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하러 왔습니다.

넌 계산원이고 난 고객님이야!

by 노사임당

오늘따라 밴드상품이 한가득이다. 고구마, 포도, 감귤, 사과 4종류나 된다.



감귤 70 상자 수량은 사겠다는 예약자 50여 명. 고구마도 적지 않은 수량이라 바쁠 때는 한꺼번에 7명의 대기자는 충분히 만들 리스트다. 이러면 눈뜨기 힘들고 코는 숨쉬기 버거울 때가 온다. 마감시간에 한숨을 크게 쉬며 퇴근카드를 찍는 거다.


그래도 사람 없어 눈치 물(계산원인 나에겐 음료 외 취식 금지다) 먹는 거보다는 몸이 피곤한 게 낫다. 아무렴. 돈도 벌어줘야 하고 싶은 말도 할 권리가 생기지. 까칠한 을질녀는 할 말 해야 된다.


벌써 줄이 만들어진다. 먼저 금귤 4 상자, 머루포도 한 상자 우유, 대파를 산 손님이 카드를 낸다.


"두 번 계산할 건데요. 금귤이랑 우유 같이 해주시고요. 포도랑 대파 같이 해주세요."


밴드키를 눌러 상품을 찾고 일반상품은 바코드로 찍는다. 먼저 찍은 물건은 옆으로 모아두고 건네주는 전화기를 받아 삼성페이 결제를 한다. 남은 도 총으로 찍고 물건을 넘겨준다. 다가온 손님이 계산을 하려 한다. 결제기옆으로 전화기를 내민 고객님을 위해 찍을 수 있도록 삼성페이 키를 누르며 전화기 붙이는 곳을 안내해 드린다. '안녕히 가십사' 인사를 하고 물건을 가져가기 편하도록 모아 본다. 다음 손님은 '처음처럼' 소주 3병. 그다음 손님은 사과 1개 고구마 3개를 포함한 밴드 예약 손님이다.


원가에 판매를 하는 '밴드상품'이 있는 날은 손으로 일일이 기록을 해 놓는다. 중복이나 누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출근과 함께. 그 장부를 대조 확인해 가며 수량과 예약자명을 꼼꼼히 체크한다. 호객용 물건이라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출근하고 3주 정도 되었을 때다. 예약하지도 않고 예약하였노라 말을 하고 가져간 손님이 있었다. 나는 나대로 깨지고 사장님이 손님에게 전화를 하는 등 해프닝이 있었다. 그날 이후 좋은 게 좋은 '면대면' 확인은 불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새로운 예약자를 기록하고 수량을 봐야 하고 마감되면 창도 닫아야 하는 일이다. 규모는 '작은 탑마트'만 한데 동네 슈퍼다 보니 계산원은 나 혼자다. 실수할까 긴장은 되더라도 해낼만하다. 계산대 두 곳을 혼자 찍어가며 손님을 빠르게 줄인다. 아직 줄이 더 있어 바쁘지만 가능할 거다. 왠지 나 좀 잘하는 듯 뿌듯함까지 밀려온다.


밴드 손님들로 만원이던 계산대가 태풍이라도 지나간 듯 조용해진다. 잠시 숨을 돌린다. 수고했다. 커피도 한 모금 마신다.


그때, 아까 왔던 손님이 다시 방문한다. 계산을 두 번이나 했는데 살 것이 있나 보다. '오늘 자주 오시네요.' 말을 건네려 한다. 웃으며 친근함을 표하려는 찰나. 계산은 하지 않고 작고 이쁜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나온다.


"아까 왜 전화기를 직접 대라고 하셨어요?"

"예?"


계산이 잘 못 되었나 싶어 다시 묻는다.


"아니, 전화기를 왜 여기에다가 갖다 대라고 했냐고요"

"아.."

무슨 의도로 묻는 건지 잠시 생각해 본다.

왜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한 건 알려드려야겠기에 대답을 한다.



"고객님이 물건을 포장하는 곳에 계시면 제가 받아서 대신해 드리는데요. 고객님이 전화기를 내민 곳에 계산하는 기계가 바로 있기 때문에 안내를 해 드렸습니다만.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요?"

"아니, 그런 이유로 전화기를 대라고 하신 거예요?"

"네"

"참내. 제가 여기 3년째 다니는데 이런 대접은 처음 받네요. 계산원이 손님에게 직접 결제하라고 하나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잠시 멍해지면서 피부에 경련이 살짝 인다.


"그런 이유로 기분이 나쁘셨나 보네요? 아..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일단 손님 기분이 나빴다면 기분을 이해해 주고 풀어주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명 '분란 일으키지 않기'다. 사장님께 불공정한 일은 잘 말하지만 손님과는 싸우면 안 된다. 싸울 일은 사장님께 양보하는 거다.


허리를 굽혀 죄송하다 표현을 한다. 뒤에 줄이 3명이 있는 관계로 내가 참는다는 표정인지 더 이상 뱉지는 않지만 내리깐 눈으로, 창백한 표정으로 모멸감은 충분히 준 거 같았는지 계산을 한다. 같이 싸늘하게 비꼬아줬다면. 잘릴 때 잘리더라도 이런 비참한 수비가 아니었다면 털어버리기 좋았을 텐데. 단골이라 생각한 사람의 배신과 한없이 숙인 고개에 힘이 풀린다.


제로페이 한다고 전화기를 다시 냈는지 생각만 해도 기분 나빠지니 마그네틱 카드로 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이유 없는 대접병. 갑질이다. 공주병끼도 있지만 갑의 위치라고 생각해서 하는 것이니 갑질이 더 적합하지 싶다.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전화기 접촉식 결제가 늘고 있어 이런 계산은 흔해졌다. 나도 어디서 본 게 있어서 전화기를 흔하게 접촉해달라 한다. 그래도 '면소재지'니 허리를 굽히며 손으로 천천히 안내를 하여 혹시 모를 오해를 피하려 한다.


그 손님은 우리 슈퍼 아니면 장을 보지 않는, 충성고객이라서일까? 연예인과 이름이 같은, 얼굴이 단아하게 생긴 분이 외모로 나에게 질투가 나서는 아닐 테고. 내 행동에 흠잡을 것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있는데.


바쁘다 바쁘다 몸이 바쁠 줄만 알았지. 마음까지 바쁠 줄 몰랐다. 단골이라 생각한 반가운 손님이 갑자기 갑질 손님 되니 타격이 더 크다. 고객은 단골이라도 고객님이니 어디까지나 종업원의 위치에 있을 것. 손님 대접을 더 잘하라는 거구나 마음에 절구질이 인다.


참 좋은 분들을 손님으로 만날 수 있어 고맙게 보내는 하루하루다 생각했는데. 마음이 연두부처럼 물렁물렁해져 있었나 보다. 갑옷을 단단히 여미고 있으면 아무 감각이 없었을지 모르는데 말이다. 내 인생에 한 걸음도 가까워질 일 없는 사람 때문에 하루가 출렁이니 '감정차단' 기법을 다시 써야 할까 보다.


오늘 갑질녀는 다음에도 올까? 오늘의 행동을 민망해할까? 아니면 다음에는 '정신 차렸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를 째려볼까?



띵동.


사귄 지 일주일 된 애인처럼 행안부에서 또 연락이 왔다. 겁이 나서 차단은 못하겠지만 어쩌자고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쏘아대는지. 이럴 때 보니 일방적인 건 갑질녀만이 아니다.


글을 쓰는 지금 이곳 작은 도시에는 호의주의보가 내 맘속처럼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