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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Mar 21. 2024

약속을 지키려고요

시간 확인은 필수

며칠 수면시간을 채우지 못했다. 일어나자마자 목이 까슬하다. 5년. 아직 코로나도 감기도 한번 하지 않고 비실비실 견뎌온 것은 피곤할 틈을 주지 않는 철통방어. 엄청난 양의 수면에 건강 비결이 있었는데. 코는 줄줄 콧물을 준비하는 느낌인 데다 편도선도 부은 것 같다. 한동안 느끼지 못한 신호지만 익히 겪어 본 것들이라 감이 온다. 지금이 기로다. 몸을 도와 다시 컨디션을 회복하느냐 몇 주간 엉망진창 뒤죽박죽된 일상을 맛볼 것인가. 할 수 없다. 다시 돌아가야겠다. 출근이 '모두 끝난 후에' 한 시간 전에 내가 있던 자리로. 아. 이 맛이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중력과 맞서던 긴장이 스르륵 풀린다. 뱃살이 가장 먼저 중력과 조우한다. 점수 맞춘다고 적성에도 안 맞는 '과'에 원서 넣고 후회하듯 부지런 떨어보려다 부작용을 맛볼뻔하다니. 하던 대로 하자. 이렇게 좋은데…. 남들 쇼츠 보고 티브이 보고 커피 마시고 공부할 시간(다 필요한 시간 같은데...)에 체력 보충이나 하자. 잠이나 자자. 숙면으로 출발…. 드르릉.


따르릉

'어?'

여보세요!

일어나. 밥 먹어야지. 왜 톡도 안 보고 그래. 챙겨서 나와. 건호언니한테 밥 사달라 했잖아.

아. 그랬지. 알았어. 챙길게.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본다. 27분. 헉. 심 봉사 눈뜨듯 정신이 번쩍 든다. 1시에 불 건데 남은 시간은 30분 남짓. 아~ 조금만 일찍 깨워주지. 입이 튀어나오려다 다시 생각을 해본다. 밥 사줘 언제 볼까 어디서 보려고 하며 대화를 이어가는데 대꾸가 없었겠지. 기다리다 기다리다 도대체 잠적하였는지 없어지지 않는 숫자 '1'. 브런치 글 독자인 데다 우리 집 만 원짜리가 몇 개인지까지(29개 천 원 1개) 아는 지인이다 보니 '이 언니 또 잔다.' 감이 왔으리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놓치면 안 되는 일이 <누가 밥 사준단다>인 우리에게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오늘 생일이네? 밥 사라~" "딸이 전교 1등 했다는 소문은 들었다. 밥 사라" "남편과 주말부부 한다며? 밥 사든가" 하며 절대 놓치지 않아야만 하는 중요도 최상의 것인 밥 약속. 서로에게 밥을 얻어먹고 커피를 얻어먹기 위해 중상모략과 온갖 이벤트, 거리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는 무리. 거기에 내가 빠진다면 "다음에 다 모이면 먹어요~"하고 우아하게 퇴짜를 놓을 큰언니를 알기에 서둘러 전화를 했으리라. 어이쿠. 큰일 날뻔했다. 나 때문에 밥 못 얻어먹었다고 복수 당해 내 차례 올뻔했다. 깨워줘서 고맙네.


아이들이 바빠 안 볼 때는 한 달이고 반년이고 연락도 없다가 한 번 만나면 이렇게 반갑고 좋은데 우린 뭐 하느라고 얼굴도 안 보고 살았지? 하면서 또 주야장천 만나다가 돈 떨어지면 슬그머니 아. 이래서 우리가 안 만났지, 현실 인지 타임을 갖곤 했던 우리. 또 오랜만에 만남 주간이 돌아온 거다. 즐기자. 나가자. 다시없을 기회다. 큰언니가 밥 산단다.


생일 선물로 미리 내가 나 사준 원피스를 입고 눌린 머리를 예쁘게 감고는 내 최애 신발인 갈색 롱부츠까지 신고 한껏 봄 멋(롱부츠로?)을 내야지 생각한 계획이 틀어질 위기다. 밥이냐 멋이냐. 당연히 밥이지. 15분 안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한다. 일단 멋, 예쁜 머리는 포기. 차에서 롤을 말기로 하고. 서둘러 누웠던 흔적을 지운다. 세수하고 화장실을 나오며 잠이 묻은 물건을 벗고 계획한 옷들을 빠르게 주워 입는다. 계절에 맞지 않게 롱부츠를 신을 계획이니 윗옷은 입지 않아야 한다. 벌벌 떨어야 한다. 내복을 입고 목티를 입고 새로 산 니트 원피스와 새로 산 큰 치수 조끼를 걸치고 선크림과 눈썹 검댕 립글로스를 채점하듯 한 번에 쓱 문지른다. 백 미터를 하듯 부츠 굽으로 집을 박차고 나간다. 가방에 '칼키'와 작은 크기 책. 꺼내지도 않을 다이어리 그리고 입에 겨우 묻어있는 반짝임, 그걸 보충해 줄 립글로스까지 다 챙긴 걸 확인한다. 이 모든 건 15분 만에 이루어졌다. 완벽하게 꾸몄는데 15분 만에 완성이라니 키만 좀 더 크고 얼굴만 좀 더 이쁘고 몸무게만 좀 더 적으면 모델해도 되었겠다는 생각을 갑자기 하며 시동을 건다.


노 : 지금 출발할게요. 나왔어요. 한 명씩 태우러 집 앞으로 갈게요.

나머지 :.....

노 : 우짠겨? (대꾸가 없다) 다 먹고 간 겨?

하윤엄마 : ㅋㅋㅋㅋㅋ

노 : (다 먹고 가서)나갈필요 없는겨?(나 늦은겨?) 내는 왜 출발한겨?

하윤엄마 : 좀 이따 출발해

노 : 너거집부터 가는 중인데? 연락 줘. 놀이터에서 놀고 있을게.

민서엄마 : 벌써 나왔어? 1시 밥 먹는다는데?

하윤엄마 : 미리 만나 놀자

노 : (이제야 사태를 알아채며)어? 12시에 전화한 줄 알았지.

민서엄마 : ㅋㅋㅋ 준비할게. 잤나?

노 : 응. 머리도 안 감고. 칼키만 챙겨서 튀어나왔지

하윤엄마 : 내가 깨웠지

민서엄마 : 풉

노 : 왜 이리 바쁘게 전화했어

하윤엄마 : 카톡 확인 안 하길래 또 잔다 싶었지. 준비 시간 주려고. 나 빨래만 널고 나갈게. 10분만...

민서엄마 : 나도 나갈게 10분 만에 준비할게.


결국은 두 시간을 차에서(돈 아까워 찻집도 안 가고) 수다만 떨었다. 밥 한 끼 얻어먹으려고 두 시간이나 밖에서 벌벌 떤다며 서로를 비웃으며. 이 거지 근성들 어쩔 거냐며 서로를 신나게 놀려먹고 말이다.


오늘의 깨달은 점. 시간을 잘 확인하자. 분만 확인하지 말고 시간도 확인하자.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잖은가 말이다. 그리고 건물 있고 동산이 5개나 있으면서 맨날 자발적 거지 짓을 하는 무리(나 빼고). 어떻게 하면 서로를 좀 벗겨 먹을까 고민만 하는 우리지만 미리 나와줘서 무척이나 고마웠다. 뭐 집에서 나올 일이 없어서 불러주면 좋아하는 우리지만 순간 감동. 십 분 만에 튀어나와 줘서…. 포인트가 이게 아닌데 갑자기 약간 울컥했다는 말을 전하며 밥 얻어먹을 때만 서로를 잘 챙겨주는 밥도둑 포에버!

참 오늘 점심 맛있었어요. 언니. 잘생긴 아르바이트생이 커피 타주던 찻집도 꽤 좋았답니다. 땡큐. 근데~언제 또 밥 사주실 거예요?

꽃미남 커피남이 타 준 아포가토.  맛은 그닥이었다는ㅎㅎㅎ미모의 맛.



온봄달 스무하루 낫날 씀


*토박이말 알기*

알섬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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