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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울랍니다

또 뭐요?

by 노사임당

하고 싶은 게 많을 때가 있었다.




버킷리스트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던 때 같은데. 20세기 지구에서는 뭐라고 불렀더라? 소원? 기도 목록? 아! 죽기 전에 해야 할 뭐, 백 가지 쉰 가지 열 가지 한 가지 이랬던 것도 같다.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다.무중력 상태를 경험한다. 성냥없이 불을 피운다. 소젖을 짠다.(죽기 전에 꼭 해야 할 101가지 중) 뉴욕에서 햄버거 먹기. 빗속에서 키스하기. 베네치아에서 곤돌라 타기(죽기 전에 해야 할 100가지 중)> 이렇게 정해놓고 실천하는 '죽기 전'과 달리, 나의 끝나지 않는 그 목록은 몇 가지라 이름 붙일 수 없었다. 하루 만에 늘었다 줄었다 하는 어항 속 구피처럼 오늘은 이게 하고 싶다가 내일이면 저게 빠졌다. 이름값 하듯 하지는 않고 해야 하는 것들의 리스트 적기에만 바빴던 것도 같다. 상상임신을 하듯 하고 싶은 걸 하는 상상만으로도 만족감이 들었으려나. 실행력을 뒷받침할 경제력이나 적은 돈일망정 가진 것만으로 해 보는 일단 저지르는 과감한 용기가 부족해서일 거다.

그중에는 그림 그리기. 책 몇 권 읽기. 해외여행 어디 갈지 생각하려고 계획해 보기. 남자 친구 사귀기(진짜 적은 적이 있었나?) 백화점에 원피스 사러 가기(이건 퇴근 후 백화점으로 가 눈도장 찍으며 상상으로 풀었다) 노래. 피아노 한 곡 치기. 대금 불기. 팬플루트 배우기. 수영 배우기…. 하 숨차. 연기 배우기가 있었다.


슬쩍 끼워 넘기려고 적었는데 눈에 띄었는지 모른다. 연기를 배우고 싶었던 적이 있다. 연기. 왠 연기람...


어머니는 연기자였다. 김혜자보다 선배 연기자이며 이순재 보다 후배 연기자…. 는 아니고 매사 삶이 연기인 분. 언니가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남자를 데려오자 갑자기 시한부 투병 중인 사람이 되더니 얼마나 끔찍하도록 아픈 연기를 하던지 그 남자가 산꼭대기 우리 집에서 등산화도 안 신고 뛰어서는 우황청심환을 십 분 만에 사 오게 만들었고(형부가 보면 안 되는데). 시장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살 때는 뭐 이런 물건을 이런 가격에 파는 상도덕 없는 인간이 있냐 하는 표정으로 상인을 째려보면 그쪽도 초보는 아닌지라 아이고 알았다 알았다 못 이기는 척 가져가라며 싸게 주고는 했던 우리 엄마. 무대만 있으면 올라가 노래를 해야했고 상을 받아야 했던. 술 먹으러 오는, 잔술 500원어치 먹고 4시간 죽치고 영업 방해하는 죽돌이 알코올중독자마저 술 먹을 생각을 잊게 하는, 무시무시한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주정뱅이 아저씨가 바른 걸음으로 뒤를 보이며 ㅌㅌ를 하게 한 진정한 연기자였던 거다.


내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연기자를 보고 자랐으니 나도 피가 있지 않을까? 나도 저런 훌륭한 연기자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더라도 언젠간 되고 싶다. 연기 해보고 싶다. 어린 마음에 품고 지냈던 날이 있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벌어도 겨우 단소 배우러 다니고 팬플루트를 사고 미술학원까지는 끊어보았으되 연기학원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일. 그건 정말이지 밖으로 꺼낼 만큼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외모도 연기자인 사람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취미 혹은 도전이었던 것이었다.

그 당시 죽전해백(죽기 전에 해야 할 백 가지) 리스트는 자연 분해되고도 남았을 시간이고, 마음속에는 흔적이 없었는데….


도서관 홈페이지에 매일이다시피 접속한다. 새로운 인문학 수업이나 작가와의 만남이니 양질의 행사가 많이, 갑자기 한꺼번에 올라오곤 하기 때문이다. 매일 간다고 해도 어제 하루 안 가면 그날 정호영 작가와의 만남이 예약 종료고 캘리그라피 수업이 모집 끝인 상황이라 게으른자의 도전, 손가락과의 싸움. 빠른 판단으로 하는 클릭 싸움이나 마찬가지다. 보통 '패자'는 게임도 하기 전에 '나'로 정해져 버리곤 했는데…. 이번에 올라온 수업은 이름이 특이했다. 글쓰기 수업도 그림 가르쳐주는 수업도 모집과 동시에 종료되는 수업과 결이 조금 다른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그건.


<나는 배우다> 두둥


중의적인 표현이다.

'도서관에서 하는 수업이지요? 나는 뭐든 배운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싶으면 자유롭게 하시는데요. 아시다시피 이건 누가 봐도 제대로 된 배우 수업, 아니지요! 수박 겉핥기식으로 할 겁니다만 연기를 배우는 수업이긴 합니다" 하는 냄새를 풍기는 제목을 보고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그림을 그렇게 배우고 싶었으면서도 그런 수업에 클릭을 오만 번 망설이다 결국 못 하고 넘기기도 하면서- 가볍게 할 것 같은 어떤 느낌에 -바로 들어갔다. 신청자 3명. 내가 4번째. 하루 이틀 사흘은 고민하고 망설여도 되겠지만 신청하고 망설여도 되지 않냐는 긍정적인 행동. 나답지 않은 판단으로 신청서를 적고 '신청하시겠습니까? 에 과감하게 '그렇다'를 눌렀다.


그래 뭐 대단한 연기를 시키겠냐. 잘하면 발성법 정도 배울 수 있겠지. 그러잖아도 노래방에선 한 곡만 불러도 목이 쉬어버리고, 친구랑 수다 한 번 떨면 득음한 거친 소리가 나는 목청이니까. 부끄러울만큼 목이 잘 쉬는 평소의 입꾹닫(입 꾹 닫고 사는 인간)형 인류에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목소리 내는 법을 알려줄지도 모르니까. 아리엘은 말하지 않아도 왕자 한 명 정도는 뚝딱 내편 만들던데 나는 목소리까지 갖고도 제대로 된 대화나 소통도 못하니까. 내용은 할 수 없고 말하는 연습, 서툰 내 목소리, 그거라도 좀 다듬을 방법을 배운다면 그것만으로 좋다. 배워 나쁠 필요가(?) 있나.

나는 배우련다. 연기든 뭐든 말이다. 그렇게 정해졌다. 배우의 길. 나는 이제부터, 배우다.


매주 월요일 나는 배우다 12번의 수업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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