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걷는다

'선택'이라는 귀한 선물

by 에우름

그런 사람이 있다.


김수원 (2022 시민 공모작)


세상이 말리는 길을 굳이 떠나는 사람이 있다
눈이 폭포처럼 내리는 광야를 홀로 가는 사람이 있다
별 하나 없는 밤, 폭설이 지운 길을
맨손으로 헤치며 어둠을 걷어내는 사람이 있다
그 길 끝,
절벽 같은 밤을 딛고 아침을 깨우는 사람이 있다




짧은 시, 긴 생각 —


신촌역 지하철 유리문에 붙은 짧은 시 한 편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시민 공모작’이라는 표기 아래 이름만 적힌 작가.
어쩌면 이름도 낯선 이 시민 시인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나와 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의 첫 문장, ‘세상이 말리는 길’.

그 한 구절이 내게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빠르고 넓고, 확실한 길만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스마트하고 인내심도 강하며 ‘세상의 성공’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
자기 확신에 찬 이들은 사랑과 관심에 비례해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네며

사랑하는 이들을 자신의 기준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내가 너무 사랑해서 걱정해 주는데 왜 받아들이지 않아?’
그렇게 소리내어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 말엔 그런 뜻이 담겨 있다.


듣는 이는 ‘사랑’이 전면에 내세워진 그 조언에
"아니요"라고 말하기가 미안해져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결정을 바꾸지 않겠다는 답을 들은

‘사랑하는 조언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니 팔뚝 굵다.”



이러한 말속에 담긴 그들의 태도는 진정 누구를 위한 걱정일까.
혹시 자신의 기준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생긴 불쾌감이 아닐까.
시가 말하는 ‘세상’의 겉모습은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랑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사랑’을 가장한 아집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의심 많은 나에게는 그렇다.


내 삶의 주어를 타인에게 넘기는 순간, 나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세상의 기준은 참고일 뿐, 삶은 ‘선택’이라는 귀한 선물을 스스로 감당해 가는 일이다.


귀스타브 도레 Gustave Doré,

거친 광야를 맨손으로 헤치며 나아가는 사람도
온실이 따뜻하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따뜻함 속에서
조금씩 고사되고 있는 자신을 느꼈기에
눈보라 부는 바깥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혹은 아직 목적지를 정하지 못해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더디더라도,

희미한 별빛을 길잡이 삼아

눈보라를 뚫고 걸어간다.


가끔은 지쳐 눈밭에 드러눕고 싶고

얼굴을 휘갈기는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싶어질 것이다.

세상이 내밀었던 ‘따뜻한 호의’를

거절한 자신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한 발 한 발, 걸어간다.


내 걸음을 세기도 버거울 때, 어둠 속에서 공기가 바뀐다.
잦아든 눈보라, 어슴푸레한 지평선.

그 끝에, 크게 숨 쉴 수 있는 나무들이 보인다.

아침이 온 것이다.



절벽 같은 밤을 건너 아침을 맞아본 사람은 안다.

모든 이가 광야를 걸을 필요도 없고

온실만이 정답도 아니라는 것을.
삶의 결대로 자신의 자리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광야를 건너온 그는

이제 거친 길을 떠나는 누군가에게
온전히 자신만의

'따뜻한 세상'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짧은 시 한 편에서

한동안 생각의 흐름을 따라 걸었다.
김수원 시민 시인은 어떤 마음으로 이 시를 썼을까.
그가 걸었던 광야는, 지금 어디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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