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로 보는 정의란 무엇일까?

데스노트, 몬테크리스토, 위키드, 디어 에반 핸슨, 시카고, 레미제라블

by 최인성

뮤지컬은 음악과 연기, 무대 예술이 합쳐진 장르이다. 사람들은 음악, 연출, 스토리, 배우, 작품성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뮤지컬을 좋아할 것이다. 나는 음악과 스토리가 합쳐졌다는 부분에서 뮤지컬을 좋아한다. 그런데 뮤지컬은 단순히 이것에서 끝나지 않고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준다. 앞으로 내가 서술할 6개의 작품은 단순히 스토리가 재밌다 음악을 잘 만들었다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는 감상평 외에도 관람을 끝낸 후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을 남겨준다. 이 작품들을 하나씩 되짚어보면서 정의의 불편한 이면들을 그리고 어떤 것까지 정의일까?라는 생각을 같이 해봤으면 한다.


1. 데스노트 사적제재는 정의일까? 정의를 구현하려다가 왜 악인이 되는가?

뮤지컬 데스노트는 정의가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타락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야가미 라이토는 우연히 데스노트를 손에 넣은 뒤 범죄자를 죽이며 세계의 신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출발점은 나쁘지 않았고 라이토의 캐릭터 설정도 따듯한 오빠이자 아들 그리고 정의를 구현하는 경찰 공무원이 되고 싶은 학생이다. 범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의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인데 데스노트를 손에 넣어 범죄자들을 마구 죽이다가 본인을 향한 수사망이 조여오자 자신을 잡으려는 수사관들 까지 다 죽여버린다.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처형하는 사적 제재는 과연 정의일 수 있을까? 라이토가 흉악 범죄자들만 골라서 벌했다면, 아마네 미사의 부모를 살해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법의 심판을 빠져나간 살인범만 죽였다면 정의로운 사적 제재를 가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키라로 불리면서 경찰의 의심도 받지 않고 본인을 잡으려는 수사관과 경찰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라이토는 데스노트로 범죄자를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지만, 그 순간 이미 법 위에 선 존재가 되어버린다.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지 결정하는 권력을 독점하는 순간, 정의는 공공의 기준이 아니라 개인의 판단으로 변질된다. 또 라이토를 쫓는 천재 탐정 L 역시 완전히 정의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L은 라이토를 잡기 위해 범죄자를 미끼로 사용하고, 인간의 생명을 수단으로 활용하는 선택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윤리를 지키는 정의라기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해 살인이라는 수단을 정당화하는 위험한 정의다. 이 부분을 데스노트 극 중에서 라이토의 아버지와 경찰들이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결국 데스노트는 라이토와 L을 단순한 선악 구도로 나누지 않는데, 작품에서 라이토는 정의를 구현하다 악이 되는 사람, L은 정의를 위해 비정의를 선택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로 그려진다. 왜 라이토는 정의를 구현하려다 스스로 악마가 되어버렸을까? 는 한번 생각해 볼만한 질문이다. 그는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오류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했기 때문이다. 정의, 권력은 원래 끊임없이 견제받고 진화해야 유지되지만, 라이토는 스스로의 판단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신념에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규정하며 제거하고,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 역시 제거하면서, 그의 정의는 점점 더 폭력적이고 폐쇄적인 형태로 변해가고 라이토는 극이 진행될수록 흑화 한다. 결국 라이토의 타락은 권력 그 자체가 아니라, 견제받지 않고 폐쇄적인 생각에서 비롯된다. 데스노트는 묻는다. 사적 제재는 정의인가, 더 큰 정의를 위해 희생은 정당한가, 그리고 정의를 완벽하게 구현하려는 시도는 왜 반드시 파멸로 이어지는가. 이 작품이 내리는 결론은 명확하다. 정의와 권력을 독점하는 인간은 더 이상 정의로운 존재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가장 강한 욕망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빠르게 괴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사적 제재는 일시적으로 정의를 구현하지만, 스스로 심판받고 견제받지 않는 정의는 그저 책임지지 않는 권력일 뿐이다.


2. 몬테크리스토 : 사적 제재 복수는 어디까지 정의가 될 수 있는가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의 전체 내용이 사적 제재의 실현이라는 점에서는 데스노트와 닮아 있지만, 그 본질은 전혀 다르다. 주인공 에드몬드 단테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14년이라는 아까운 세월을 보내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이별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채 복수를 결심한다. 단테스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보낸 그의 친구들은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승승장구한다. 법이 권력과 유착되어 진실과 정의를 외면할 때, 단테스는 스스로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되어 법을 대신한 심판관을 자처한다. 여기서 단테스의 사적 제재는 라이토의 사적 제재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는데, 라이토가 불특정 다수의 범죄자를 처단하며 스스로 절대적 기준이 되려 했다면 단테스의 행보는 철저히 자신이 신뢰하던 배신한 친구들에 대한 치밀한 복수이다. 그래서 그의 복수는 도덕적 정당성을 어느 정도 획득하며 관중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배신자들은 실제로 젊은 단테스의 14년이라는 시간을 빼앗고 사랑마저 빼앗아 가고 추악한 범죄를 저질러 승승장구했으며, 법은 그들을 단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데 복수는 점점 정교해지고 잔혹해지면서 단테스의 복수는 단순히 배신자들을 벌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단테스가 죽은 줄 알고 그리워하며 괴로워했던 사랑의 대상 메르세데스, 그녀의 아들이자 마지막에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알버트, 알버트의 약혼녀 발렌타인까지 죽을뻔하며 무고한 인물들이 고통에 휘말리게 만든다. 이 부분부터 몬테크리스토는 사적 제재의 가장 본질적인 한계를 드러내는데 복수는 출발점에서는 정당해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지속되는 순간 통제할 수 없는 감정으로 변하고 복수와 관련 없는 무고한 사람까지 해친다는 것이다. 알버트의 아버지로 나오는 몬데고, 발렌타인의 아버지 빌포트 이 둘이 잘못했다고 그들의 자녀가 피해를 받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극의 마지막에서 에드몬드 단테스는 메르세데스의 간절한 설득과 알버트가 자신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피의 복수를 멈춘다. 몬테크리스토의 결말은 사적 제재에 대한 가장 성숙한 답변을 내놓는다. 단테스는 복수의 완성이 아닌, 그는 자신의 분노가 사랑했던 여인과 죄 없는 청년 (사실은 친아들이지만)의 삶까지 짓밟고 있음을 깨닫고 복수의 중단을 선택한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묻는다. 피를 피로 씻어내는 것이 진정한 정의일까? 몬테크리스토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복수는 정의인가? 그 답은 절반만 긍정적이다. 복수는 이해될 수는 있지만, 완전히 정당화될 수는 없다.


3. 위키드 : 패배자가 악으로 기록되는 것이 정의인가?

뮤지컬 위키드는 우리가 오즈의 마법사에서 알고 있던 서쪽의 나쁜 마녀라는 존재를 완전히 뒤집는다. 엘파바는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오히려 체제의 부정함에 맞서 싸운 인물이다. 작품 속에서 오즈의 지배자인 마법사는 실제로는 마법을 쓰지도 못하는 사기꾼이며 외부의 적이 필요하다며 동물들의 권리를 억압하고, 만들어진 공포를 조장하며 권력을 유지한다. 엘파바는 이 부조리를 목격하고 그것을 폭로하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녀는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히고 도망자 신세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엘파바는 실제로 악행을 저질러서 악마가 된 것이 아니라, 위키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체제에 의해 악마로 규정된 것이다. 극 중 캐릭터 마담 모리블은 엘파바에게 마법을 가르쳐주지만 부조리를 폭로하려 하지만 본인의 권력과 언론을 이용해 엘파바를 악마로 만든다. 그녀의 패배는 단순한 개인의 실패를 넘어 악의 세력이 힘을 합해 권력과 언론을 장악해 승리한 결과이다. 몬테크리스토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대사처럼, 극 중 승리자인 오즈의 권력은 엘파바를 서쪽의 사악한 마녀로 기록하고 그 이미지를 대중에게 주입한다. 위키드의 또 다른 주인공 글린다는 엘파바와 진짜 친구가 되었고 오즈의 마법사 실체도 같이 알게 된다. 글린다는 엘파바가 정의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제 안에 남아 착한 마녀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러면 글린다는 왜 엘파바의 정의로운 행동을 보고 침묵했을까? 글린다는 단순한 배신자가 아니라, 체제 내부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현실적 선택을 한 인물로 그려진다. 다만 글린다는 마담 모리블을 감옥에 보내고 마법사가 엘파바의 친부라는 사실을 알게 하여 그를 무너뜨려 엘파바의 복수를 대신한다. 그런데도 엘파바의 진실을 대중 앞에 공표하지는 않는다. 대중에게 본인이 착한 마녀로 기억되기 위해 진실을 묻어버린 행위다. 이는 체제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악과 선의 구도를 유지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타협이다. 결국 위키드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한데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누가 정의를 정의하는가이다. 우리가 믿는 정의가 어쩌면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들이 교묘하게 가공해 낸 이야기일 수도, 누군가 누리는 정의로운 평화가 사실은 철저히 악으로 매도당한 타인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결과물일 수 있다는 냉혹한 진실 말이다. 엘파바는 정의로웠으나 패배했고, 그 대가로 악이라는 이름을 영원히 짊어지게 되었다.


4. 디어 에반 핸슨 : 선의의 거짓말은 정의가 될 수 있는가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은 앞선 작품들과 달리, 거대한 권력이나 사적제재가 아니라 아주 개인적인 거짓말에서 출발한다. 주인공 에반 핸슨은 불안 장래를 가진 외로운 소년이고, 그는 스스로에게 쓴 편지가 자살한 학생 코너의 유서로 오해받으면서, 얼떨결에 코너의 유일한 친구였다는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 거짓말은 처음에는 의도된 사기가 아니라 상황을 회피하려는 선택에서 시작되지만, 이후 점점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된다.

결국 이 상황을 유지하기 위한 거짓말을 계속하게 되며 명확히 선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위로 발전한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상처 입은 코너의 가족은 에반이 지어낸 가짜 추억을 통해 생전 느끼지 못한 위로를 얻고, 소외됐던 소년 에반은 처음으로 학교 공동체의 중심에 서며 사랑하는 조이와 연인이 된다. 이 지점에서 질문이 생긴다. 이 거짓말은 나쁜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행복과 위로를 주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좋은 결과를 만들었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는가. 작품은 단순히 거짓말은 나쁘다는 도덕책 같은 결론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는데 그 행복은 실제로 존재했지만, 동시에 완전히 허상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는 점이다. 에반의 거짓말은 타인을 위로한다는 명분을 가졌지만, 그 이면에는 소외된 자신을 채우려는 지독한 인정 욕구가 결합되어 있었다. 선의로 시작된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타인의 현실을 왜곡하고 나의 이익과 맞물리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선의가 아닌 사기가 된다. 그리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 모든 관계와 감정은 무너진다. 결국 이 작품이 말하는 정의는 결과가 아니라 진실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에 가깝다.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한 거짓말이 일시적인 안식을 줄 순 있어도, 진실이 없으면 지속될 수 없음을 그리고 선의로 시작된 거짓말이라도, 그것이 타인의 현실을 왜곡하고 스스로의 이익과 결합되는 순간 더 이상 순수한 선의라고 볼 수 없음을 보여준다. 디어 에반 핸슨은 묻는다.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한 거짓말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거짓이 만들어낸 행복은 과연 진짜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진실 없이 유지되는 행복은 결국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정의란 단지 좋은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 또한 정당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5. 시카고 : 대중들은 만들어진 쇼와 자극적인 것만 찾고 정의엔 관심이 없다

뮤지컬 시카고는 정의가 무너지는 순간을 그리지 않고 오히려 더 불편한 진실 처음부터 대중은 정의에 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주인공 록시 하트는 남편 몰래 만나던 불륜 상대를 총으로 쏴 죽여 감옥에 간 살인 범죄자이다. 1920년대 미국 변호사 빌리 플린은 록시를 변호하기 위해 록시를 불쌍한 서사를 가진 캐릭터로 위장하여 거짓 쇼를 펼치고 기자들은 자극적인 스토리를 퍼 나른다. 이속에서 대중들은 진실과 정의보다 자극과 재미만 쫓아다닌다. 이 살인 사건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록시 하트는 분명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지만, 그녀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죄의 무게가 아니라 빌리 플린이 만든 이야기의 흥미로움이었다. 빌리 플린은 정의로운 변호사가 아니라,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기자들을 이 연출로 가지고 노는 선동가나 사기꾼에 가깝다. 그는 사실을 밝히는 대신 감정을 설계하고, 언론을 이용해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 록시는 치정에 휘말린 불쌍한 여자라는 캐릭터로 재탄생하고, 법정은 정의를 가리는 공간이 아니라 빌리 플린의 무대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판사나 배심원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소비하는 대중과 더 팔리는 이야기, 더 자극적인 장면을 써서 퍼 나르는 언론 그리고 이 거짓 스토리를 만드는 빌리 플린이다. 결국 이 세계에서 정의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선택받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 진실이고 옳은지 보다 무엇이 더 흥미로운지, 자극적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그 선택이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록시의 무죄는 법의 승리가 아니라, 이야기의 승리다. 이 작품의 배경은 100년 전인데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똑같다. 정의는 설명과 증명을 필요로 하지만, 쇼와 거짓은 감각만으로도 소비된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더 후자를 선택한다. 결국 시카고가 말하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냉혹하다. 정의는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정의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언제나 더 자극적이고 더 소비하기 쉬운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는 가십거리들이라는 점이다.


6. 레미제라블 : 법적인 정의(자베르) vs 인간적인 정의(장발장)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정의를 둘로 구분하고 비교한다. 하나는 법이 말하는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느끼는 정의다. 자베르에게 정의란 명확한데 법은 절대적이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곧 정의다. 그는 질서를 믿고, 규칙을 믿고,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수년을 감옥에서 보낸 장 발장을 끝까지 추적한다. 그의 시선에서 보면, 장 발장은 선한 사람이 아니고 법을 어긴 범죄자일 뿐이며, 그 사실 하나만으로 판단은 끝난다. 자베르는 판단은 사실 틀리지 않았다. 자베르는 부패하지 않았고,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특혜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자베르는 완벽하게 공정한 존재에 가깝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완벽함이다. 장 발장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를 보여주는데 한때 그는 죄인이었지만, 다시 살아가기로 선택하고, 타인을 돕고, 자신보다 타인의 삶을 먼저 생각한다. 그는 법을 어겨 감옥을 다녀왔지만, 사람을 살린다. 자베르는 법을 지켰지만, 사람을 보지 못한다. 이 둘의 대비는 단순한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다. 오히려 두 가지 정의가 서로를 부정하는 구조다. 법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을 놓칠 수 있다. 반대로 인간적인 정의는 사람을 살리지만, 법을 흔들 수 있다. 작품의 가장 중요한 순간은 후반부에 나온다. 혁명 도중 장발장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숙적 자베르를 살려 보내 인간적인 자비를 베푼다. 여기서 자베르는 범죄자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 후에 하수구에서 자베르가 다시 장 발장을 잡으려 하지만 고민 끝에 장 발장을 놓아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 순간 자베르는 처음으로 깨닫는다. 법이 항상 정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세계가 무너진다. 법을 버리고 인간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법을 지킬 것인가. 그의 오랜 가치관과 정의관이 무너지고 그래서 스스로 삶을 끝낸다. 레미제라블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두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법만으로는 정의가 완성되지 않고, 인간만으로도 정의는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만약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우리는 원칙주의자 자베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장 발장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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