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동안 물을 틀어놓았다. 어제 수건을 빨아놓고는 건조기에 넣는 걸 깜빡한 거다. 혹여나 위생에 문제가 있을까 락스 희석액을 넣어 한 번 헹구려고 했다. 대야에 물을 틀고는 락스를 한 컵 부었는데.. 그 잠깐을 못 기다려 딴짓을 하다 영영 잊은 거다. 락스가 도시에서 사라지고도 바다까지 닿았을 5시간 동안 말이다. 고작 고 아무것도 아닌일을 아무것도 아니게 잊고 있다.
마음도 몸도 회색이 되어 배경 속에서 아우성만 쳤다. 눈에 띄지 않으니 누구도 거들떠볼 수 없었고 나도 내 존재가 무의미해지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층간 소음을 피해 집에서 도망을 쳐야 했다. 그게 어디든 중요할 수도 없다. 다급한 마음에 경력도 적성도 없는 계산원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헐레벌떡 들어간 슈퍼는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던 사람들이 내미는 손에 마음이 색을 갖기 시작했다.
내가 만나는 사람으로 내 존재가 정해지기 시작하는것 같은 기분. 나도 색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게 기억난다. 자존감이 생기는 날도, 오랜 친구 같은 사람을 만난 날도 있었다. 눈물을 쏙 빼는 사람을 보는 날도, 우울해지는 날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사람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사람이 상쇄시켜 주었다. 그렇게 슈퍼는 내게 활기를 주었다. 내미는 손을 외면하지 않자 웃을 힘이 남아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매일 길에서 병을 주워 오는 아주머니가 계시다. 본인은 슈퍼에서 사 마신 것이라 한다. 하지만 누구도 슈퍼에서 판 기억은 없다.
추석 대목이었다. 일주일간 업체에서는 병수거를 하지 않는다. 바쁜 대목 장사에 한가하게 빈병 수거까지 하지 못하는 거다. 공지를 띄웠다. 수거 금지 기간이며 이유까지. 공기기간에 혹여나 번거로운 일이 있을까 공지 기간 일주일 전부터 병을 가져오는 분께 미리 알려드렸다. 물론 그 아주머니께도. 다행인 건 "모르겠다"하지 않고 규칙을 지켜주었다. 고마운 부분이다.
이러다 몸살 나지 싶은 추석 대목 기간이 어느새 끝이 났다. 슈퍼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가한 며칠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추석기간 동안 모아놓았던 공병을 어떻게든 현금화시키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으리라, 아주머니께서는.
공병 수거는 한 명당 30병. 아주머니는 슈퍼가 4 교대라는 걸 알고 있었나 보다. <오픈조> 알바가 일 하는 동안 병을 바꾸어 갔다. <오전> 알바가 일 하러 오자 또 30병을 가져온 거다. 안된다고 하자 언성이 커진거다.
"니까짓 게 뭔데, 된다. 안된다냐. 너거들 내가 다 잘리게 할 거다. 이 ㅇ%%^##@@#%^@"하며 몇십 분을 욕을 하며 실랑이를 벌였다며 출근 하자 쪼르르 알려준다.
"아이고, 고생했네" 말해주자
"언니도 그분 오시면 이제 바꿔주지 마세요. 그분은 공병 이제부터 아예 안 바꿔주기로 했어요"한다.
"그래, 그러면 나도 편하지. 올 때마다 좀 조마조마하던 참이었다" 하며 이대로 끝이나길 내심 빌었다.
팀장, 과일 직원과 교대 전 계산원까지 여자 3명이서 억센 아주머니랑 씨름한다고 고생꾀나 했는지 2번 온 아주머니 얘기를 며칠을 하며 충격적인 상황을 설명한다.
어제.
"이삐야. 추석 잘 보냈나. 병 가져왔다. 오늘은 15개만 가져왔다. 세어봐라."
"지난번 문제로 슈퍼에서 손님께 공병 반품 안 받는다는 사장님 전달사항이 있었어요. 그래서 병을 못 받겠네요."
"아니다. 내가 아니, 너거 사장이랑 얘기했다. 괜찮다. 내일부터 안 그럴게. 이제 안 그러기로 했다. 그냥 돈 주라"
"저희는 시키는 일 하는 사람이라 안된다고 하면 힘이 없어요."
"아이고 괜찮다. 내가 너거집에 얼마나 팔아주는데. 너거 사장하고도 잘 안다. 내 바쁘다. 집에 손님 기다린다. 얼른 가게 돈 달라니까"
"..."
"너거 사장이랑 내가 한 집안이다. 내가 너거 사장 잘 안다."
"그러면 사장님과 통화를 해 보세요. 저희는 권한이 없어요."
"내가 전화기를 잃어버렸다. 전화기가 지금 없다. 전화를 못한다. 그만 주라."
"전화 연결해 드릴게요"
마침 사장이 들어온다. 사장님 선에서 깔끔하게 정리가 되길 기대하며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후 병을 다시 내려놓으며 아까 그 상황이 재현이 된다. 사장님은 들어오지 않는다.
"너거 사장이랑 얘기했다. 15갠데 천 원만 주라. 아까 얘기하더라."
"사장님 오시면 확인할게요"
"너거 사장 누구 만나러 간다더라. 안 온단다."
"이거 얼마예요?"
"네. 23,000원입니다"
"어, 아줌마 나한테 천 원만 줘. 내가 이거 받아야 돼."현금을 내려는 손님의 돈을 뺐는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경찰 부를게요."
"야이 #%%^#%#^&&"너무 길어서 쓸 수가 없을 만큼 욕이 이어졌다. 충격적인 상황에서 동영상으로 남겨야 나중에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전화기를 들자 부리나케 공병을 들고 도망을 간다. 가면서도 욕은 꼬리가 길었다.
나도 인생 살면서 산전수전은 겪은 거 같은데 어깨가 뭉쳐오고 가슴이 답답하다.
옆에서 이 상황을 모두 지켜봤던 손님들이 몰려와 한 마디씩 한다.
"괜찮으세요? 남자 직원 한 명 있어야겠어요. 너무 무서워요. 세상 너무 흉악하다."고개를 절래 절래 젓는다.
"그죠? 슈퍼 관리차원에서 직원이 한 명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네요. 저밖에.."
"일 그만두시는 거 아니에요? 오늘 인사 나눠야 해요?"다른 단골손님이 못 보나 싶어 걱정을 하신다.
"아. 손님께는 제가 따로 인사드릴게요. 당장 그만두기야 하겠습니까?"
"대단하세요. 저런 사람 처음 보네요. 와. 진짜 대단하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래요?"오늘 처음 보는 분인데 눈에 걱정이 한가득한 상태로 말씀을 하니..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해서 괜히 뭐 빼먹은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그런데 평정심은 잘 안 돌아오네요. 마음이 흔들려서 계산이 잘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진짜 너무 놀라셨겠어요. 옆에서 보고만 있는데도 아휴.."
갑자기 인싸, 연예인, 임은정검사님 아니 유명인이라도 된 것같다. 모든 분들의 걱정과 다독임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렇다고 니가 낄 자리는 아니다. 눈물아 주책 부리지마라.' 명령을 했다.
자꾸 손이 떨려 마감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결국 잔돈 계산을 잘 못했는지 1,100원 모자랐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사장님은 그 아주머니를 피해 슈퍼를 돌아 들어와 있었다. 이 상황을 사무실에서 CCTV로 보고 있었던 사장님. 교대시간이라 돈통을 들고 온 팀장은 줄 서 있는 손님의 계산을 해 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아수라장을 버려놓고 사무실로 도망을 가버렸고. 지난번도 지지난처럼.
내가 그렇게 슈퍼우먼. 슈퍼의 대표자였나?
직원을 보호하지 않는 사장은 내 상사가 아니다. <이곳은 이런 점이 문제가 있습니다> 하며 애정을 보일 필요도 없다. 만나서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다 내 상황을 설명할 값어치도 없다. 알면서 날 방패로 이용했으니. 지난번 30일까지 일을 봐주겠다 얘기한 주임님을 몇 일 일당 주기 싫어 15일 정산일에 바로 잘라버린 사장님이다. 그 시끄러운 상황을 다 보고도 위로 한마디 없는 사장에게 문자를 했다. 위경련으로 침대에 누워 감정을 뺀 메시지를.
남편이 12월부터 일을 도와달라고 한 상황이라 조만간 그만두겠구나 했지만 이렇게 당겨질지는 몰랐다.
그만두려 마음먹으면서도 생각나는 건 그 수많던 손님들뿐이었다. 보고 싶을 거다. 다시 만나고 싶을 만큼. 올 때마다 200원씩 안 가져와 내 카드를 쓰게 하는 앞집 콩나물 주셨던 할머니도. 까막눈이시라 목청껏 가격을 불러드려야 하는 귀가 어두우신 할머니도, 그만두지 말라며 큰 눈으로 날 바라보던 손님도. 처음 봤지만 좋아한다면 호감 표현도 해주셨던 이름이 특이한 여성분도. 장난이었겠으나 나 없으면 슈퍼 안 오겠다던 애기 엄마도. 가끔 앵무새를 데려오는 격하게 음식하기 싫어하는 여성도, 눈치 게임으로 농담 따먹기 하던 아저씨들도.. 모두 모두 그리울 거다. 생각날 거다.
슈퍼우먼의 업무는 오늘로 종료를 알립니다. 슈퍼는 또 새로운 우먼이 지킬 겁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을'질은 계속 이어질 계획입니다. 조만간 <oo>우먼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지금까지 슈퍼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시고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관심가져주셨던 많은 작가님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응원합니다. 끝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