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말이 있던데. 아무도 모르는데 혼자 뭐 하고 있다. 이런 느낌의 신(?)조어. 듣보(잡)이었나? 어어. 맞네.
에헴!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듣보아(줌마)! 오십에는 작가가 되고 싶은 노 사임입니다. 아하하. 하. 하. 아.. 아.
(뭐? 더 말해야 해요? 더 할 말이 없는데요? 아버지 어머니 성함하고 딸아이 성적이랑 남편 월급 말해요?)
음....
음....
그러니까.
어..
저기..
그래가지고..
저.. 어. 식은땀 좀 닦고 싶은데요.. 잠깐 갔다 와도 돼요?
자.. 작..ㄱ ㅏ 작. 가 못 하겠어요. 잉잉. 휘리릭.
글은 못 쓰겠는데 내년에는 작가가 되고 싶고. 작가가 되면 책도 한 권 내돈내책 말고 넘돈내책 내고 싶고. 그러면 위인이 될 것 같고. 그렇게 책 한 권 내도 변하는 건 없어서 절망도 하고 싶고. 나라는 인간 참 별 거 없구나 슬퍼도 하고 싶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쓰다 보니 나는 변했고. 이런 결론을 그려 보고 싶은 똥꼬 발랄 한창 귀여울 나이 마흔아홉 짤 노 사임입니다.
법적 나이는 묻지 마세요. 저는 한 살이라도 빨리 자자 자작 그.. 거 되고 싶거든요.
젊지만 젊은지 몰라 젊음을 낭비하던 20대, 다시 태어나듯 변화를 맞이하는 결혼과 육아 속 30대, "뭐야 벌써 마흔이야?" 하던 아니, 하고 있는 40대.
"마흔이면 진짜 늙은 거지.." 생각하던 어릴 때를 생각하면 이미 퇴물, 영감(옛날에는 이 말이 벼슬이었다고 하니 기분 나쁘지는 않겠), 꼰대 뭐 이런 단어와 합체가 될 것도 같지만. 마흔이 되어도 불혹은 부록처럼 따라오는 후회와 흔들림의 다른 말이지 결코 不惑은 아닌 것이란 걸 깨닫기만 합니다. 이렇게 흔들리다 보면 '흔들릴 몸체가 사라져서 불혹이 되는 건가?' 싶고 그렇네요. 정신만 남는 불혹이라.. 것도 말은 되네요. (내 몸이 내 소유가 아니니까요.)
어릴 때였어요. 십 대겠죠. 뭐. 이십 대에도 그랬을 수 있긴 하지만요. 47살 나이이던 아빠가 '젊늙'해 보이시는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저에게 아버지였으니 한 번도 어린이였던 적이 없으셨던, 제 기준에서는 본투 어른인 사람. 세팅파마 한 것 같은 굵은 웨이브의 장발을 한 고수머리 날씬한 '키다리 아버지'.
구멍가게 단칸방에 살 때예요. 푸세식 변소 앞 대충 갑바로 가려 놓고 샤워하던 화장실에서 벗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항상 '나이 많은 아저씨'였는데 팽팽한 아버지의 등은 약간 충격이었달까요? 아버지도 남자구나. 아직 젊은, 아름다운 나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마흔으로 살면서 가끔 그때 아버지를 떠올리면 기분이 이상해요. 그때 아버지보다 나이를 더 먹은, 그런 거 될지 몰랐던 아줌마가 된 지금. 시장에서 "아줌마"하고 누가 부르면 뒤 돌아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곤 합니다. 남이야 뭐라 부르든 속마음은 지금의 제 나이가 무척 소중하고 또 고맙고 "노치지 아늘 거예요." 하게 되거든요. 45살이 되니 '44살 때 너무 이뻤지'' 싶고 48이 되니 '47살 진짜 귀여웠지'.. 싶은 기분이 드는 겁니다. 47살이던 젊은 나이의 아버지처럼요. 그래서 조금 천천히 가고 싶은 거예요. 벌써 마흔아홉이라니.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인생에서 우리는 언제나 처음. 새로운 나이를 맞이합니다. 내가 열 살이 되다니. 내가 서른이 되다니. 내가 마흔이라고? 끝났다. 싶더니만 곧 오십이랍니다.
참, 그건 있어요. 이젠 나이 그런 거에는 흔들리지 않게 되는 거. 마흔도 오십도 예순도.. (자연스러워져라. 자연스러워져라...) 숫자가 주는 무게보다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주진 못한다는 점 정도요.
잡아볼게요. 의미 없겠지만.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지만. 일 년을 기록해 보려고요. 제 사십짤 마지막 한 해를요. 예쁠 나이 오십에는 사십구짤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언제든 손바닥에 올려볼 수 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