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 센 '젊은 노인'이 되지 않으려면

늙는다는 건, 멈추는 데서 시작된다

by 에우름

안젤름 그륀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머무는 순간, 낡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방금 전 그곳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세요, 당신.”
“낡은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들지요.”


또 다른 문장도 떠오른다. 시인 김선우는 이렇게 썼다.
“웃옷을 걸치고 언제든 들고 떠날 수 있는 배낭을 메요. 마녀처럼, 빗자루를 타고 떠나요. 빈 그릇을 개수대에 담그다가, 속옷가지를 세탁기에 넣다 가도, 떠나세요. 불현듯.”


우리는 어디에서 떠나야 하는 걸까. 또 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오랜만에 만난 조카가 말했다. “나이가 들면 고집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서른아홉의 조카가 말한 ‘나이가 든 사람’은 아마 노인을 의미했을 것이다. 자신은 아직 젊다는 전제 아래, 고맙게도 나를 노인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내 앞에서 다른 어른들을 뒷담화하듯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이가 든다’는 것도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 역시 스무 살의 대학 시절과 비교하면 이미 나이가 들지 않았는가. 거침없고 당당했던 청춘은 이제 마흔을 앞두고 두 아이의 아빠로서 가장의 무게를 이야기하고, 언뜻언뜻 새치도 보인다.


나는 조카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그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노인’을 규정했지만, 나는 사고의 개념 안에서 ‘노인’을 말하고 싶다. 아무리 젊은 신체를 가졌더라도 익숙한 자리에서 더 이상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다면, 이미 ‘노인’이 된 것이다. 서른에도 고집 센 젊은 노인이 될 수 있다. 변화와 성장을 거부한 채 사고를 닫아 둔다면 일흔에는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노인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이미 굳어져 버린 나의 작은 프레임, 가장 익숙하고 안전하다고 믿어 온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혼란스럽고 불안하더라도 용기를 내어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상은 결코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새로운 세계와의 충돌과 융합 속에서 자라나는 ‘나’ 또한 만날 수 없다.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 ‘편안함’은 곧 권태로 바뀌고, 삶은 점점 지지부진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확신에 갇힌 고집 센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쉽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생각 대신, 나는 짧게 말했다. “그래서 배워야 해. 멋지고 품위 있게 나이 들기 위해. 젊은 너도, 늙은 나도.” 아마 조카는 ‘이모는 아직도 공부야?’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규정짓는 한계를 인식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각자의 삶을 돌아보며 혹시 내가 단단한 프레임 속에 갇혀 있는 건 아닌지 되짚어 봐야 한다. 나는 멈추지 않는 마음과 낯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로, 스스로를 가두는 그 프레임과 경계를 넘기 위해 계속 배워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