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굳이 통성명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여보게 그건 5만 원일세!
서로가 말이 없다.
굳이 눈 맞춤도 필요치 않다. 각자의 할 일만이 남았을 뿐.
목적은 하나다. 길은 열려있다. 한 발 한발 신중함이 느껴진다. 한 길만을 걷는 장인의 움직임 같다. 곧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어느샌가 신중한 발걸음에 비해 축지법이라도 쓴 듯 빠르게 눈앞에 와 있다. 잠시 놀랍긴 하지만 그간 보인 행동으로 미루어 충분히 예측 가능한 그것이다. 내 앞에 물건이 놓인다. 언제나 교환할 물건은 똑같다. 나는 그에게 하얗고 기다란 목을 가진, 풍만한 라인의 매끈한 피부를 가진 몸을 군말 없이 준다. 그는 나에게 얇고 외형은 하찮지만 기능은 대단한 물건을 준다. 서로의 거래는 완성형이며 만족스럽다.
1993년도 작 '용서받지 못한 자'의 크린트 이스트우드를 닮았다, 그의 미간은. 이발소를 언제 갔었는지 알고자 한다면 달력을 몇 장은 넘겨야 될 듯싶다. 그것이 오히려 그 남자의 작업을 은둔자만이 할 수 있는 은밀한 역작을 위한 준비일 거라 상상하게 만든다. 하얀 머리카락은 어디서 바람이라도 부는지 사방으로 거칠게 제 갈길을 개척 중이다. 마디가 유난히 굵은 앙상한 손가락은 희게 부풀어 있다. 장갑을 끼고서 예사롭지 않을 그만의 작업에 쉼 없이 움직였을 손가락.
이제 서로 목적을 이루었으니 뒤돌아 남남으로 있자. 말없이 맺어진 약속인 만큼 불만은 없다. 안녕. 어라? 헤어질 줄 알았으나 갑자기 뒤돌아서 서두른다. 약속을 잊은 건가? 조항이 늘었을 뿐 약속이 깨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것들을 빠르게 넘겨본다. 선택을 마친 자는 다시 허락이라도 구하듯 내 앞으로 돌아온다. 그는 나에게 나는 그에게, 완결을 위하여 다시 절차에 들어간다. 가져온 그것을 고이 접어 그 앞에 놓아둔다. 그에게서 받은 것은 내 자궁 앞 검은 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우린 한 번도 대화를 한 적이 없다. 말은 언제나 나만의 것. 헤어짐을 위한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다. 그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다시 안녕. 입을 떼 절차를 마무리하... 려는 찰나.
"5만 원"
"예?" 당황스럽다. 그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말이란 것은.
오래 이어져 오던 거래가 한 번의 실수로 깨어져버렸다. 그는 입을 열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고 신비의 나라로 다시 갈 수 없다. 내가 그를 현실에 떨어뜨려버린 거다.
사진을 잘 못찍었네. 뚱뚱한 큰병 금곡이는 밑에!현실세계의 그는 5만 2천 원을 주었으나 나는 12,000원을 받았으리라 지레짐작(그는 주로 딱 맞게 돈을 주므로)하고는 안녕히 가세요라며 거래를 종료시켜 버린 거였다. 하, 나의 신비로운 장인은 그렇게 인간노동자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미안하고 죄송하고 송구하다.
"아! 죄송합니다. 여기 거스름돈 4만원입니다. 안녕히 가세요"인사를 하고 보내드린다. 우리 신뢰관계에 영향이 없길 바랄 뿐이다.
마스크를 쓰고 할리우드 배우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하얀색 큰 병 금곡막걸리 4병을 손가락에 걸며 만원을 주고 가던 그가. 한국의 전통 일복이라고 부르는 몸빼원단. 기하학무늬 냉장고원단 바지와 화려하고 예쁜 꽃이 그려진 폴리원단 티셔츠를 올 때마다 쇼핑하며 '집에 여자를 숨겨놨나? 집에서 혼자 여자복장을 하는 알고 보면 드래그퀸인가?'온갖 호기심을 만들어주시던 이름도 숫자도 없는 고객님. 언제나 혼자 "만원입니다. 비닐 필요하세요? 영수증 드릴까요? 고객번호 있으세요?"라며 메들리를 솔로 독창하게 만드는 고객님이 오늘 드디어 입을 열였다. 나의 실수로. '오만 원'. 단 한마디. 뭔가 영화라면 <너의 이름은>에 나오는 소년 타키처럼 퉁명스럽고 약간은 상남자같이.
그런데 그러든가 말든가 가만 생각해 보면 그 냉장고 원단의 옷은 그야말로 남자든 여자든 아무 상관이 없는 거 같다. 너무 시원해서 한번 입으면 벗을 수 없으니까. 집에 숨겨둔 여자에게 옷을 사준다느니. 혼자 여장을 하고 행복해하며 웃음 지을 거 같다느니 유치한 B급소설을 쉽게 만들어 내긴 했지만.
오늘도 막걸리 4병 그리고 일의 피곤을 조금은 덜어줄 시원한 신상 옷 한 벌을 사가지만 아무리 도구가 좋아져도 농부의 일은 끝날 줄을 모른다. 옷 하나 가볍고 시원해지더라도 막걸리 4병이 몇일간 목마름도 피곤도 조금은 덜어주더라도 오늘 또 농부의 밭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 오늘 집에가서 쌀밥 한톨 안남기고 콩나물 대가리 하나 안흘리고 모조리 먹어야겠다. 배가 고파 그런거 아니다. 숨도 안 쉬고 허겁지겁 먹는건 농부님께 고마워서 그런거다.
<즐거운 '을'질 생활>4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