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맛 알지? 맛있는 음식 이야기: 초콜릿
2월의 어느 날, 둘째 아이가 집에 돌아오면서 손에 작은 쇼핑백을 들고 왔다.
“엄마, 이거…”
아이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쇼핑백을 가리켰다. 앙증맞은 크기의 베이지색 쇼핑백 안에는 핑크색 상자가 담겨 있었다. 옅은 미소를 띤 아이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움이 배였다. 아이는 작은 손을 움직여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핑크빛 상자 안에는 알밤처럼 생긴 6개의 초콜릿이 투명 봉투 속에 정성스럽게 포장되어 있었다. ‘맛있게 먹고 후기 남겨 줘! 화이트데이도 기대할게.’라는 짧은 메모와 함께.
“발렌타인데이라서 여자친구한테 선물 받았구나?”
나는 아이의 상기된 얼굴을 보고, 그 초콜릿이 단순한 친구가 주는 선물이 아니라는 걸 짐작했다.
초콜릿은 열두 살 아들의 첫사랑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아니 첫 이성 교제라고 해야 할까. 아이는 그 친구와 사귄 지 80일 정도가 되었다고 했다. 같은 반 친구인데, 여자애가 며칠 동안 계속 사귀자며 쪽지를 보내왔단다. 몇 번 거절했지만, 그 친구가 계속 살갑게 챙겨주며 다가온게 좋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결국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의 카톡 프로필에는 하트와 함께 D+가 생기고, 목도리며 장갑을 챙기는 등 옷차림에도 부쩍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요즘 아이들의 이성 교제 시기가 빠르다는 걸 알고 있었고, 반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사귀는 게 유행처럼 흔한 일이라는 것도 들었지만, 평소 소극적이기만 하던 우리 아이에게 그런일이 생겼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학창 시절 이성 교제는 일탈이라고 생각하며 자란 나에게는 더더욱.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세대별 연애관의 변화가 자연스럽고 귀엽기도 했다. 그래서 궁금한 마음에 아이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ㅇㅇ아, 초컬릿은 어디서 받은 거야? 학원? 아파트 광장? 동그란 초콜릿은 직접 만든 것 같은데…. 그 친구가 무슨 말하면서 줬어?”
엄마의 질문이 쏟아지자 둘째는 더 부끄러워하며, 초콜릿만 쳐다보았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마냥 아기 같은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컸나 싶은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달콤했던 발렌타인데이가 지나고 며칠 후,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얼굴을 구기며 현관문을 들어섰다.
“엄마, 나 충격이야!”
오늘은 어떤 에피소드를 꺼내려고 하는지 궁금해하며 나는 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그냥 귀엽기도 하고, 별로 신경 안 썼는데… 요즘 급식실이나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자꾸 ‘화이트데이 기대해!’ 이러고. 아, 진짜. 부끄럽게, 귀찮아!”
아이는 누구라고 딱 꼬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누구인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고, 심각한 얼굴을 한 아이를 보니 어쩐지 조금은 우습기도 했다.
“그랬구나, 네 성격에 많이 당황스러웠겠다. 사랑이란 게 말이야. 사람마다 달라서 표현방법이 다를수 있거든. 처음엔 설렘으로 가득해서 모든 게 좋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고 기대가 늘면 오히려 부담되기도 해 그러면서 뭐… 귀찮아 질수도 있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해?”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방법이야. 사랑은 말로 표현해야 해. 네 마음을 정확히 말해주는 게 가장 중요하거든.”
“그럼 내가 지금은 그냥 ‘좀 귀찮다’고 말할까?”
“그건 직설적이지 않을까? 귀찮다는 표현은 상처받을 것 같은데.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하면, 그 친구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아이와 나는 한동안 첫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초콜릿 한 조각에 담긴 마음과, 여러 가지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이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지. 엄마로서 아이가 그런 과정을 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초콜릿이 가진 달콤함뿐 아니라 쌉싸름함 맛까지, 저마다의 개성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사랑임을 아이가 알아 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