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모차르트 ‘클라리넷협주곡’
클래식이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이는 것은 빈번하지만, 이 음악만큼 원래부터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듯한 느낌을 주는 곡은 드물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는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의 2악장이 흐른다. 이름만으로도 영화가 되는 두 배우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출연했던 영화에서 주인공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 분)는 아프리카 케냐까지 축음기를 들고 와서 모차르트를 듣는다. 아직 아프리카를 가보진 못했지만 이 영화 덕에 죽기 전에 꼭 아프리카에 가서 석양이 풀어지는 시간에 모차르트를 들어보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됐다. 영화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은 모든 이야기를 대신해준다. 대사 없이 인물들의 눈빛과 음악만으로도 영화의 내용이 대충 가늠이 된다. 모차르트는 1756년에 태어나서 1791년까지 활동했던 오스트리아 작곡가지만, 200년 후 1985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멜로디를 작곡했다. 마치 원래부터 영화를 염두에 두고 작곡을 한 것처럼 말이다. 그의 음악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우린 소유할 수 없어요,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뿐
< 아웃 오브 아프리카 책>
이 영화는 실제 주인공인 카렌 브릭센이 원작 소설을 썼고 이후 시드니 폴락 감독에 의해 영화로 구성되었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라 그런지 더욱 진정성이 느껴진다.
덴마크에 사는 카렌(메릴 스트립 분)은 부유한 독신녀인데 그녀는 그저 친구로 지내던 브릭센 남작과 결혼을 약속한다. 약혼자를 따라 아프리카로 온 카렌은 케냐에서 커피 재배 사업을 하던 브릭센과 결혼식을 올린 후 커피 재배를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고, 그 후 그는 1차 세계전쟁에 참전해 버린다. 외롭게 혼자 남은 카렌은 어느 날 초원에 나갔다가 사자의 공격을 받게 되고 데니스에게 도움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지고, 카렌은 데니스에게서 묘한 끌림을 느낀다. 브릭센과는 달리 왠지 마음이 가고 진한 사랑이 느껴진다. 결국 이기적이고 외도마저 심한 남편을 견디지 못한 카렌은 이혼을 하고, 사랑하는 데니스에게 결혼하자고 한다. 하지만 데니스는 어떤 제도나 규약에 매여 살기엔 너무도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데니스에 대한 카렌의 사랑이 커져가던 어느 날, 커피 농장에 큰 불이 나고 잿더미로 변해버린 농장을 보며 카렌은 많은 것을 정리한다. 사람도 사물도 그 어떤 것도 소유가 아닌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임을 깨닫게 해 준 데니스의 뜻을 받아들이고, 카렌은 그 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마지막 배웅을 해주겠다고 약속한 데니스를 기다렸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비행기 추락으로 데니스가 죽었다는 소식뿐이다. 이루어 질 수 없었던 그 둘의 사랑은 이렇게 가슴 아픈 결말로 쓸쓸히 막을 내리고 카렌은 마음속의 추억만 남긴 채 케냐를 떠난다.
영화를 처음 봤던 때 나는 사랑이 뭔지 전혀 알지 못했던 아이였지만 이제는 영화에서 전하려 하는 메시지가 확실히 느껴진다. 진정 사랑한다면 상대를 소유 하는 대신 인정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뭐든지 흘러가게 자연스럽게 놔둬야 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말이다.
함께 비행하는 두 사람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배경음악인 클라리넷 협주곡이 평온하게만 들렸을 텐데 비극으로 끝나니 왠지 아련하게 느껴진다. 아직도 데니스가 카렌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과 둘이 함께 경비행기를 타고 케냐의 나쿠루 호수 위를 비행하던 장면에 흐르던 협주곡 2악장 아다지오 선율을 잊을 수가 없다. 카렌이 앞자리에서 손을 내밀고 데니스가 뒷자리에서 손을 잡아주는 그 장면을 볼 때만 해도 두 사람의 사랑이 해피 엔딩이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둘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이 영화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차르트 음악은 평온한 선율이지만 그 안에 슬픔이 숨어 있다. 겉으로 보기에 밝고 명랑한 모차르트였지만, 어찌 천재 음악가라고 슬픔이 없었겠는가... 그는 언제나 슬픔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프랑스의 유명 클라리넷 연주자 미셸 포르탈은 이 협주곡 2악장에서 모차르트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하면 음악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철저하게 고독을 전달하는 것이 이 곡을 연주하는 자의 사명이다.
영화에서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이별을 할 수 밖에 없는 주인공들이 더 슬퍼지는 이유다. 이 장면에 모차르트 음악이 아닌 낭만 넘치는 로맨틱 선율이나 과도하게 우울한 선율이 흘렀다면 영화의 감동은 줄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카렌에게 모차르트의 협주곡은 언제까지나 데니스를 기억하게 하는 비가(Elegy)일 테니.
가장 고통스러웠을 마지막 순간에도 희망을 노래했던 음악천사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친했던 클라리넷 연주자 안톤 시타들러 Anton Stadler(1753~1812)를 위하여 <클라리넷 5중주곡 A장조, K.581>와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두 명곡을 작곡했다. 모차르트가 클라리넷을 위해 작곡한 곡은 이 두 곡이 전부다. 전 악장 모두 매력 있고 좋지만 특히 영화에 흘렀던 2악장이 친근하다.
클라리넷(Clarinet)은 플루트(Flute)에 비해 일반인들에게 대중적인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음색 면에서는 플루트 못지않게 매력적인 악기다. 외관상으로 얼핏 보면 금관악기 같지만 클라리넷은 따뜻한 음색을 가진 전형적인 나무악기의 특징을 갖고 있다. 작곡자들은 좋은 곡을 작곡하기 위해서는 표현할 악기의 특질을 잘 간파해야 한다. 같은 멜로디라도 어떤 악기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듣는 이의 감동은 매우 달라지기 때문이다. 같은 노래도 가수의 음색에 따라 전해지는 감동이 천차만별인 것과 같은 원리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모차르트는 당시엔 새로운 목관악기였던 클라리넷에 대해 무척 잘 알고 있는 작곡자였다. 오케스트라에서 조율을 할 때 기준이 되는 약간 날카롭고 예민한 음색의 오보에(Oboe)에 비하면 클라리넷은 저, 중, 고 각 음역대마다 음색이 다채롭게 변하는 팔색조 같은 악기다. 모차르트는 당시엔 많이 연주되지 않았던 목관악기 클라리넷에 또 하나의 명곡을 선물해 준 셈이다.
모차르트의 유일한 클라리넷 협주곡인 이 곡은 1791년(35세) 모차르트가 죽기 두 달 전에 완성되었다. 자신의 죽음을 얼마 앞둔 시점에서도 음악 천사 모차르트는 삶에 대한 실망과 원망의 선율이 아닌 인간에게 희망과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음악으로 선물해 줬다. 그의 나이 35살, 슬슬 모차르트의 인생이 저물어 가는 시점이다.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들고 건강도 안 좋아졌지만 그는 끝까지 음악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추천음반>
Mozart: Clarinet Concerto in A Major, K. 622 - II. Adagio
Alfred Prinz · Wiener Philharmoniker · Karl Böh
℗ 1974 Deutsche Grammophon
영화와 함께 다시 한 번 음악을 감상하고 싶다면 알프레드 프린츠의 클라리넷 연주에 칼 뵘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니 음반을 추천한다. 1974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된 음반인데 정통 빈 필의 풍요로우면서도 세련된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프린츠의 클라리넷은 과도하지 않고 담백한 모차르트의 정조를 한껏 느끼게 해준다.
영화 속 비행 장면
잭 브라이머의 클라리넷 연주와 아카데미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의 연주도 추천한다. 네빌 마리너가 지휘했던 음반으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으로 쓰였다. 호젓하게 흐르는 목관악기 클라리넷의 매력을 한없이 발산하는 연주다.
다나 위너
모차르트 선율에 가사를 입혀 다나 위너의 목소리로 들어보는 음반도 추천한다. <Stay with Me Till the Morning> 아침이 올 때까지 나와 같이 있어달라는 가사가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