍 잡았다는 발칙하고 간지러운 뒷담은 내겐 항상 금시초문이었다.


제일 얌전하고 상냥했던 교회 언니가 뽑은 선물을 개봉했다.

짖꿎은 어떤 악동이 빨간 팬티와 브래지어를 넣어뒀단다, ㅎㅎ

얼굴이 선물 보다 더 빨개진 언니는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선물교환 할 때 가장 흔하고 인기 있었던 건 바로 빨간 사과 모양의 양초였다.

얼마나 예쁘고 반짝이던지 나도 꼭 받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받은 건 Parker 만년필이었다.

로맨틱하진 않아도 실속 있고 반듯해 보여 마음에 들었다.


눈이 꺼불 꺼불 내려앉을 무렵 새벽송 조편성이 시작되었다.

나는 거의 늘 '특수구역'에 배정받았다. 작은 산도 넘고 내도 건너야 닿는 읍내에서 제법 떨어진 시골마을. 그래서 대부분 꺼려했지만, 나는 그 길을 참 좋아했다.

거리가 멀고 길이 거친 만큼 푸짐한 인심이 좋았고, 차갑고 알싸한 새벽공기가 빚어낸 시골 풍경의 실루엣을 나는 사랑했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내려앉은 서리가 반짝이는 것도, 살얼음에 덮인 풀섶을 밟는 사각거리는 소리도 좋았다.

나는 집사님 권사님 틈에서 귀염 받던 아이였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적막을 뚫고 초연된 크리스마스 송이 공기를 가르는 처연함이 아직도 가슴에 울려온다.

가가호호 교인집을 돌다 보면 뜨끈한 구들목을 내어 주시고 호박죽, 묵사발, 콩국을 차려 주시며 초코파이, 맛동산 같은 과자도 싸주셨다.


새벽송을 마친 뒤 곧장 집으로 흩어지는 법은 없었다. 교회 교육관에 다시 모여 새벽송 돌 때 받아온 쿠키, 사탕, 과일을 푸짐하게 펼쳐놓고 또다시 파티가 펼쳐진다.

밤을 새운 얼굴로 서로 기대어 웃던 시간이 어찌나 충만하고 달콤했는지.


그렇게 고양이 세수만 하고 성탄예배에 끼어 앉아

말씀과 찬양이 흐르는 내내 꾸벅꾸벅 졸곤 했다.




밴쿠버에서의 크리스마스이브 (선물교환)


밴쿠버 이민교회를 섬기던 시절엔 한국에서 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선물교환을 했다.
각자가 번호표를 하나씩 받고, 번호가 불릴 때마다
예배당 중앙에 한가득 쌓아둔 선물 중 하나를 골라 개봉한다.
그리고 다음 번호에 당첨된 사람은 아직 풀리지 않은 새 선물을 고를 수도 있었지만,
이미 누군가가 개봉한 선물 중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그걸 ‘뺏어 올’ 수도 있었다.

이 단순한 규칙 하나로 예배당은 늘 난리가 났다.
누군가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들고 있으면 많은 눈빛이 슬금슬금 그쪽으로 향한다.
“아이고, 저거 또 뺏기겠다…” 하는 체념과,
“지금이 기회다!” 하고 덤비는 용기(?)가 뒤섞이며 성탄 전야의 밤은 늘 웃음으로 가득했다.

초콜릿, 목도리, 벙어리장갑, 프라이팬, 글라스락, 쌀…

랜덤으로 뽑힌 번호에 따라 다양한 선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아주 특별한 선물이 개봉되었다.

청동으로 만든 네 개의 천사 조각상 세트.
하프를 켜는 천사,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천사,
만다린을 치고 플루트를 불고 있는 작은 천사들.

섬세하고 단아한 조각상에 여자 교인들의 눈빛이 일제히 반짝였다.
거실이나 다이닝 룸 어디에 둬도 집안 분위기가 훨씬 따뜻하게 살아날 것 같은, 그야말로 ‘올해의 최고 인기 선물’이었다.

선물 번호가 불릴 때마다 교인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 천사들에게로 향했다. 뺏고 뺏기며 누구의 품으로 들어갈지가 그날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리고 맨 마지막 번호가 불리는 순간—
그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나는 모두의 부러움을 받으며 당당하게 천사 조각상을 거머쥐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 사람 모이는 곳이라 했던가! 대부분의 성숙이 (성숙한 크리스천) 들은
사모님이 수고도 많이 하시고 고생을 하시니 하나님이 위로하신 거야”라고 했지만,
어떤 미숙이(미성숙한 크리스천)들은
“사모가 젤 좋은 선물을 욕심낸 거 아니야? 교인에게 양보했어야지.”하며 뒤에서 수군거리기도 했다지.

사실, 나는 그 천사 조각상이 꼭 갖고 싶어서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여자 교인들이 다들 탐내니
재미 삼아 가져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고,
무엇보다—
늘 묵묵히 교회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야무지고 마음씨 고운 집사님께 몰래 드리고 싶었다.

정갈하게 꾸며진 그분의 집에 네 개의 천사 조각상이 놓이면 얼마나 잘 어울릴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뿌듯했다.

나는 이런저런 잡음에 더는 마음 쓰지 않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천사들이 집사님 거실에 자리 잡았을 때, 그 모습이 그렇게나 자연스럽고 딱 맞아 보였으니—
정말 ‘주인을 제대로 찾아간’ 선물이었다.





소시 쩍 한국에서의 크리스마스에 관한 추억은 언제나 동화 속 이야기처럼 해피앤딩이었지만, 이민목회를 하며 목사의 아내로 맞는 크리스마스는 대부분의 경우 무사히 치러내야 하는 행사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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