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 밀라노, 로마, 피렌체, 제노바, 나폴리 등
이탈리아는 정치적으로는 통일된 국가이지만, 사회와 정체성의 차원에서는 끝내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한 나라다. 1860년대 리소르지멘토를 통해 하나의 왕국으로 묶였지만, 그 이전까지 이탈리아 반도는 수백 년 동안 서로 다른 도시국가와 공국, 왕국들의 집합이었다. 통일은 분명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그것이 곧바로 하나의 국민 정체성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지역에서 통일은 자연스러운 결합이라기보다 북부 피에몬테, 즉 사르데냐 왕국이 외교와 군사, 산업의 우위를 바탕으로 반도를 재편한 과정에 가까웠다. 실제로 새 국가의 중심은 토리노에서 피렌체를 거쳐 로마로 옮겨갔고, 이 수도 이동 과정 자체가 이탈리아의 중심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얼마나 쉽게 정리되지 않았는지를 보여준다.
이탈리아어에는 캄파닐리스모(Campanilismo)라는 말이 있다. 흔히 '내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는 곳까지가 내 나라'라는 뜻으로 이해되는 이 말은, 이탈리아인들의 지역 정체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밀라노, 토리노, 피렌체, 나폴리, 로마, 볼로냐, 베네치아, 시에나, 피사는 오늘날 한 국가 안에 속해 있지만, 오랫동안 각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였다. 그래서 많은 경우 이탈리아인이라는 정체성보다도 자신이 속한 도시와 지방, 생활권에 대한 감각이 훨씬 더 강하게 작동한다. 이탈리아의 균열은 단순한 경제 격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북부는 산업과 자본을 축적하며 부유한 지역으로 성장했고, 중부는 정치, 종교, 행정의 중심지로 남았으며, 남부는 통일 이후에도 오랫동안 구조적 낙후와 소외를 경험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의 차이는 단순한 생활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와 감정 그리고 자존심의 차이로 굳어졌다. 이 불안정한 구조는 20세기 들어 베니토 무솔리니의 등장으로 다른 방향으로 수렴되는데 무솔리니 정권은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지역과 계급의 차이를 억누르고 하나의 이탈리아를 강조했다. 하지만 그것은 통합이 아니라 통제에 가까웠고 그 억눌린 균열은 전쟁의 패전 이후 다시 표면으로 드러난다. 이탈리아는 하나의 국가가 되었지만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가장 선명한 표현이 우리가 잘 아는 이탈리아의 축구다. 세리에 A는 리그가 아니라 분열된 이탈리아의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는 무대다.
물론 지역 갈등이 축구로 투영되는 현상은 이탈리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스페인과 잉글랜드 역시 축구장 자신들 내부의 복잡한 갈등 관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분열은 이들과는 또 다른 특징을 가진다. 스페인의 축구가 카탈루냐나 바스크처럼 독립된 민족 정체성과 중앙 권력에 대한 분리주의적 저항이라는 정치적 대결에 가깝다면, 잉글랜드의 축구는 사회경제적 계급 갈등의 성격이 짙다. 반면 이탈리아는 분리를 외치기보다는, 이탈리아라는 테두리 안에서 누가 이 국가의 진짜 중심인가? 혹은 누가 더 정통성 있는 역사를 가졌는가? 를 다투는 끝없는 내전에 가깝다.
1. 이탈리아 북부
이탈리아를 흔히 부유한 북부와 가난한 남부로 나누어 이해하지만, 이 구분만으로는 이 나라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경제와 산업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북부 내부에도 서로 전혀 다른 역사, 질서, 감정과 자부심을 가진 세계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북부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지역이 아니다. 토리노와 밀라노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근대화를 이끌었고, 피렌체와 볼로냐는 문화와 학문, 사회적 연대를 통해 다른 위상을 만들었으며,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해상 공화국의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해왔다. 그래서 북부의 축구는 단순한 강팀들의 경쟁이 아니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형성된 도시 정체성의 충돌이다.
1.1 피에몬테 지방 토리노
북부의 중심인 피에몬테, 특히 토리노는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한 지역이다. 사르데냐 왕국을 기반으로 외교와 군사, 산업을 결합해 새로운 국가를 설계한 이 도시는 단순한 지방 도시가 아니라 통일 이탈리아의 기획실에 가까웠다. 심지어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수도였다. 토리노는 새로운 국가의 질서를 설계하고 가동한 공간이었고, 그 성격은 실용적이고 조직적이며 체계적이었다. 여기에 자동차 회사 피아트(FIAT)를 중심으로 한 중공업이 더해지면서 토리노는 이탈리아 산업화의 중심이 되었다. 피아트를 소유한 아녤리 가문은 단순한 재벌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탈리아 경제와 사회를 움직여온 비공식 지배층처럼 인식되었다. 토리노의 공장과 기계, 생산 라인은 곧 이 도시의 성격이 되었다. 이 구조는 축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유벤투스는 아녤리 가문과 피아트의 후원을 배경으로 성장하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승리의 시스템이 되었다. 피아트 공장을 비롯한 북부 산업 현장으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남부 출신 노동자들 상당수가 유벤투스를 응원하게 되면서, 유벤투스는 토리노의 팀을 넘어 전국구 팀으로 확장된다. 반면 같은 도시의 토리노 FC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1940년대의 토리노는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 중 하나였지만, 1949년 수페르가 참사로 팀의 황금기는 갑작스럽게 끝난다. 그래서 토리노 FC는 단순한 또 하나의 구단이 아니라, 시스템과 자본에 가려졌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은 도시의 기억과 상처, 그리고 지역적 자존심의 상징으로 남았다. 토리노 시민들에게 유벤투스가 이탈리아 전체의 팀이라면, 토리노 FC는 여전히 우리 도시의 팀이다. 데르비 델라 몰레 (토리노 더비) 가 단순한 지역 더비를 넘어 시스템과 저항의 충돌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2 롬바르디아 지방 밀라노와 베르가모
토리노가 제조업과 조직의 도시라면, 밀라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북부를 대표한다. 롬바르디아의 중심 도시 밀라노는 금융, 패션, 서비스업, 글로벌 기업이 집결한 이탈리아 경제의 수도이자 사실상 유럽 대륙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도시 중 하나다. 이곳의 논리는 공장보다는 시장에, 생산보다는 자본 흐름에 가깝다. 그래서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도시보다 유럽의 도시처럼 보인다. 그리고 바로 그 도시 안에서도 두 개의 전혀 다른 축구적 정체성이 생겨난다. AC 밀란과 인테르는 같은 도시, 심지어 같은 경기장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방향을 상징한다. 인테르는 이름부터 Internazionale다. 창단 초기부터 외국인 선수와 외부 세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했고, 개방성과 확장성, 국제성을 팀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반면 밀란은 보다 오래 축적된 전통, 도시 중심의 명문성, 안정된 권위의 이미지를 지닌다. 이 둘의 차이는 단순한 전술이나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밀라노라는 도시가 확장하는 도시인가, 아니면 전통을 축적해온 도시인가를 놓고 벌이는 상징적 갈등이다. 같은 롬바르디아 안의 아탈란타는 또 다른 북부의 얼굴을 보여준다. 베르가모를 연고로 한 이 팀은 밀라노처럼 막대한 자본과 국제적 위상을 가진 팀도 아니고, 토리노처럼 국가 산업의 상징도 아니다. 그러나 아탈란타는 강한 지역 공동체와 일관된 육성 시스템, 그리고 조직적 팀 운영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만들어냈다. 홈구장인 베르가모의 경기장은 오늘날 2만 명대 중반 규모로, 북부 빅클럽들의 거대한 스타디움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작지만, 그 공간 안에 응축된 결속력은 오히려 더 강하다. 아탈란타는 최근 수년간 세리에 A와 유럽 대항전에서 꾸준히 경쟁력을 보여주며, 자본과 권력 없이도 지역 그 자체의 힘으로 정상권에 도전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밀라노가 글로벌 자본과 국제성을 대표한다면, 베르가모는 공동체와 지역적 응집력의 힘을 보여주는 도시다. 같은 롬바르디아 안에도 이렇게 다른 세계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이탈리아 북부의 복잡성을 잘 보여준다.
1.3 토스카나 지방 피렌체, 피사, 시에나
토스카나로 내려오면 분위기는 다르게 변한다. 피렌체, 피사, 시에나로 이어지는 이 지역은 산업 생산량이나 금융 규모보다 문화적 자부심과 역사적 정통성이 더 강하게 작동하는 공간이다. 르네상스를 꽃피우며 유럽 근대 문명의 한 축을 형성한 이 지역 사람들에게 토스카나는 단순한 지방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국가라는 거대한 체계보다 각 도시가 품고 있는 역사와 상징이 훨씬 중요하다. 피렌체를 연고로 하는 피오렌티나는 바로 그런 문화적 자의식이 축구로 옮겨진 결과물이다. 보라색과 백합 문장은 피렌체라는 도시의 상징을 압축하고, 팬들에게 이 팀은 단순한 클럽이 아니라 르네상스의 기억과 도시의 품격을 계승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토스카나의 갈등은 외부와의 경쟁만이 아니라 내부의 앙숙 관계에서도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여행지 피사와 중세 도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시에나는 오랫동안 피렌체라는 거대 문화 권력에 맞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왔다. 그래서 피사와 시에나의 축구팀은 단순한 지역 구단이 아니라, 각 도시가 스스로의 역사적 존재감을 지키는 상징적 존재가 된다. 피렌체와 피사의 관계가 오랜 세월 적대와 경쟁의 기억 속에서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은, 축구장 안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토스카나의 축구는 이탈리아나 토스카나라는 큰 이름 아래 뭉치기보다, 각 도시가 자기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는 구조에 가깝다. 이들에게 축구는 단순한 경기라기보다 독립 공화국 시절의 오랜 전쟁이 현대적으로 변형된 형태처럼 보인다.
1.4 에밀리아로마냐 지방 볼로냐
에밀리아로마냐, 특히 볼로냐는 북부의 또 다른 결을 보여준다. 이곳은 산업과 학문, 정치와 공동체 문화가 비교적 균형 있게 결합된 공간이다. 이탈리아에서도 협동조합 전통이 강한 지역으로 꼽히며, 자본의 논리만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 의식이 도시 운영의 중요한 축으로 작동해왔다. 또한 볼로냐 대학교는 서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도시 전체가 오랫동안 학문과 토론, 지적 교류의 장으로 기능해왔다. 그래서 볼로냐는 단순히 부유한 도시라기보다 가장 지적인 도시라는 이미지다. 이런 배경은 축구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볼로냐 FC가 최근 다시 상위권 경쟁에 뛰어들고, 거대 자본을 앞세운 명문들 사이에서 유럽 대항전 진출을 일궈낸 것은 단순한 반짝 성과만으로 보기 어렵다. 볼로냐의 축구는 화려한 개인기 몇 명에 의존하기보다, 조직력과 균형, 분석적 운영과 지역 사회의 안정된 지지를 결합한 결과에 가깝다. 이 도시는 산업 수도도, 금융 수도도 아니지만, 북부 안에서 또 다른 방식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볼로냐를 통해 보면 이탈리아 북부는 단순한 경제 우위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 다른 근대화 방식들이 공존하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1.5 리구리아 지방 제노바
리구리아 지방의 항구 도시 제노바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형성된 또 하나의 북부를 보여준다. 이 도시는 중세와 근세를 거치며 베네치아와 함께 지중해를 지배했던 해상 공화국 가운데 하나였고, 무역과 금융, 보험과 상업 네트워크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콜럼버스가 태어난 도시라는 점도 이곳의 해양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제노바의 정체성은 공장 굴뚝도, 대형 금융지구도 아닌 바다와 항로, 그리고 교역의 기억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 도시의 축구 역시 산업 도시나 수도의 축구와는 다른 결을 갖는다. 제노바에는 같은 도시를 연고로 하지만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닌 두 팀이 있다. 제노아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클럽으로, 영국 상인과 선원들의 영향 속에서 태어났다. 그 출발 자체가 국제적이고 항구적이었기 때문에, 제노아는 오래된 전통과 도시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팀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삼프도리아는 제노아보다 현대적인 구단이다. 이 팀은 과거의 영광보다는 전후 도시 재편 속에서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의 산물에 가깝다. 그리고 삼프도리아는 1990년대 초 로베르토 만치니와 잔루카 비알리라는 상징적 존재를 앞세워, 1991년 세리에 A 우승과 1992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남긴다. 이 전성기는 단순한 이변이 아니라, 해상 도시 제노바가 지닌 유연한 실용성과 조직된 팀 운영 위에 만치니라는 예외적 재능이 결합하면서 한때 북부 3강의 질서를 실제로 흔들어낸 순간이었다.
1.6 베네토 지방 베네치아
베네토 지방, 특히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북부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도시다. 이곳은 이탈리아 국가에 편입되기 오래 전부터 천 년 가까이 독립적인 해상 국가로 존재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이탈리아라는 정체성은 늘 절대적인 1순위가 아니었고, 중앙 권력에 대한 거리감과 도시 자체에 대한 자부심은 유난히 강했다. 그 감각은 축구에도 이어진다. 베네치아 FC는 세리에 A의 전통 강호는 아니지만, 이 팀이 가진 독특한 매력은 오히려 그 비주류성에서 나온다. 홈구장은 섬에 있어 수상버스를 이용해 접근하는 경험이 매우 자연스럽고 이 자체가 이 도시가 육지의 시스템과 물리적, 심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섬의 왕국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베네치아의 축구는 강함보다도 고유함의 문제에 가깝다.
2.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
이탈리아 북부가 서로 다른 산업, 금융, 해상 무역, 문화와 교육의 자부심이 축구를 통해 충돌하는 공간이라면, 중부와 남부는 훨씬 더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방식으로 균열이 드러나는 곳이다. 이 지역에서는 경제나 산업의 규모보다 정체성, 역사, 감정, 그리고 정치적 상징이 더 강하게 작동한다. 중부의 로마는 정치와 역사, 종교와 국가의 상징이 한데 응축된 도시이고, 남부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뒤처진 지역이 아니라 통일 이후 북부 중심의 체제에 편입되며 상대적 박탈감과 모욕의 기억을 깊게 축적해온 공간이다. 그래서 중부와 남부의 축구는 단지 약팀과 강팀의 구도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누가 더 강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자신들의 존재를 더 강하게 증명하느냐의 문제다.
2.1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
로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중심이었고, 가톨릭 세계의 심장이며, 현대 이탈리아의 수도다. 이 도시는 정치와 종교, 역사와 국가를 동시에 상징하는 특수한 공간이다. 그러나 로마조차 하나의 정체성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같은 도시를 연고로 하는 AS 로마와 SS 라치오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상징적 도시 로마를 해석한다. 이 차이는 단순한 취향이나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각 구단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과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다. AS 로마는 1927년 무솔리니 치하에서 로마 지역 여러 팀이 통합되며 탄생한 구단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중앙집권적 통합의 산물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이 팀은 그 반대의 성격을 띠게 된다. 로마라는 거대한 역사와 권력의 도시 안에서 AS 로마는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의 팀으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이 팀의 팬덤은 자연스럽게 도시 중심부와 서민층, 생활 공동체를 기반으로 형성된다. 정치적 성향은 다양하지만, 대체로 중앙 권력이나 기득권에 대한 거리감, 그리고 로마라는 도시 내부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강하게 작동한다. AS 로마가 상징하는 것은 제국의 기억보다 현재의 도시, 살아 있는 시민들의 로마다. 반면 라치오는 완전히 다른 출발점을 가진다. 1900년에 창단된 이 팀은 애초부터 로마라는 도시보다 더 넓은 단위인 라치오 지역을 대표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1927년 AS 로마의 통합 과정에도 합류하지 않았다. 이는 곧 도시 중심의 로마 정체성에 대한 거리 두기였고, 동시에 자신들을 더 큰 질서와 역사적 연속성의 일부로 인식하는 태도였다. 라치오는 스스로를 단순한 도시 팀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권위와 질서, 계승의 이미지와 겹쳐 보이게 만드는 전통을 길게 유지해왔다. 팬덤 구성 역시 이 성격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라치오는 전통적으로 도시 외곽, 중상류층, 그리고 권위와 질서를 중시하는 집단의 지지를 받아왔고, 일부 울트라 그룹은 현대 이탈리아 정치 맥락 속에서 극우적 상징과 연결되기도 했다. 물론 모든 라치오 팬을 하나의 정치 성향으로 묶을 수는 없지만, 이 팀이 구조적으로 권위와 역사적 질서를 중시하는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흥미로운 점은 로마의 두 팀이 한때 북부 중심의 권력 구조를 실제로 흔들어본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세리에 A는 세계 최고의 리그였고, 토리노와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북부의 산업 자본과 시장 논리가 리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SS 라치오는 베론, 네드베드, 살라스, 시메오네, 미하일로비치, 네스타 같은 당대 정상급 전력을 구축하며 2000년에 스쿠데토를 들어 올렸다. 이어 AS 로마 역시 프란체스코 토티를 중심으로 바티스투타, 몬텔라, 카푸, 사무엘, 에메르손, 캉델라, 알다이르 같은 강력한 멤버를 갖추고 2001년 정상에 올랐다. 이 시기의 로마는 더 이상 정치와 상징만의 도시가 아니었다. 축구에서만큼은 북부의 경제 시스템과 자본 권력을 실제로 넘어선 순간이 존재했다. 다만 북부 클럽들이 산업과 금융, 글로벌 자본을 통해 장기적인 경쟁력을 유지한 것과 달리, 라치오는 재정 문제로 급격히 흔들렸고, AS 로마는 이후 유벤투스 등 북부 강호들에 밀려 오랫동안 만년 2인자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로마의 축구는 북부를 한때 뒤집을 수는 있었지만, 북부처럼 지속적으로 지배할 수는 없었다. 그 차이가 곧 이탈리아 구조의 차이이기도 하다.
2.2 캄파니아 지방 나폴리
이탈리아 통일 이후 남부는 오랫동안 북부보다 경제적으로 뒤처졌고, 정치적으로도 주변부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산업과 자본은 북부에 집중되었고, 남부는 그 구조 속에서 종속된 위치를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 격차는 단순한 경제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남부 사람들에게 이탈리아는 언제나 우리의 국가이면서도 동시에 우리 위에 군림하는 체계처럼 느껴지는 이중적 존재였고, 북부로부터 게으르고 더럽고 낙후된 존재라는 멸시를 받아왔다는 기억 역시 강하게 남았다. 그래서 남부의 대표 도시 나폴리, 그리고 그 축구팀 SSC 나폴리는 단순한 지역 클럽이 아니라 차별과 모욕, 소외와 저항이 응축된 상징이 된다. 나폴리의 축구가 북부의 경제 시스템과 거리가 멀고, 대신 뜨거운 열정과 연고 의식, 폭발적인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폴리 경기장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은 단순한 홈 응원이 아니라, 북부를 향해 던지는 남부의 집단적 외침처럼 들린다. 그리고 이 감정을 가장 극적으로 폭발시킨 존재가 바로 디에고 마라도나다. 1980년대 나폴리는 마라도나 영입 이후 유벤투스와 밀란, 인테르로 대표되는 북부의 거대 자본 클럽들을 넘어 세리에 A 정상에 오른다. 이 사건은 단순한 스포츠의 이변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부가 처음으로 북부를 넘어선 순간으로 기억되었고, 그래서 나폴리에서 마라도나는 선수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그는 단지 골을 넣고 우승을 안겨준 스타가 아니라, 남부의 자존심을 이탈리아 전국에 알린 상징이었다. 나폴리에서 축구는 오락이 아니라 존엄의 문제였고, 마라도나는 그 존엄을 구현한 존재였다. 이탈리아 남북 갈등과 나폴리의 복합적 정체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은 1990년 월드컵 4강 1차전이었다.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하필 마라도나의 도시 나폴리에서 열리자, 마라도나는 경기 전 '나폴리는 1년 364일 이탈리아로 존중받지 못하다가 오늘 하루만 이탈리아인이 되라고 요구받는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나폴리인들의 복잡한 감정을 건드렸다. 그러나 나폴리의 반응은 단순하지 않았다. 경기장에 'Maradona, Naples loves you but Italy is our homeland'와 'Diego in our hearts, Italy in our songs' 같은 문구가 함께 등장했고, 이는 나폴리 사람들이 마라도나와 도시 정체성, 그리고 국가 정체성 사이에서 얼마나 갈라져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이 장면은 나폴리가 이탈리아를 배신한 순간이라기보다, 나폴리가 국가와 지역, 조국과 우상 사이에서 얼마나 복잡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드러낸 순간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 사건 이후 마라도나와 이탈리아 주류 사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지만, 그를 나폴리에서 밀어낸 것은 단지 이 발언 하나만이 아니라 이후의 약물 문제와 사생활 논란, 언론의 적대적 보도까지 겹친 결과였다. 마라도나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폴리는 2023년과 2025년에 다시 스쿠데토를 차지했다. 이 우승들은 단순한 성적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한 번은 마라도나의 유산은 끝나지 않았다는 선언이었고, 또 한 번은 남부는 아직 살아 있다는 증명이었다. 그래서 나폴리의 우승은 늘 축구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남부가 여전히 이탈리아 안에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2.3 그 외 남부 지방: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시칠리아는 오랜 시간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유지해온 섬이다. 이곳은 지리적으로는 이탈리아와 연결되어 있지만, 정체성의 차원에서는 언제나 또 하나의 세계처럼 여겨져 왔다. 그래서 팔레르모와 카타니아의 대결은 단순한 지역 더비가 아니라, 하나의 섬 안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패권 경쟁처럼 보인다. 같은 시칠리아에 속해 있으면서도 서로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이 관계는, 이탈리아 전체가 품고 있는 지역주의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하다. 시칠리아에서 축구는 단순한 취미나 산업이 아니라, 섬이 스스로의 이름을 외부 세계에 각인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칼라브리아도 마찬가지다. 레지나나 크로토네 같은 팀들은 이탈리아 축구 전체에서 보면 오랫동안 변방에 머물렀고, 가끔 1부리그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2부리그로 내려가곤 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의 축구는 더욱 절실하다. 이 팀들에게 1부리그 승격과 잔류는 단순한 성과가 아니라, 지도 바깥으로 밀려난 지역이 자신들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순간에 가깝다. 이곳에서는 트로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다. 남부의 축구가 유난히 절실하고 감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경기 결과가 아니라 지역의 존재와 존엄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3. 이탈리아의 균열이 맞붙는 전쟁터: 라이벌전
이탈리아 축구를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우승 횟수나 전술부터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 이 리그의 본질은 언제나 라이벌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세리에 A의 더비들은 단순한 지역 경쟁이 아니라,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내부에 품고 있는 균열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이다. 산업과 자본, 역사와 정체성, 계급과 감정이 축구라는 형식으로 터져 나오는 장면들. 그래서 이탈리아의 라이벌전은 경기라기보다 하나의 사회적 사건에 가깝다.
3.1 AC 밀란 vs 인테르
AC 밀란과 인테르의 대결은 같은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가장 세련된 충돌이다. 두 팀은 같은 경기장을 공유하지만, 그 공간을 부르는 이름부터 다르다. 밀란에게는 산 시로이고, 인테르에게는 주세페 메아차다. AC 밀란 공식 자료에 따르면 이 경기장은 본래 밀란의 구장이었고, 인테르와의 공동 사용은 1947년부터 시작되었다. 반면 인테르는 1908년 AC 밀란 내부의 분열 속에서 외국인 선수까지 받아들이는 더 개방적인 클럽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탄생했다. 그래서 밀란 더비는 애초부터 같은 도시 안에 공존하는 두 팀의 경쟁이 아니라, 밀라노가 어떤 도시가 될 것인가를 두고 갈라진 두 방향의 충돌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더비가 격렬하면서도 묘하게 공존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 더비처럼 노골적인 적대와 폭력으로만 소비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약한 것도 아니다. 호나우두, 로베르토 바조, 안드레아 피를로, 클라렌스 세도르프,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처럼 두 팀을 모두 거친 이름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이 라이벌리가 다른 더비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해왔음을 보여준다. 같은 도시, 같은 경기장, 같은 생활권 안에서 두 팀은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기보다 끊임없이 의식하며 공존해왔다. 그러나 경기 당일만큼은 예외다. 관중석은 완벽하게 둘로 갈라지고, 붉은색과 파란색의 물결은 하나의 스타디움을 두 개의 세계로 바꿔 놓는다. 이 더비의 긴장감은 폭력적이라기보다, 세련되게 분리된 적대감에 가깝다. 두 팀의 상징도 분명히 다르다. 인테르는 이름 그대로 외부를 받아들이는 구단이었고, 지금도 그 국제적 정체성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다. 인테르 공식 명예의 전당만 봐도 위대한 주장 하비에르 사네티부터 로타어 마테우스, 호나우두, 데얀 스탄코비치, 디에고 밀리토, 사무엘 에투, 웨슬리 스네이더, 마이콘처럼 외국 출신 전설들이 자연스럽게 중심을 차지한다. 반면 밀란은 이탈리아 레전드들과 세계 최고의 외국인 재능이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한 팀이었다. 밀란의 영구 결번 프랑코 바레시, 파올로 말디니 같은 이탈리아의 상징 위에 판 바스텐, 굴리트, 레이카르트, 셰우첸코, 카카 같은 세계적 재능이 얹히며 밀란은 유럽 정상에 일곱 번 올랐다. 그래서 이 더비는 단순한 승부가 아니라, 밀라노라는 도시가 확장으로 자신을 증명할 것인가, 아니면 축적된 전통과 품격으로 자신을 완성할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전투이다.
3.2 유벤투스 vs SSC 나폴리
유벤투스와 SSC 나폴리의 대결은 이탈리아 축구를 넘어 이 나라의 구조 자체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경기다. 이 맞대결은 단순한 라이벌전이 아니라 북부와 남부, 지배와 저항이 맞붙는 상징적 대리전이다. 유벤투스는 아녤리 가문과 FIAT로 대표되는 산업 자본, 그리고 승리를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시스템의 집약체로서 북부 이탈리아가 만들어낸 질서 그 자체를 상징한다. 반면 나폴리는 그 구조 바깥에 놓여 있던 존재다. 오랫동안 소외되고 차별받아온 남부의 감정이 응축된 팀이며, 그 축구는 공장식 생산보다 거리의 열기와 자존심의 언어에 더 가깝다. 유벤투스가 이탈리아를 운영하는 방식이라면, 나폴리는 그 운영에서 밀려난 이들이 어떻게 자신을 증명하는지를 보여주는 팀이다. 이 구도가 가장 강렬하게 형체를 드러낸 시기가 1980년대였다. 유벤투스에는 완성된 시스템의 상징과도 같았던 유럽의 왕 미셸 플라티니가 있었고, 나폴리에는 구조 자체를 무너뜨리는 존재였던 디에고 마라도나가 있었다. 플라티니가 질서와 조직 속에서 경기를 지배하는 플레이메이커였다면, 마라도나는 그 질서를 무시하고 판을 통째로 뒤집는 절대적 개인이었다. 그리고 마라도나의 나폴리가 북부 거인들을 넘어 세리에 A 정상에 올랐을 때, 그것은 단순한 우승이 아니었다. 남부가 처음으로 북부의 권위에 정면으로 균열을 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순간부터 유벤투스와 나폴리의 경기는 승점 3점을 두고 다투는 리그 경기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 플라티니 대 마라도나라는 구도는 곧 토리노 대 나폴리, 공장 대 거리, 질서 대 반란이라는 훨씬 더 큰 이야기로 바뀌었다.이 악감정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벤투스는 여전히 안정된 구조와 자본, 장기적인 지배력을 상징하고, 나폴리는 여전히 지역 정체성과 감정을 바탕으로 그 체제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도 이 대결이 식지 않는 것은 두 팀이 단순히 강팀이어서가 아니다. 유벤투스에게 나폴리는 질서를 흔드는 가장 불편한 도전자이고, 나폴리에게 유벤투스는 언제나 넘어야 할 상징적 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경기는 늘 감정적이다. 유벤투스가 지배라면 나폴리는 저항이고, 이 둘이 맞붙는 순간 축구는 다시 계급과 지역 감정의 대결로 바뀐다.
3.3 AS 로마 vs SS 라치오
AS 로마와 SS 라치오의 대결은 경제나 산업의 충돌이라기보다 정체성의 충돌에 가깝다. 같은 도시를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로마를 상상하는 두 집단은 같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AS 로마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시민들의 로마, 현재형의 수도를 상징한다. 반면 라치오는 더 넓은 라치오 지역과 함께, 고대 제국과 역사적 질서, 권위의 이미지를 자신들의 정체성 안에 오래 품어왔다. 그래서 이 경기는 누가 더 강한지를 묻지 않고 대신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로마는 누구의 것인가? 이 질문 하나가 수도라는 도시의 복잡한 자의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로마 더비를 상징의 충돌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이 경기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거칠고, 가장 쉽게 정치의 언어로 오염되는 더비 가운데 하나다. 라치오의 일부 울트라 집단은 오랫동안 극우적 상징과 연결되어 왔고, 파시스트식 경례나 반유대주의적 메시지로 반복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파올로 디 카니오의 파시스트식 경례는 국제적인 파장을 낳았고, 2017년에는 라치오 팬들이 안네 프랑크가 로마 유니폼을 입은 스티커를 경기장에 붙여 이탈리아 사회 전체의 공분을 샀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라치오 팬 전체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다만 이 더비가 단순한 스포츠의 경계를 자주 넘어선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AS 로마 역시 자신들을 단순한 축구 팬이 아니라 도시 이름을 지키는 집단으로 인식해왔기에, 이 두 팀은 상대를 경쟁자라기보다 같은 도시 안에서 끝내 공존할 수 없는 존재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데르비 델라 카피탈레 (로마 더비)는 단순한 더비가 아니라, 로마라는 이름을 둘로 찢어 놓고 누가 진짜 수도의 얼굴인지를 다투는 전쟁이다.
3.4 유벤투스 vs AS 로마
유벤투스와 AS 로마의 대결은 이탈리아의 구조적 긴장을 가장 현실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토리노의 유벤투스가 실질적인 경제 권력을 대표한다면, 로마는 정치와 상징의 중심이다. 북부는 로마를 비효율적인 행정 도시로 냉소하고, 로마는 북부를 냉혹한 자본 권력으로 의심한다. 이 감정은 축구장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특히 2000년대와 2010년대는 이 대결이 가장 집요하게 반복된 시기였다. 로마는 여러 차례 유벤투스를 추격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끝내 2위에 머무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로마는 위대하지만 체제를 끝까지 뒤집지는 못한 팀, 다시 말해 영원한 2인자라는 이미지를 얻게 된다. 반대로 유벤투스는 흔들리지 않는 시스템으로 경쟁을 끝내 이겨내며 지배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관계의 진짜 흥미는 다른 지점에서 발생한다. 한동안 이탈리아 축구에는 하나의 암묵적인 관념이 있었다. 유벤투스의 10번이 곧 이탈리아 대표팀의 10번이라는 인식이다. 로베르토 바조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로 이어진 그 계보는, 국가대표의 중심이 토리노에서 나온다는 상징을 강화했다. 그런데 이 흐름을 끊어낸 존재가 바로 프란체스코 토티였다. 그는 로마를 떠나지 않은 채 로마의 10번으로 이탈리아 대표팀의 중심이 되었고, 2006년 월드컵에서는 모든 경기 출전, 대회 최다 도움 4개, 호주전 결승 페널티킥이라는 방식으로 이탈리아에게 월드컵 우승은 안겨 주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북부의 자본과 시스템이 독점해온 국가적 상징을 로마의 10번이 빼앗아온 순간이었다. 그래서 유벤투스와 로마의 대결은 승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유벤투스가 더 많은 우승으로 질서를 지켰다면, 로마는 토티라는 존재를 통해 상징의 영역에서 그 질서를 흔들었다. 결국 이 경기는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이탈리아의 중심은 어디인가. 돈과 시스템이 만든 토리노인가, 아니면 역사와 상징이 응축된 수도 로마인가.
3.5 유벤투스 vs 피오렌티나
피오렌티나와 유벤투스의 관계는 라이벌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감정은 경쟁이라기보다 거의 증오에 가깝다.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는 자본과 산업보다 문화와 역사, 그리고 자존심으로 자신을 정의해온 곳이다. 그런 피렌체에서 피오렌티나는 단순한 구단이 아니라 도시의 품격과 자의식을 대표하는 이름이 된다. 그런데 유벤투스는 바로 그 자존심을 가장 자주, 가장 깊게 건드려온 팀이다. 이 적대의 시작점으로 가장 자주 거론되는 장면이 82 시즌 최종전이다. 피오렌티나는 칼리아리 원정에서 득점이 취소됐고, 유벤투스는 카탄차로 원정에서 리암 브래디의 페널티킥으로 우승을 확정했다. 피렌체 사람들에게 그날은 단순한 판정 논란이 아니었다. 북부의 거대한 권력이 또 한 번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을 가져갔다는 기억의 시작점이었다. 결정적인 상처는 로베르토 바조의 이적이었다. 바조는 단순한 에이스가 아니라 피렌체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였고, 그런 선수가 1990년 세계 최고 이적료로 유벤투스로 넘어간 순간 그 사건은 이적이 아니라 약탈로 받아들여졌다. 그해 피렌체는 분노로 들끓었고, 바조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배신과 상실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래서 피렌체에서는 유벤투스를 지지한다는 것 자체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른 도시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유벤투스의 전국적 인기 또한 이곳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못한다. 유벤투스가 자본과 시스템을 상징한다면, 피오렌티나는 문화와 자존심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 둘이 만나는 순간 축구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 즉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와 그것을 되찾으려는 의지로 변한다.
3.6 유벤투스 vs 인테르
유벤투스와 인테르의 대결은 이탈리아 북부 내부에서 벌어지는 가장 거대한 충돌이자, 지역 더비의 범위를 넘어 이탈리아 전역을 사실상 둘로 가르는 유일한 국가대표급 라이벌전이다. 1967년, 전설적인 스포츠 기자 잔니 브레라가 이 맞대결을 데르비 디탈리아라고 부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이 경기를 단순한 두 강팀의 대결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주목하는 상징적 충돌로 보았다. 당시 이 명칭에는 또 하나의 배경이 있었다. 그 시점까지 두 팀 모두 아직 강등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대결은 처음부터 전국구 명문끼리의 싸움이라는 특별한 권위를 갖고 있었다. 다만 2006년 칼초폴리로 유벤투스가 세리에 B로 강등되면서, 지금 이 기록을 온전히 유지하는 쪽은 인테르만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경기가 여전히 데르비 디탈리아로 불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 맞대결은 지금도 이탈리아 축구의 가장 큰 상징 전쟁이기 때문이다. 두 팀의 성격은 선명하게 다르다. 유벤투스가 아녤리 가문의 지휘 아래 철저한 기율과 시스템으로 승리를 찍어내는 거대한 공장이라면, 인테르는 이름 그대로 외부의 자본과 재능을 유연하게 수용하며 성장해온 시장에 가깝다. 토리노가 국가의 뼈대를 만들고 통제하려 했다면, 밀라노는 국경을 넘어 시장을 확장하려 했다. 그래서 이 경기는 승점 3점의 싸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북부의 주도권을 규율과 통제로 쥘 것인가, 아니면 개방과 확장으로 쥘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이탈리아 자본주의 내부의 대리전이다. 둘 다 북부의 팀이지만, 둘이 대표하는 북부의 얼굴은 결코 같지 않다. 데르비 디탈리아가 오래도록 특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7 칼초폴리와 불신의 역사
이탈리아 축구를 관통하는 수많은 라이벌전과 지역 갈등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은 불신이다. 그리고 이 불신이 단순한 피해망상이 아니라, 실제 제도와 권력의 문제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 사건이 2006년 칼초폴리였다. 흔히 이 사건은 유벤투스의 스캔들로 기억되지만, 실제로는 유벤투스를 중심으로 AC 밀란, 피오렌티나, 라치오가 함께 연루되어 제재를 받았고, 레지나도 별도 절차를 통해 처벌을 받았다. 다만 징계의 무게는 같지 않았다. 유벤투스는 2005, 2006 스쿠데토를 박탈당하고 세리에 B로 강등되었고, 반면 밀란, 피오렌티나, 라치오는 승점 삭감과 유럽대항전 관련 제재를 받는 방식으로 책임을 나눠졌다. 이 사건은 흔히 승부조작 스캔들로 불리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심판 배정과 축구 권력 구조에 대한 부당 개입 의혹과 처벌의 역사에 가까웠다. 칼초폴리가 남긴 진짜 상흔은 징계 그 자체보다, 이탈리아 축구 전체에 각인된 의심의 구조였다. 오랫동안 북부의 거대 자본과 권력에 눌려 왔다고 느끼던 나폴리, 로마, 피렌체 같은 도시의 팬들에게 이 사건은 하나의 확신처럼 작용했다. 우리가 정상에 오르지 못했던 것은 단지 실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판 자체가 공정하지 않았기 때문 아니냐는 의심이 훨씬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칼초폴리 이후 이탈리아에서 판정 논란은 좀처럼 단순한 오심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그것은 곧바로 권력, 연맹, 기득권, 그리고 북부 중심 질서에 대한 의심으로 번역된다. 축구는 이제 단순한 경기 결과가 아니라, 누가 판을 설계하고 누가 그 판 위에서 이익을 얻는가를 둘러싼 싸움이 되었다. 특히 이 사건은 데르비 디탈리아의 당사자인 유벤투스와 인테르의 관계를 되돌리기 어려운 수준으로 밀어 넣었다. 유벤투스에서 박탈된 2006년 스쿠데토가 인테르에 돌아가면서, 유벤투스 팬들은 그것을 법정에서 얻은 서류상의 우승이라고 폄하했고, 인테르 팬들은 유벤투스를 부패와 특권의 상징으로 규정했다. 결국 칼초폴리는 이미 존재하던 지역적·계급적 균열 위에 도덕적 혐오와 제도적 불신이라는 더 강한 감정을 덧씌운 사건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세리에 A의 많은 라이벌전은 단순한 팀 대 팀의 싸움이 아니라, 과연 이 판은 공정한가?라는 질문까지 함께 끌고 들어온다. 그것이 칼초폴리가 이탈리아 축구에 남긴 가장 깊은 상처다.
이 일곱 개의 충돌을 하나로 묶어 보면 공통된 구조가 보인다. 밀라노에서는 방향이 부딪히고, 유벤투스와 나폴리에서는 계급이 맞선다. 로마에서는 정체성이 찢어지고, 피렌체에서는 자존심이 폭발한다. 그리고 유벤투스와 인테르의 데르비 디탈리아에서는 북부 내부의 헤게모니 전쟁이 나라 전체의 전쟁처럼 비대해진다. 여기에 칼초폴리까지 더해지면 세리에 A는 더 이상 단순한 리그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국가가 내부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와 싸우는 방식이며, 이탈리아 축구는 그 분열을 가장 노골적이고도 생생하게 보여주는 무대다.
4. 이탈리아에서 축구는 단순한 공놀이가 아니다.
이탈리아에서 축구는 도시의 계급, 역사, 자본, 산업, 종교, 문화 자존심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전쟁의 매개체이다. 토리노, 밀라노, 로마, 나폴리, 피렌체, 제노바는 같은 리그와 같은 나라 안에 속해 있지만, 같은 세계를 살고 있지 않다. 각자의 도시는 저마다 다른 기억과 상처, 자부심과 적대감을 품고 있고, 축구는 그것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그래서 세리에 A의 라이벌전은 단순한 승부가 아니라 누가 더 정당한가?, 누가 이 도시를 대표하는가?, 누가 이탈리아의 중심인가? 라는 훨씬 더 깊은 질문이 숨어 있다. 이탈리아 축구가 유난히 감정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축구가 단순히 경기의 결과를 넘어, 각 도시와 지역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탈리아에서 축구는 스포츠가 아니라 사회의 축소판이다. 하나의 국가 안에 끝내 봉합되지 못한 균열, 서로 다른 세계가 같은 국기 아래 공존해야 하는 불편한 현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자기 이름과 색을 끝까지 지키려는 집단적 의지가 모두 축구장 위로 올라온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축구를 본다는 것은 단지 스포츠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어떻게 분열되어 있고, 또 어떻게 그 분열과 함께 살아가는지를 탐구하는 일이다. 이탈리아가 보여준 캄파닐리스모의 파편화된 전쟁을 이해했다면 언젠가는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분리주의가 중앙 권력과 대결하는 스페인의 축구도 탐구해 볼 것이다.
참고 자료
이탈리아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의 영상들을 많이 참고함
칼치오폴리
https://en.wikipedia.org/wiki/Calciopoli
이탈리아 도시별 특징
https://www.youtube.com/watch?v=1m8X5RnUu64
https://www.youtube.com/watch?v=k9Ay5jUNUII
나폴리와 마라도나 1990 월드컵
https://www.espn.com/soccer/story/_/id/37424009/diego-maradona-naples-1990-world-cup-italy
이탈리아 축구팀들
https://www.youtube.com/watch?v=dlt98YZsNmg
https://www.youtube.com/watch?v=WxX9iU2HqV4
이탈리아의 축구 더비
https://www.espn.com/soccer/story/_/id/37393184/juventus-fiorentina-let-football-do-talk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