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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니스트조현영 Mar 27. 2022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연주

영화 ‘피아니스트’와 쇼팽 녹턴 유작


영화 '피아니스트'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두 손을 모두 주머니에 꽂은 채 냉소적인 말투로 독일군 장교가 묻는다. 

“깡통을 따고 있었습니다...”

엄청 놀란 남자 주인공 스필만(애드리언 브로디 분)은 다 죽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몰래 혼자 숨어 있던 유대인 스필만은 배가 고파 피클 깡통을 따려다가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토마스 크레취만 분)에게 발각된다. 

“직업이 뭐지, 뭘 하는 사람이죠?”

“저는, 저는 … 피아니스트입니다”


피아니스트라고 신분을 밝히자 장교는 고갯짓을 하더니 먼지 쌓인 낡은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그를 부른다. 그러고는 진짜 피아니스트라면 피아노 연주를 해보라고 명령한다. 그는 온몸이 저리는 그 상황에서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면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의 첫 음을 무겁게 누른다. 그의 손가락은 추운 겨울 날씨와 전쟁으로 굳어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생애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쇼팽 연주를 차분하게 끝맺는다. 장교는 의자에 앉아 집중해서 음악을 끝까지 듣는다. 쇼팽 발라드 연주 이후 스필만이 숨어있던 그 건물은 독일군의 사무실이 되었고 오히려 스필만의 신변은 더 안전해졌다. 그가 다락방에 있다는 사실은 독일군 장교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었다. 장교는 스필만에게 몰래 식량을 가져다주며 그의 목숨을 유지시켜 준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독일군이 바르샤바에서 철수하게 되자 마지막으로 장교가 스필만에게 묻는다. 

“전쟁이 끝나면 뭘 할 거지”

“다시 국영방송 무대에 서서 연주를 할 겁니다.”

“당신 이름은 어떻게 되지?”

“제 이름은.... 스필만(Szpilman)...”

“피아니스트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

스필만의 이름은 독일어로 Spielman으로 쓸 수 있는데, ‘연주하다’라는 뜻을 가진 ‘Spielen’에 명사 Man를 붙였으니 ‘연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호젠펠트의 말처럼 피아니스트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이 있을까? 자기가 입고 있던 외투까지 벗어주며 쿨하게 뒤돌아서는 독일 장교의 뒷모습이 굉장히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전쟁 후에 두 사람은 피아니스트와 청중으로 다시 만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피아니스트>다. 제목부터 피아니스트라면 꼭 봐야 할 영화 같다. 같은 제목의 영화가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영화가 바로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1911~2000, 폴란드)의 생존 수기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한 유태인 예술가로서의 삶을 다룬 내용인데, 이 영화 역시 이유 없이 죽어간 많은 유태인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은 71살까지 살았으니 무척 오래 살았다. 반면 자신을 살려준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는 연합군에게 생포돼 1952년 포로수용소에서 죽었다. 자신이 피아니스트임을 알고 연주를 해보라며 쇼팽 음악의 아름다움과 피아니스트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던 사람인데 오히려 그가 더 일찍 죽었다. 전쟁이 끝나고 스필만은 그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한참 연주 활동 중이던 피아니스트가 전쟁이 나면서 모든 활동이 중단되고, 심지어는 독일군의 눈을 피해 다락방에 갇혀 지내다가 발각이 된다. 자기 신분이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던 그 급박한 상황에서 주인공은 인생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그 순간에 <쇼팽 발라드 1번>을 연주한다. 스필만도, 이 영화를 만든 로만 폴란스키 감독도 그리고 영화 속에서 가장 멋진 장면에 연주됐던 쇼팽도 전부 폴란드 사람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한 조화를 이뤘던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쇼팽과 피아노라는 오브제는 영화의 감동을 한층 더했다. 


영화 주인공만큼 감동적이었던 쇼팽 발라드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피아노 작품을 남겼다. 고전파 시대의 주요 장르였던 소나타에서 탈피하여 보다 새롭고 도전적인 작품을 많이 창작하였는데, 특히 피아노 부문에서의 쇼팽은 혁명가였다. 그는 낭만파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인 개인의 자유로운 감정 표현을 위해 녹턴(야상곡)이나 폴란드 무곡인 마주르카, 왈츠 등의 작품과 함께 발라드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이 모든 장르는 이전 고전파 시대에는 거의 없던 작품들이었는데, 특히 발라드는 문학과 가장 근접해 있는 음악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쇼팽은 발라드를 총 4곡 작곡했는데, 그중 발라드 1번이 대중적인 인기가 가장 높다. 


쇼팽


발라드는 자유로운 형식의 서사적인 음악, 쉽게 말해서 이야기가 흐르는 음악이다. 슈베르트의 주요 장르였던 리트(Lied, 가곡)가 서정적인 시의 느낌이라면, 발라드는 규모면에서나 감정면에서 훨씬 크고 무거운 분위기다. 쇼팽 이후에는 브람스 등을 통해 더욱 발전하게 되고, 이 음악들은 어떤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가요에서만 ‘발라드’가 있는 게 아니라 클래식에도 이미 그런 장르가 있었다. 아마 아름다운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를 중심으로 작곡된 곡이 발라드인걸 보면 클래식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쇼팽의 <발라드 1번 사단조 Op. 23>는 폴란드를 대표하는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서사시 ‘콘라드 발렌로드’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된 곡이다. 서사시란 민족이나 국가가 새로 만들어지고 흥성해 발전되던 시기에 그 위대하고 웅대한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신(神)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하여 읊은 시를 말한다. 일찍이 폴란드는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러시아와 유럽 강대국의 잦은 침입을 받았다. 그런 불행했던 폴란드의 역사를 문학적인 글로 풀어내며 국민의 정서를 안정시켰던 작가가 바로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Bernard Mickiewicz 1798 ~ 1855 폴란드)다. 그는 동유럽을 대표하는 폴란드 최고의 시인이었다. ‘Pan Tadeusz (판 테데우시)’ 같은 대서사시가 그의 대표작이다. 폴란드 국민들에게 민족 시인으로 칭송되던 그는 러시아의 압박과 강제 점령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과 그리스도 부활의 희망을 품으며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프레데리크 쇼팽 (Frederic Chopin, 1810~1849 폴란드)은 낭만주의 음악의 가장 구심점 역할을 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이다. 그는 20세의 어린 나이에 조국 폴란드를 떠났다. 자신의 음악적 성취를 위해 당시 예술의 메카인 프랑스 파리로 떠났지만 평생 그의 마음 한구석엔 조국을 향한 그리움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그에게 미츠키에비치의 서사시는 다른 누구보다도 강렬한 영감을 줬을 것이다.

발라드 1번은 처음 시작부터 장중하게 시작한다. 로베르트 슈만은 이 곡에 대해 ‘쇼팽의 가장 거칠고 가장 독창적인 작품으로 그의 천재성을 잘 드러낸 곡’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건반의 저 아래 끝 저음부에서부터 양손이 같은 음을 연주하는 유니즌(Unison, 병행 연주)으로 시작되며 라르고(Largo, 아주 천천히)와 페잔테(Pesante, 장엄하게)라는 나타냄 말 표시대로 연주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자 지금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테니 잘 들어보시오’라고 선전포고를 하는 것 같다. 그 서주가 지나면 박자도 바뀌고 빠르기도 달라진다. 곡이 진행되는 내내 빈번하게 박자와 빠르기가 변하면서 변화무쌍한 음악적 표현이 나타난다. 중간 부분에는 마치 격랑 뒤의 잔잔한 바다 물결처럼 아름다운 멜로디도 흐른다. 이처럼 다양한 음악적 변화가 쇼팽 음악의 큰 특징인데, 여기서 꼭 언급해야 할 쇼팽의 또 다른 음악적 특징이 있다. 바로 ‘루바토’다.


'템포 루바토(Tempo Rubato)'라고도 하는 이 용어는 쇼팽의 작품을 연주할 땐 무척 신경 쓰며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다. 루바토란 '도둑맞다', '잃어버리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다. 쇼팽은 획일적인 템포(빠르기)가 아닌 자유롭게 느렸다 빨라졌다 하며 감정을 표현하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템포가 변해도 일정한 박자 안에서여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자유롭되 절제해야 한다. 혼자만의 감정에 취해 음악을 흐트러뜨리지 말고 아주 노련한 연주를 하는 것, 마냥 느리지도 마냥 빠르지도 않게, 부분을 즐기되 전체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연주가 진정한 쇼팽이다.
 
 시간에 쫓기듯 불안한 마음이 들 땐 명상을 하는 기분으로 이 음악을 들어보시라. 조용히 혼자 듣고 있으면 더없이 좋다. 특히 폴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며,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피아니스트(애드리언 브로디 분)와도 좀 닮은 듯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자유롭되 절제된 연주를 추천한다. 


루바토는 음악뿐만 아니라 인생에도 필요하다.


<추천 음반>    

https://youtu.be/mxx_WcjV5U8

연주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크리스티안 지메르만(Krystian Zimerman)/1987/DG

Chopin: Ballade No. 1 in G Minor, Op. 23

->현존하는 쇼팽 전문가를 단 한 사람만 고르라고 한다면 서슴지 않고 선택할 연주자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다. 1956년 생으로 폴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이며 197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제1위의 쾌거를 맛본 연주자다. 2003년 6월 예술의 전당에서 첫 내한 공연을 했는데 피아노 몸체와 조율용 건반을 직접 공수해서 연주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까다로운 성격이지만 그의 연주를 듣고 나면 모든 게 용서가 된다. 연주자는 연주로 보여주는 것이니까. 아마도 그는 쇼팽의 현존이 아닐까?    


https://youtu.be/LKfEBXkCMJY

연주 조성진 


폴란드에 지메르만이 있다면 한국에는 조성진이 있다. 지메르만은 “앞으로도 조성진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널리 기억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매해 발전을 거듭할 겁니다.”라고 찬사를 거듭했다. 조성진은 우리나라에 쇼팽 물결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2015년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1위의 영광을 안았다. Chopin의 영어 표기가 조성진의 성 ‘Cho’와 같다고 사람들은 그를 ‘조팽’이라는 귀여운 별칭으로 부른다. 조성진이 연주하는 발라드 앨범은 지금 우리에게 필청 음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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