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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니의 글적글적 May 13. 2023

에코백과, 다시 돌아오는 중

마흔 살 힐링담론 : 권태

   




  “에코백이요. 주황색 글자가 새겨진 천 가방인데요. 거기 투명 파일 안에 작품... 아니 프린트물이 있어요. 하얀 수첩이랑 같이요.”

  나는 식탁에 앉아 휴대전화기를 귀에 바짝 대고 최대한 자세하고 또박 하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음, 파란색 코끼리랑 고래 그림? 우리들의 소풍요?”

  휴대전화 너머 목소리는 의외로 밝았고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들렸다.

  “네? 네! 우리들의 소풍! 맞아요. 거기 있군요.”

  

  안내원과 나만 알 듯한. 암호처럼 몇 마디를 주고받고 나니 그동안의 긴장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저, 어디로 가면 되죠?”

  “여기 oo교통 분실물센터요.”

   나는  안내원의 말을 놓칠세라 얼른 펜을 들고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확인 또 확인을 했다.






  어느 날, 글태기가 왔다. 한동안 글을 쓰고 싶지 않아 잠시 이 일을 접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은 읽히지 않았다. 가끔 인터넷 글쓰기 플랫폼만 기웃기웃했다. 짧은 글이라도 써볼까 해서 노트북 앞에 앉으면 꼭 다른 일이 생겼다. 이제 루틴 같은 거에 사로잡혀서 나를 괴롭히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기분 전환을 하려고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었다. 자연스레 외출 시간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브런치에서 글쓰기를 재촉하는 알림이 오면 마음이 흔들렸다.

  마치 시험 기간을 앞두고 불안했던 학창 시절처럼, 숙제를 안 하고 자면 찝찝했던 어린아이 때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그러다 마침  어느 문학관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유명작가 초정 인문. 예술 특강이었다.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각 분야별 유명작가 강연이 몇 달간 예정되어 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도 계셨다. 지방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분들이었다. 이번 기회에 꼭 강연에 참석하고 싶었고, 성공한 그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뭔가 정리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위로. 분위기 전환.     


  그날은, 글쓰기 수업이 있었다. 함께 수업을 듣고 있는 회원 몇 분과 함께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조퇴를 했다. 회원들이 쓴 원고와 선생님의 글쓰기 자료를 바쁘게 가방에 챙겨 넣고 나와 정신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에 오르는 순간 조급했던 마음이 평온해지는 듯했다. 택시는 시내 도로를 달려 골목골목을 지나 문학관 앞에 도착했다. 시내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조금 오래된 건물이었다. 

  




  


  처음 방문한 문학관은 낯설지만 흥분되었다.  방문자 리스트를 작성하고 강연장에 들어서니 사람들의 열기가 대단했다. 연세 지긋한 문학인들부터 아직 앳돼 보이는 작가 지망생들 혹은 팬들 혹은 취재진. 

   강연장은 이미 만석이었다. 나는 강연장 끝에 있는 어느 기둥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섰다. 함께 온 회원들은 잘 보이는 곳을 찾아 제각기 흩어졌다. 나는 자라처럼 목을 한껏 빼고 궁금했던 유명작가의 실물 한 번 보려고 애썼다.


   전쟁 전야 같은 어둡고 고요한 분위기 속. 곧바로 인사말과 함께 오픈 강연이 시작되었다. 작가님의 목소리는 생생했고 얼굴은 빛처럼 보였다 가도 금세 사라지곤 했다. 넓은 강연장, 조명, 스피커, 문학, 글쓰기, 열정, 호기심, 눈빛, 카메라, 앞사람의 머리. 그리고 시선, 묘한 사람들 냄새. 그런 것들이 두 시간 남짓 내 주위에 어룽거렸다.  

    

   강연이 끝나자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서는 사람, 좁은 통로에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 서로 인사를 나누며 하하 호호. 

  사람들이 떼 지어 다녔다. 나는 같이 간 일행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강연장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고, 허리가 아팠고, 얼른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나는 혼자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집으로 가는 길은 버스를 타기로 했다. 집은 문학관과 거리가 있기에 두 번을 환승해야 했다.      





  첫 버스가 왔다. 버스에 오르자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나는 버스 뒤로 가서 창가 쪽에 있는 빈 좌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강연장에 오래 서 있어서 그런지 피로가 몰려왔다. 종일 들고 다닌 에코백은 참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문득 강연장에서 받은 초청작가님의 작품자료가 생각이나 꺼내 보았다. 작가님이 쓰신 시는 다시 봐도 어려웠고, 나는 잘 모르겠다. 문학이 무엇인지도. 

  다섯 정거장을 지났을까 에코백과 핸드백을 동시에 팔에 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스에서 내려서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정류장이 시내 근처라 그런지 유난히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러는 순간, 문득 나의 에코백. 핸드백.

버스정류장 유리에 내 모습을 비춰 보았을 때 에코백이 없었다. 아차.

  나는 버스가 정차했던 곳으로  돌아가 이리저리 사방을 살폈다. 글쓰기 자료. 작품들. 그리고 내 수첩. 아찔한 마음.


  그러는 사이 곧이어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기 때문에 나는  에코백 찾기를 포기했다. 집으로 오는 내내 ‘그런 종이 뭉치를 누가 가지고 가겠어’ 혹은 ‘ 누군가의 이야기, 애써 모은 자료들이 사라진다면 ’ 

  없어진 에코백은 여러 생각이 되어 머릿속에서 덜컹거렸다. 

  돌아올 것 같지 않은, 돌아올 것 같은 흰 종이 속 이야기들.          

  에코백은 버스에서 놓친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분실물 찾는 방법을 검색했다. 어느새 차창 밖엔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마음을 졸이며 날이 밝기만을 기다린 다음 날 아침,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첫 번째로 탔었던 버스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 안내원은 오히려 나의 전화를 기다린 듯 반색하며 에코백의 생김새와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내원의 입에서 ‘파란색 코끼리, 우리들의 소풍’이라는 내 수첩의 그림과 작품 속 제목이 나왔을 때, 나는 뭔가 찌릿하면서도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간 소원해진 내 쓰기 패턴에 대한 미안함. 잠시 잊은 당신의 세계가 여기 있다고 하는 것만 같은. 

  뜻대로 되지 않아 놓고 싶었던 것. 그러나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내게 소중한 것.

  나는 내일 에코백을 찾으러 간다. 

  그것이 그대로 있어 줘서 감사하며, 나도 이렇게 다시 돌아오는 중임을 느끼며.






사진© pundalex,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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