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뜨거운 여름, 한국에 나왔던 나는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의 고암 이응노 미술관을 찾았다. 그는 시대의 전환을 겪으며 전주에서 일본으로, 다시 프랑스로 삶의 자리를 옮겨갔다. 수묵화에서 콜라주, 추상화로 이어지는 그의 화풍 또한 끊임없이 변화했다. 프랑스에 머무르던 시절, 돈이 없어 잡지를 뜯어 작품을 만들었고 그것이 그의 콜라주의 시작이 되었다.
그 여름, 갑작스레 무너진 몸 앞에서 불안했고 의지조차 작동하지 않는 멈춘 시간 속에서 길을 잃었다. 불규칙했던 나의 삶의 궤적은 제자리를 지키며 결과를 쌓아가는 옛 동료들 앞에서 위축되었고, 내 인생은 구멍 난 그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내 삶은 10년마다 토막이 나 있었다. 결혼과 함께 공부를 멈추었고, 엄마가 되었으며,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안정되던 자리에서 벗어나 또 낯선 나라로 떠났다. 그 선택들은 막아선 어려움 앞에서의 회피였을까. 한 자리에 머물렀다면 나도 화려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그날도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휘저어도 잡히지 않는 허망함에 짓눌린 시간을 어찌하지 못해 땀을 흘리며 평창동 고개를 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응노 화백을 만났다.
한국과 일본, 프랑스라는 서로 다른 공간 속에서 화백 또한 주어진 조건에 맞서며 자신만의 그림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의 변화는 나의 삶과 달리 단절이 아니라 끊임없는 순환처럼 보였다.
“10년마다 변신하는 것이 나의 작품의 특징이다.”
이 단순한 선언은 어려움 속에서도 변화를 선택해 온 그의 태도를 말하고 있었다. 그의 당당함이 침잠해 있던 나의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일관성만이 삶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은 아닐 것이다. 멈춤과 흔들림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애쓴 시간들, 그것 역시 하나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 선택을 한 나 자신에 대한 믿음도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독립적인 두 딸이 있고 낯선 환경에서도 부딪치며 얻은 경험이 있다. 잡지를 뜯어 대작의 콜라주를 만든 이응노 화백처럼, 조각난 시간들과 여러 모양의 경험으로 엮인 나의 삶은 하나의 콜라주였다. 결핍과 흔들림 속에서도 이어온 나의 선과 색, 그것이 나의 고유한 작품이었다.
어제는 수덕사에 갔다. 이응노 화백의 부인이 운영했다던 수덕여관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생가에 들렀다. 먼 산들이 보이고 누런 잔디 위에는 띄엄띄엄 벤치가 놓여 있었다. 소박한 생가 옆에서는 주엽나무가 버텨주고 있었고 그 한편에 노출 콘크리트로 지어진 이응노 화백의 전시관이 있었다. 그 안에는 시기별 작품들이 나뉘어 전시되어 있었다. 서울로, 대전으로 찾아가며 보아온 화백의 그림이 하나의 원으로 묶이는 듯했다.
이응노 화백을 경유해 나의 토막 난 역사는 나만의 콜라주로 엮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