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축구대표팀의 몰락의 원인

by 최인성

현재 이탈리아 축구의 위기를 설명할 때 가장 흔히 나오는 표현은 옛날 같지 않다 이다. 그러나 자세히 탐구해 보자면, 오늘날 이탈리아 축구대표팀의 몰락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더 정확한 표현은, 이탈리아 축구가 더 이상 과거처럼 월드클래스 선수와 빅클럽 경쟁력을 자동 재생산하는 체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실제로 FIGC (이탈리아 축구 연맹)는 2026년 보고서에서 이탈리아 축구의 위기를 단기적 실수보다 오랜 구조적 약점의 축적으로 규정했다. 특히 2026년 기준 이탈리아는 세 차례 연속 월드컵 진출 실패라는 충격적 결과를 맞았으며, 이는 국가대표팀의 문제가 아니라 이탈리아 축구 생태계 전체의 실패로 해석되고 있다.

다만 이 위기를 완전한 붕괴로 단정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세리에 A는 여전히 유럽 상위 리그권에 속하며, 인테르는 최근에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두번이나 진출했으며 SSC 나폴리, 아탈란타 BC 같은 성공 사례는 리그 내부에 여전히 경쟁적 역량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예외적 성공이 시스템 전체의 건강함을 입증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본 글은 이탈리아 축구의 현 상황을 몰락이라기보다, 상층의 전통은 남아 있으나 그것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시스템은 약화된 상태로 규정한다.

1. 칼치오폴리(Calciopoli) 이후의 구조적 균열

칼치오폴리는 이탈리아 명분 클럽들의 승부조작과 유벤투스의 강등과 승점 삭감, 그리고 스쿠데토 박탈의 문제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개별 구단 징계에 있지 않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세리에 A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제도적 신뢰와 리그 브랜드 가치가 이 사건을 기점으로 손상되었다는 데 있다. Deloitte를 인용한 당시 분석에 따르면, 2006/07 시즌 세리에 A 수익은 전년 대비 2억 3600만 유로 감소했으며, 이는 유벤투스 강등과 그 여파가 리그 전체 수익 구조에 직접 타격을 주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유벤투스의 강등으로 세리에 A 최정상급 선수들을 다른 리그에 뺏기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발생한 시점이다. 2000년대 중후반은 유럽 축구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티비와 대중 매체를 통해 본격적인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변모하던 시기였다. 프리미어리그는 이 시기 공격적인 국제 중계권 판매와 영어권 시장 확장을 발판으로 전 세계적 브랜드를 구축했다. 반면 이탈리아는 칼치오폴리 이후 내부 수습과 정당성 회복에 에너지를 소모했고, 결과적으로 축구 산업의 현대화 타이밍을 놓쳤다. 즉 칼치오폴리는 단순한 추문이 아니라 세리에 A가 세계 최고 리그라는 위치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분기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전통 명가들의 침체와 리그 상징 자본의 훼손

리그의 경쟁력은 단지 우승팀의 성적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리그는 자신의 상징을 대표하는 전통 명가들의 지속적 경쟁력을 통해 세계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런 점에서 세리에 A의 문제는 인테르, SSC 나폴리, 아탈란란타 BC 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AC 밀란, 유벤투스, 로마, 라치오가 장기적으로 리그 전체의 상징성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Deloitte 머니리그 2026 기준으로 이탈리아 클럽은 인테르가 11위, 밀란이 15위, 유벤투스가 16위, 로마가 27위다. 세리에의 빅 클럽들은 레알, 바르사, 바이에른, PSG, 잉글랜드 상위권과는 확실한 체급 차이가 있다.

리그의 경쟁력은 단지 우승팀 한 팀의 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특정 리그가 유럽 전체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는가는, 결국 그 리그를 대표하는 전통 명가들이 지속적으로 유럽대항전 후반부에 진입하고, 그 과정에서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세리에 A의 현재 문제는 인테르, 나폴리, 아탈란타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AC 밀란, 유벤투스 ,AS 로마 ,SS 라치오가 더 이상 동시에 유럽의 권력 구조를 흔드는 집단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오늘의 세리에 A는 강팀이 없는 리그가 아니라, 예전처럼 여러 명가가 함께 유럽의 상층부를 점령하는 리그가 아닌 상태에 더 가깝다.

밀란의 경우가 가장 상징적이다. 챔피언스리그 7회 우승의 역사와 비교하면, 최근 몇 년의 회복세는 분명 부분적 복구에 해당한다. 그러나 유럽대항전의 궤적을 보면, 이는 패권의 복귀라기보다 제한적 반등에 가깝다. 밀란은 2023년 챔피언스리그 4강까지 진출했으나 인테르에 밀려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2024 유로파리그에서는 로마에 합계 1-3으로 탈락했으며, 2025 챔피언스리그에서는 페예노르트에 합계 1-2로 무너졌다. 마이크 메냥 (Mike Maignan), 테오 에르난데스 (Theo Hernandez), 하파엘 레앙 (Rafael Leao) 같은 상위급 개별 자원은 존재하지만, 최근의 탈락 양상을 보면 현재의 밀란은 최정상급 주전 몇 명으로 경기를 흔들 수는 있어도, 두 경기 연속으로 유럽 강호를 압도할 만큼 스쿼드의 깊이와 완성도가 유지되는 팀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과거에는 밀란의 탈락이 충격이었다면, 지금은 특정 라운드에서의 낙마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 되었다는 점이 위상 하락의 핵심이다.

유벤투스는 외형상 더 복합적이다. 2010년대 세리에 A 9연패와 챔피언스리그 결승 2회 진출은 여전히 비안코네리의 체급을 증명하는 성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보는 지배의 지속이 아니라 과도기의 반복에 가깝다. 유벤투스는 2023 유로파리그 4강에서 세비야에 합계 2-3으로 탈락했고, 2024년에는 2023년의 승점 삭감 징계로 유럽대항전에 출전하지 못했으며, 2025 챔피언스리그에서는 PSV에 합계 3-4로 무너졌다. 현재 스쿼드 역시 마누엘 로카텔리 (Manuel Locatelli), 케난 일디즈 (Kenan Yıldız), 두샨 블라호비치 (Dušan Vlahović) 등 경쟁력 있는 자원을 갖고 있지만, 이 명단은 전성기 유벤투스가 보여주던 라인별 안정감과 연속성, 즉 유벤투스는 결국 후반부에 올라온다는 확신을 주는 집단과는 거리가 있다. 다시 말해 오늘의 유벤투스는 여전히 강팀이지만, 더 이상 유럽의 절대 강자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밀란과 마찬가지로 이름값과 실제 위상 사이에 간극이 생긴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로마와 라치오는 밀란 & 유벤투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리에 A의 한계를 드러낸다. 로마는 2022 컨퍼런스리그 초대 우승, 2023 유로파리그 준우승, 2024 유로파리그 4강이라는 의미 있는 성과를 냈고, 실제로 밀란을 꺾고 준결승까지 올라간 적도 있다. 라치오 역시 2024년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잡으며 이변을 만들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두 팀 모두 체급의 벽을 넘지 못했다. 로마는 세비야에 유로파리그 결승에서 패했고, 이어 바이엘 레버쿠젠에 4강에서 밀렸으며, 라치오는 2차전에서 바이에른에 0-3으로 완패했다. 이는 두 팀이 조직력과 응집력, 전술적 준비도 면에서는 충분히 경쟁력이 있지만, 선수층의 두께와 고강도 연전 대응력, 그리고 유럽 최상위권을 상대로 두 경기 합계 우위를 끝까지 지켜낼 체력과 자원 면에서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로마와 라치오는 토너먼트에서 까다로운 팀일 수는 있어도, 리그 전체의 위상을 끌어올릴 초강팀의 범주에는 아직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 네 구단 모두 90년대 말 2000년대 초 자타 공인 세계 최강의 축구팀이었지만 지금은 네 팀 다 아니다. 그러나 결국 이 네 구단의 최근 유럽대항전 성적은 하나의 공통된 결론으로 수렴한다. 세리에 A의 명가들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유럽의 권력 중심에 군림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성적은 간헐적으로 나온다. 4강도 가고, 결승도 가고, 강팀을 잡는 경기 역시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 밀란과 유벤투스가 유럽에서 보여주던 패권적 지위의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재의 세리에 A는 유럽 무대에서 싸울 팀은 있으나, 유럽을 장기적으로 지배할 팀은 드문 리그에 가깝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는 개별 감독이나 개별 시즌의 실패를 넘어, 다음 절에서 다룰 경기장·중계권·상업화 구조의 자본 열세로 연결된다.

3. 머니게임의 패배: 경기장, 중계권, 상업화 구조의 후진성

오늘날 유럽 축구는 전술만으로 경쟁하지 않는다. 수익 구조, 특히 매치데이(matchday), 방송권(broadcast), 상업수익(commercial revenue)의 총합이 선수 영입과 육성, 코칭스태프, 데이터 분석 체계, 의료 및 퍼포먼스 센터에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Deloitte의 2026 Football Money League에 따르면 상위 20개 클럽의 총매출은 124억 유로에 달했고, 상업수익은 사상 처음으로 50억 유로를 넘어섰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상위권 클럽들이 단지 축구를 잘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과 그 주변 자산을 다각적 수익 플랫폼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이다. Deloitte는 현장 내 레스토랑, 호텔, 브루어리, 비경기일 활용까지 포함 stadia asset utilization을 핵심 성장 동력으로 제시한다.이 지점에서 이탈리아는 구조적으로 밀린다. Reuters는 2025년 보도에서 AC 밀란, 인테르, 라치오, 로마 등 주요 구단들이 여전히 공공기관과의 협상, 행정 절차, 지방정부 소유 경기장 문제로 인해 재개발과 신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같은 기사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24년 사이 이탈리아에서 신축 또는 대규모 재개발이 이루어진 경기장은 6개에 불과했고, 같은 기간 독일은 19개, 잉글랜드는 13개, 프랑스는 12개였다. UEFA 회장은 2026년 아예 이탈리아의 축구 인프라를 유럽 최상위 리그들 가운데 최악 수준이라고 공개 비판했다. 이는 경기력 이전에 리그가 수익 기반에서 밀린다는 뜻이다. 수익 격차는 수치로도 분명하다. Reuters에 따르면 세리에 A의 2023/24 매치데이 수익은 4억 4000만 유로로, 프리미어리그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국내 중계권 역시 2024/25 시즌부터 시작되는 새 계약에서 5년 총 45억 유로를 확보했지만, 해외 중계권 2021~2024 주기 전체 수익이 약 7억 유로로 프리미어리그 해외 중계권 수익의 9분의 1 수준에 그쳤다. 2023년 입찰 당시 세리에 A는 연 10억 유로를 원했으나, 초기 제안은 기대에 미달했다. 이 수익 격차는 단순한 회계상의 차이가 아니라, 결국 선수를 얼마에 사오고 얼마나 붙잡아둘 수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따라서 세리에 A가 EPL과의 머니게임에서 졌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라 구조적 현실에 가깝다. 물론 개별 구단 기준으로 모든 잉글랜드 클럽이 모든 이탈리아 구단보다 부유하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러나 리그 전체의 현금흐름, 하위권 구단까지 포함한 방송권 분배력, 경기장 기반 수익 창출력, 글로벌 후원 유치력에서 이탈리아가 명백히 뒤처진 것은 사실이다. 리그 전체의 돈의 풀, 현금흐름, 투자여력, 중하위권의 체력을 보면 잉글랜드가 압도적인 건 맞다. Deloitte에 따르면 2024/25 시즌 머니리그 상위 20개 클럽의 총매출은 124억 유로에 달했다. 반면 세리에 A의 새 국내 중계권 계약은 5년 45억 유로, 연평균 9억 유로 수준으로, 직전 계약(3년 29억 유로, 연평균 약 9억 6700만 유로)보다 기본 보장액 기준 낮아졌다. 또 Deloitte에 따르면 EFL 챔피언십 24개 클럽의 2023/24 총매출은 9억 5800만 파운드였는데, 2024년 평균 환율 기준으로 약 11억 3200만 유로다. 즉 이탈리아는 일부 빅클럽이 아니라 리그 전체 상업화 구조에서 EPL, 라리가 3강, 바이에른, PSG 체제에 밀리고 있다. 이 차이는 선수단의 질과 깊이, 그리고 유망주 확보 경쟁에서 누적적으로 나타난다.

4. 선수 생산 시스템의 약화: 판타지스타, 수비수, 레지스타의 단절

4.1 판타지스타(fantasista)와 트레콰르티스타(trequartista)의 실종

이탈리아 축구의 정체성 가운데 하나는 판타지스타(fantasista)였다.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Alessandro Del Piero), 프란체스코 토티(Francesco Totti)는 단순한 공격형 미드필더, 쉐도우 스트라이커가 아니었다. 이들은 전술판 위의 한 칸이 아니라, 조직으로 환원되지 않는 창조성 그 자체였다. 보다 전술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트레콰르티스타(trequartista) 혹은 세컨드 스트라이커(seconda punta)로서 라인 사이에서 볼을 받으며, 좁은 공간에서 경기의 밀도를 바꾸는 존재였다. 그런데 FIGC의 최신 보고서는 이탈리아가 그러한 선수를 재생산하기 어려운 구조에 있음을 수치로 드러낸다. 현재 세리에 A에서 이탈리아 국가대표 출전 자격이 없는 선수들이 전체 출전시간의 67.9%를 차지하고, 경기당 평균 30분 이상 뛴 선수 284명 중 이탈리아인은 89명뿐이다. 더 결정적인 수치는 U21 이탈리아 선수의 리그 출전시간 비중이 고작 1.9%라는 점이다. 이는 조사 대상 50개 리그 중 49위다. 다시 말해 다음 토티, 다음 델피에로가 안 나오는 것은 우연한 재능 고갈이 아니라, 기회를 받지 못하는 구조의 결과다. 다른 포지션의 경우 선배 선수들에는 못 미치더라도 유럽에서 경쟁력 있는 선수들이 간혹 나왔으나 이탈리아의 10번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대 축구가 창의적 10번을 완전히 제거했다는 진술이 절반만 맞는 말이라는 점이다. 현대 축구는 고전적 10번을 그대로 두지 않았을 뿐, 그 기능을 인버티드 윙어(inverted winger), 가짜 9번(falso nueve), 혹은 하프스페이스 플레이메이커로 재배치해 왔다. 문제는 이탈리아가 전통적 판타지스타를 잃은 뒤, 그 창조성을 현대적 역할로 전환하는 데도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결과적으로 아주리는 낭만을 잃은 것이 아니라, 결정적 순간에 흐름을 비틀 수 있는 창조적 우위를 잃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 해석은 FIGC가 지적한 유소년 투자 열세와 낮은 자국 청년 선수 출전시간, 그리고 Reuters가 언급한 흥미로운 유형의 선수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4.2 수비 왕국의 약화

이탈리아 축구는 오랫동안 수비의 본산이었다. 파올로 말디니(Paolo Maldini), 알레산드로 네스타(Alessandro Nesta), 파비오 칸나바로(Fabio Cannavaro), 잔루카 잠브로타(Gianluca Zambrotta), 안드레아 바르찰리(Andrea Barzagli), 조르조 키엘리니(Giorgio Chiellini), 레오나르도 보누치(Leonardo Bonucci)는 각기 시대적 차이가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수비 지능, 라인 컨트롤, 1대1 수비, 경기 읽기를 높은 수준에서 구현한 선수들이었다. 그러나 최근 이탈리아는 이러한 유형의 수비수를 연속적으로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수비 재능이 사라졌다기보다, 수비수를 성장시키는 경로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FIGC는 현재 세리에 A 출전시간의 대다수가 외국인 선수에게 돌아가고 있으며, 특히 이탈리아 U21 선수의 출전시간은 세계 최하위권이라고 밝혔다. 경험 축적이 중요한 센터백과 풀백 포지션에서 이런 수치는 치명적이다. 한때 이탈리아가 전설적인 센터백들의 수비력은, 꾸준히 빅매치를 소화하며 축적되는 실전 경험 없이는 계승되기 어렵다. 여기에 현대 축구의 요구치 변화도 겹친다. 오늘날 정상급 센터백은 단지 수비만 잘해서는 부족하다. 전진 패스, 넓은 공간 커버, 높은 라인 유지, 전환 수비, 그리고 필요할 경우 전진 전개까지 수행해야 한다. 즉 현대의 수비수는 전통적 이탈리아식 수비 지능에 더해, 운동능력과 빌드업 능력까지 동시에 갖춰야 한다. 이탈리아가 이 영역에서 과거처럼 독점적 우위를 갖지 못하게 된 것은, 전술 지체라기보다 요구 조건의 복합화에 대한 적응이 늦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더 안타까운 점은 선배 수비수들 만큼 상대 공격수들을 피지컬, 축구 지능, 대인 수비, 태클로 완전히 제압하는 수비수마저도 이탈리아에서는 점점 계보가 끊어지고 있다.

4.3 피를로 이후의 레지스타(regista) 단절

안드레아 피를로(Andrea Pirlo)는 단순히 볼을 잘 차는 미드필더가 아니었다. 그는 레지스타(regista), 즉 경기의 리듬과 공간 점유를 지휘하는 전술적 연출가였다. 레지스타는 수비형 미드필더와도 다르고, 단순한 플레이메이커와도 다르다. 이들은 낮은 위치에서 첫 패스를 공급하고, 압박의 방향을 바꾸며, 경기의 속도를 재편한다. 피를로 이후 마르코 베라티(Marco Verratti), 조르지뉴(Jorginho) 등이 부분적으로 그 기능을 수행했으나, 이탈리아 축구 전체가 그 역할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역시 구조의 문제다. 레지스타는 단순히 패스 센스가 좋은 선수가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많은 볼 터치와 실수 허용, 경기 이해 축적을 통해 길러지는 유형이다. 그런데 FIGC 자료는 이탈리아가 국가 차원의 유소년 매각 수익에서 주요국 최하위이며, 세계 상위 50개 유소년 아카데미 가운데 이탈리아 클럽은 아탈란타와 유벤투스 정도만 뚜렷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들 클럽과 인테르 이탈리아 내에서 사실상 몇 안 되는 리저브팀 운영 사례라는 점도 중요하다. 즉, 레지스타의 단절은 피를로라는 비범한 개인의 후계자가 없어서라기보다, 그런 유형을 숙성시킬 제도적 토양이 척박해졌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5. 전술 문화의 지체: 카테나치오(catenaccio)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화 속도의 문제

이탈리아 축구를 비판할 때 흔히 너무 보수적이다, 아직도 카테나치오에 갇혀 있다는 표현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만 맞는 진단이다. 실제로 현대 이탈리아 축구가 과거식 극단적 카테나치오에 머물러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리에 A는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전술적으로 복합적인 리그 중 하나이며, 빌드업 패턴, 맨투맨 압박, 백3와 백4의 전환같은 디테일에서는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세리에 A가 전술적으로 낡았다기보다, 현대 축구가 요구하는 산업적, 물리적 조건과의 결합이 약하다는 점이다. FIGC에 따르면 세리에 A는 평균 연령 27세로 유럽에서 비교적 나이가 많은 리그 축에 속한다. 여기에 U21 자국 선수 출전시간 1.9%, 외국인 비중 67.9%라는 수치는 리그가 높은 강도로 빠르게 세대교체를 수행하는 구조가 아님을 시사한다. Reuters는 2026년 챔피언스리그 맥락에서 이탈리아 축구가 젊고 역동적인 팀들에 비해 아이디어와 에너지 측면에서 밀리고 있으며, 흥미로운 유형의 선수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축구와 현대 축구의 괴리는 철학적 거부가 아니라 적응 속도의 문제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오늘날 최상위 축구는 전술 아이디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높은 수비라인, 전방 압박, 빠른 전환, 공격적인 윙백, 그리고 이를 90분 이상 반복할 수 있는 운동능력과 선수층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는 결국 재정과 인프라, 훈련 환경, 의료, 퍼포먼스 센터, 선수 영입 시장과 연결된다. 다시 말해, 이탈리아 축구는 전술 개념의 수준에서는 뒤처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리그 전체의 평균적 표준으로 구현하는 산업적 기반에서 뒤처진 것이다.

6. 국가대표팀(Azzurri)에 대한 귀결

클럽 축구의 구조적 약화는 결국 국가대표팀에 누적된다. 이는 단순히 좋은 선수 몇 명이 부족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대표팀은 리그가 만들어낸 선수군의 총합이다. 세리에 A에서 이탈리아 선수, 특히 젊은 이탈리아 선수가 충분한 시간을 뛰지 못하고, 창조적 2선 자원과 수비 리더, 중원 조율자가 체계적으로 길러지지 않는다면, 아주리는 결국 국제대회에서 전술적으로도 개성적으로도 밀릴 수밖에 없다. FIGC는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했고, 젊은 이탈리아 선수 기용 인센티브, 유소년 투자, 경기장 인프라 개선 등을 회복 방안으로 제시했다. 이 점에서 현재 이탈리아 대표팀의 부진은 감독 개인의 실패로 환원될 수 없다. Reuters가 전한 체페린의 발언 또한 같은 맥락이다. 그는 문제의 핵심을 선수 선발이나 감독 비난이 아니라, 이탈리아 축구를 떠받치는 인프라와 제도, 정치적 지연에 두었다. 결국 아주리의 위기는 대표팀이 약해져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표팀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리그와 시스템의 장기적 변화가 표면화된 결과다.

7. 예외적 성공으로서의 유로 2020: 구조적 쇠퇴 속에서도 우승이 가능했던 이유

여기서 하나의 반론이 가능하다. 만약 이탈리아 축구가 이미 구조적으로 약화되고 있었다면, 왜 아주리는 유로 2020에서 우승할 수 있었는가. 그러나 유로 2020의 성공은 앞서 서술한 구조적 문제를 반박하는 사례라기보다, 구조적 약점 위에서도 특정 조건이 일시적으로 정렬될 경우 단기 토너먼트에서는 정상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예외적 사건에 가깝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예선 10전 전승, 대회 전후 장기 무패 기록을 통해 이미 로베르토 만치니 (Roberto Mancini) 체제 아래 높은 완성도를 축적한 팀이었다.

그 성공의 핵심은 네 가지였다. 첫째, 만치니는 2018년 월드컵 실패 이후 대표팀을 보다 현대적이고 공격적인 축구로 재설계했다. 둘째, 조르지뉴 (Jorginho)를 축으로 한 레지스타 (regista) 기능, 니콜로 바렐라 (Nicolo Barella)의 활동량, 마르코 베라티 (Marco Verratti)의 탈압박이 결합된 중원은 점유와 템포를 동시에 지배할 수 있었다. 셋째, 조르조 키엘리니 (Giorgio Chiellini)와 레오나르도 보누치 (Leonardo Bonucci), 잔루이지 돈나룸마 (Gianluigi Donnarumma)를 중심으로 한 수비 코어는 토너먼트에서 결정적 안정성을 제공했다. 넷째, 이 팀은 일부 스타 개인이 아니라 26명 전체가 동일한 전술 모델과 역할 인식을 공유한 집단이었다. 다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로 2020은 구조적 부흥의 완성이라기보다, 한 세대의 전술적 완성도와 집단 응집력이 가장 이상적으로 맞물린 짧은 순간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우승 직후 2022년 월드컵 진출에 실패했고, 이는 유로 2020의 성공이 리그와 육성 시스템 전반의 구조 문제까지 해결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8. 결론

현재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과 세리에 A의 상대적 쇠퇴는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칼치오폴리 이후의 공신력 훼손, 전통 명가들의 장기 침체, 경기장과 중계권 구조에서의 자본 열세, 유소년 육성의 비효율, 자국 청년 선수 출전시간의 극단적 부족, 그리고 현대 축구의 고강도·고속화 흐름에 대한 느린 적응이 서로 맞물려 누적된 결과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축구를 상징하던 판타지스타, 트레콰르티스타, 레지스타, 세계 최고의 센터백 계보가 점차 희미해졌다.

그러므로 오늘의 이탈리아 축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키워드는 전통의 소멸이 아니라 전통의 재생산 실패다. 세리에 A는 여전히 역사와 전술의 깊이를 지닌 리그이며, 인테르, 나폴리, 아탈란타 같은 예외는 그 잠재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스템 전체로 보면 이탈리아는 더 이상 과거처럼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축구 강국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현재 이탈리아 축구의 위기를 단순한 슬럼프가 아니라 구조적 쇠퇴로 규정하게 만든다.

참고 자료

유벤투스 강등 이후 수익 감소

https://www.mondaq.com/uk/industry-updates-analysis/61472/deloitte-annual-review-of-football-finance-highlight

Deloitte 머니리그 2026 이탈리아 클럽 순위, 및 매출 자료

https://www.deloitte.com/uk/en/services/consulting-financial/analysis/deloitte-football-money-league.html

이탈리아 축구 연맹 보고서 (외국인 비중, U21 선수 출전시간, 이탈리아 평균 연령, 유소년 투자 등)

https://www.figc.it/en/figc/news/the-report-on-the-state-of-italian-football-has-been-published-pmhn7ati

세리에A 중계권 관련 자료

https://www.reuters.com/sports/soccer/soccer-serie-looks-media-platform-right-sale-faces-stalemate-2023-10-11

잉글랜드 2부리그 경제적 지표 자료

https://www.deloitte.com/uk/en/services/consulting/research/annual-review-of-football-finance-football-league-club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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