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廢)라는 글자가 붙은 역

진주 문산 갈촌 폐역

by 노사임당

폐(廢)라는 단어는 <못 쓰게 되다.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폐역.

지하철 혹은 철도가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게 되면 붙게 되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사라지기도 합니다. 노선이 폐지되거나, 이용객이 급감해서, 역 간 거리 이동때문에 등등의 사유로 말입니다. 혹은 아주 뜸하게는 재개업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고 해요.



오늘은 날도 즐거운 수요일입니다. 직장 다닐 때는 "아직 이번주가 반밖에 안 갔다. 내일이 목요일 밖에 안 되었다" 하는 수요일이겠으나 프리랜서 주부인 저에게는 수요일은. 그냥 행복데이입니다. 월요일은 월요일이라서 주말에 아이들과 어디든 가느라고 밀린 살림을 중점적으로 해야 하고 화요일은 그러다 보니 바닥에 좀 앉아서 꾸벅꾸벅 밀린 잠도 보충하고 장도 보고 빨래도 마저하지요. 수요일 정도되면 기운이 좀 나요. 돌아서보니 살림을 언제 했냐? 하고 집이 시비를 걸지만 까짓 껏 돌아서지 않으면 됩니다. 나는 했으니까요. 간단한 먼지청소 기타 등등 기타 등등만 하면 됩니다. 아니요, 아니요. 별거 없어요.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수요일이 옵니다. 돌아서지 않아도 면죄부가 있는 수요일이라서는 물론 아니죠. "그림 그리는 날이다"라서입니다. 세상에서 서른마흔다섯 번째로 제일 좋아하는 분들을 만나는 날입니다. 어쩌다가 이분들을 이렇게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압니다. 저에게 감투를 씌워주셨기.. "내가 짱이다! 내가 동아리반에 장이다!" 이기 때문이죠. 야망녀라서 감투에 욕심이 많습니다. 쫓겨날 때까지 막 즐길 겁니다. 제 마음대로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해도 다 들어주십니다. 완전 윤석열ㄷ입 (아니 그건 너무 심하네. 장난이라도 그러는 거 아니다.) 진주라는 도시에 삶을 키울 수 있도록 뿌리가 되어주는 고마운 분들. 사랑합니다.


오늘도 "네가 잘한다 니가 더 잘한다" 하며 서로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성추행적 대사를 연신 해대면서도 행복합니다. 그러니 마치고 <진주 길목 두루두루 고~!>할만한 곳 찾으러 가면서도 이미 기분이 좋습니다. 그게 이름도 서글픈 폐역에 가면서도 콧노래만 안 불렀지 이미 신이 나 있었습니다. 폐역의 폐기된 기억이나 추억이나 쓸쓸해진 길목은 소풍 간 아이가 왕의 무덤 보듯이 인 거죠. 화려한 영광도 부귀영화도 죽고 나니 그저 덩그러니 커다랗기만 한 더미 하나뿐인 과거 절대 권력자의 무덤에 올라가 미끄럼이나 타기에 신난 아이처럼요.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고 어디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랑'인 게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이고 인생에 애락(哀樂)은 내 기분 속에 있는 거군요. 서글픈 장소에 갔다고 슬픔이 내 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안 합디다. 오려다가더라고요.


그림을 그린 문산에서 9분 거리였어요. 동아리 회원분들께 갈촌 폐역이 어딘지 아냐고 물었을 때 한 분만 아셨어요. 그 정도로 좀 외지고 이용할 일이 없었을 만한 곳입니다. 진주와 '공룡의 도시 고성'의 경계지점 즈음에 있더라고요. 예전 남편이 일하던 사무실 근처라 좀 깜짝 놀랐습니다. 왜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살수록 느끼게 되나 몰라요. 엄마 말 들으면 자다 떡이 생기고 옛말 틀린 거 없다더니 말이에요. 예전에도 한적한 곳 중에서도 한적한 곳이라 그곳에 가게 되면 좀 시외 놀러 가는 것 같고는 했는데 오늘도 그런 기분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9분의 시간이었지만요. 저에게 다행히 길을 잃지 않을 만큼의 거리라 처음이었지만 잘 도착한 기적까지 일어났습니다. 사람의 기운. 즐거운, 행복한 감정이 주는 긍정적인 상태는 두려움을 극복하게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수시 넣었는데 하버드대 붙은 줄 알겠습니다. 왜 이렇게 신나 있죠? 근데요, 그게 여러분도 보면 아실 거예요. 가는 길에 마음이 즐거웠다는 것만이 모든 요인은 아니라는 걸요.

들어서자마자 든 생각은 "어머 뭐야. 내가 찾던 그런 곳이네!"입니다. 지난번 남문산역이 준 실망(?) 감 때문에 '가까우니 실망해도 가보자' 하면서 움직인 건데. 그냥 첫눈에 반했지 뭐예요. '내일도 모레도 가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심정을 표현한 한마디입니다. 자 그럼 같이 가요. <너무 좋다고 해서 같이 가서는 실망하는 거 아냐? 아 몰러~>


가깝지만 내비게이션 종업원을 불러내었습니다. 그러고는 단단히 일렀죠. "너! 오늘 또 나한테 덤비면 퐈이어야! 퇴사할 각오 해!" 하면서 갔지만 역시나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하고 덤비긴 하더군요. 참 내. 이제 더 부를 종업원도, 제 밑에서 일할 종업원마저 없습니다. 이 네비, 저 네비 다 지웠더니 "아 슬프구나." 차주 그러니까 한 차량 대표자의 고독. 그 누가 알아줄까.. 근데 오늘 뭐 실수한 거 없는데 그냥 버릇이 아닐까 혼자 생각했습니다. 아, 아니네. 출발하면서 바로 우회전하면 되는데 굳이 길을 또 빙 둘렀네요. 집으로 가는 쪽으로. 시동 걸고 엑셀에 발 올리자마자 경로 이탈이었습니다. 내버려두죠 뭐. 어쩌겠어요. 이젠 출발 구호라고 합시다.


"시니비! 갈촌 폐역 안내해!" "안내를 시작합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안 들림, 기분 좋음'


자동차 전용도로에 차를 올리고 직진만 하다 진주 지방도 1007호로 더 갑니다. 가는 길에 안전마을(이름 너무 귀엽다)도 지나고요. 갈곡마을도 지납니다. 가다 보면 다행히도 세거리가 딱 하나(?) 정도 나오는데 대부분은 직진만 하면 됩니다. 나올 때가 되었는데 또 얼마나 헤매어야 하나 불안감이 밀려올 때쯤 눈에 떡하니 보이게 됩니다.


안전마을에 9월의 봄이라는 카페가 있는데 머리가 하얗던 사장님 같은 분이 마당에 계셨어요.

목화가 탐스럽게 열려있더군요. 앙증 귀엽

경운기가 단체 주차된 경운기 주차구역

(진주) 갈촌 폐역

주차장도 역사 바로 앞에 선명하게 선으로 그어져 있어 정확하게 구획 안에, 아무도 없어도 넣어놓습니다. 내리자마자 한눈에 그림처럼 담깁니다. 단풍나무가 분위기를 한껏 화사하게 단풍 냄새를 풍겨 놓았습니다. 노란 비단길을 깔아놓아 폐역이 주는 으슥하거나 차갑게 식어버린 헤어짐의 기억은 빗질이 끝난 머리카락처럼 차분해져 있습니다. 그저.. 예쁩니다. 노란색이 주는, 운동신경을 활성화하고 근육에 사용되는 에너지를 생성한다는 그런 백과에 나올 지식이 아니라도 기분이 활성화되어 북돋워지더군요. 도로에서 올라가는 역사가는 계단도 어제까지 사람이 오른 듯 따스함이 쌓여있고요. 그늘이 생겨 차가울만도 한 뒷문 쪽마저 단풍잎 채도가 높아져 노랑이 더 깊어 보이기까지 하더군요.

마당에 모과나무가...

생뚱맞지만 저는 개를 무서워합니다. 물까 봐요. 길을 가는데 마당에 묶어 놓고 키우는 개들이 막 짖으면 혹시나 뛰쳐나올까 봐 무서워요. 그런 곳은 근처도 가기 싫어져요. 둘러가고 싶지요. 담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목줄도 안 한 개들은 쫓아오면서까지 짖거든요. 더 무서워요. 담 뛰어서 올 거 같아요. 아후.. 그런데 이곳은 개들마저 없네요. 콧속으로 들어오는 한적한 마을이 주는 깨끗한 공기, 눈이 시원해지는 자전거 도로의 끝없이 보이는 파란 선과 동행이라도 하듯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전깃줄 평행선의 어울림. 기차가 멈춘 폐역에 소음마저 소란을 멈추었어요. 제가 가서부터 들깨를 터는 농부 아저씨의 타작 소리가 조용한 마을에 이름 모를 새들과 배경음처럼 조용히 합을 맞추었습니다. 새들마저 소리 높이지 않고 화음을 넣는 곳이라니 첫인상이 좋아 또 이곳에 집 하나 사고 싶다 병이 도져.. 마을을 하회탈 같은 얼굴로 둘러보았습니다.

뒷문 앞에 역시나 택배 회사가 있었어요. 길에 비닐과 함께 피었있던 들꽃들.

조용한 마을과 집들.

감이 주렁주렁 열려있던 집

물소리도 이쁘고 착하게 들렸어요.

혼자 모르는 곳을 걸으면 당연히 드는 약간은 무섭고 생경할 생각들이 가까이 오지 않으니 고향길을 걷듯 제법 느긋하게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논에 물을 댈 때가 아니라서 개울마저 재촉치 않고 흐르는 듯 보였으니까요.

관계자외 출입금지. 따스한 햇살처럼 눈부시게 빛나던 은행잎의 노란빛

그래요. 오늘은 기차역이 있는 마을이 주는 이방인을 배척하지 않는 분위기와 조용하지만 결코 숨죽이거나 사라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던 진주 문산시 갈촌리 그곳에 있는 갈촌 폐역을 다녀왔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중간에 그러니까 폐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꽤 근사한 식당 카페 겸하는 곳. 호기심이 일더군요. 메뉴도.


이 계절 지금이 정말 이쁜 때이지 않을까?

그럼, 내일 번개로 갈촌에 그림 그러러 가야겠습니다, 오케이? (동아리 분들은 카톡 주세요!)

아..너무 멋져요. 역전 상회입니다. 아직도 가게에 물건을 파는걸보니 동네분들은 이용하는것 같았어요. 뭐든 사먹고 싶었는데..라면을 살 수도 없고. 그림자 한번 찍어보았습니다.



역 바로 앞에 역전성시를 이루었을 상회. 그림으로 남겨야겠습니다.

아! 오늘도 또 나가길 잘했다.


금요일 다 못 올린 사진과 글을 이어서..

자전거길을 달리던 두분의 동행자. 은행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에 욕심내는 분들이 없으니 그 자리에 그냥 놓여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