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대키를 눌러 돈통을 연다.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모든 돈이 종류별로 들어있다. 오만 원 만 원 오천 원 천 원 오백 원 백 원 오십 원 십 원까지 편애 없이 한 칸씩이다. 현금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제로페이 영수증 외 반품한 영수증, 외상 장부 영수증, 고객 등록용 영수증도 알차게 들어있다.
5만 원권이 생기고부터 수표를 쓰는 사람은 사라졌다. 과거 구멍가게에는 십만 원 수표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거슬러 줄 돈이 가벼워지니 계산원으로서 5만 원권은 반갑다. 오만 원 4장 만원 27장 오천 원 12장 천 원 56장 오백 원 37개 백 원 192개 오십 원 73개 십원 137개다.
교대하며 넣는 돈통은 잔돈도 주고 환불도 해야 하니 예수금을 준다. 다른 곳은 모르지만 이곳 슈퍼는 30만 원이다. 교대하며 세어보니 현금이 628,720원 들어있다. 예수금을 빼면 오늘 내가 번 돈 중 현금은 328,720원. 이 돈이 돈통에 고스란히 들어있어야 도둑질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 없이 퇴근할 수 있다. 남아도 기분이 좋지 않고 모자라면 그 간의 수고로움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듯 불쾌하다.
완벽하다. 십원도 남지 않고 모자라지 않는다.
확인키를 눌러 마감 영수증을 뽑는다.
마감 영수증 속 취소 표시된 영수증 개수와 일하며 바로바로 뽑아놓은 체크기 영수증의 수량도 같은지 확인한다. 그리고 남은 돈 30만 원을 한 번 더 확인하면 마감이 끝이다.
아! 오늘도 수고했다. 매일 끊임없이 쏟아지는 밴드 상품 기록하랴 영수증도 없이 반품하여 달라 고집을 부리는 손님을 몰래 처리해 주랴 아직 더운 8월의 30번째 날 비용을 아끼려 에어컨 끄라고 전화하는 사장님 전화도 받으랴 '땀 흘리며 일하는데 에어컨을 끄라고요?' 하며 째려보는 나머지 직원들과 눈으로 같이 욕 해주랴. 바빴다.
그 모든 걸 다 떠나서 돈이 딱 맞으니 더 수고했다. 이제 퇴근이다.
마트에서 일하며 좋은 것이 있다. 강조할 점이다. 마감시간은 대충 대략 거의 지킬 수 있다는 것. 회사 생활하면서 칼퇴 한 기억이 퇴사를 정해놓은 몇 달 이외에는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이곳은 시간제로 일한다는 마음가짐이라서 그런지 마감하고 퇴근 시간을 넘기면 눈치도 보지 않고 손님이 밀렸든지 말든지 퇴근할 권력이 생긴다. 6시 5분, 돈통을 사무실에 넣어놓고 가는 길에 저녁에 먹을 국거리와 두부를 손에 들고 사복차림인 주제에 셀프계산하며 문을 나선다.
길 건너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타며 오전에 미술동아리에서 그린다고 가지고 다녔던 짐에다 저녁장 본 짐까지 보조석이 만원이라며 2단 주차를 시켜놓고 시동을 건다. 창문을 열어 여름의 열기로 가득 한 내부를 환기시키며 바쁘게 라디오를 켠다.
6시 7분 '배철수의 음악캠프'다. 시작하고 "광고 듣겠습니다."를 한번 하고 난 후라 노래만 나오고 있다. 타이밍이 절묘하다. 거의 짜릿할 정도다. 차도로 나가기 위해 비상등을 켜며 에어컨까지 튼다. 이제 질주만이 남았다. 나의 퇴근은 언제나 황홀할 지경이다.
평소 강렬한 음악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귀에 감기는 부드러운 음악을 선호한다. R&B, 소울, 블루스 등등
하지만 퇴근은 비교적 편안한 락이 좋다. 약간은 간이 세다 싶지만 철수오빠는 "이 정도 갖고 세다고요?" 할 거기 때문에 입 밖에 내면 안된다. 꾹꺽.
왜냐하면 오늘도 치열했으니. 나 좀 수고했으니까. 나 좀 격렬히 일했으니까. 소리도 키워본다. 나만 그런 거 아닌 거 아는 '후렴구 따라 하기'도 해 본다. 왠지 클라이언트 앞에서 PPT라도 하고 팀장에게 깨진 느낌으로 '롹'을 헤드뱅잉으로 공감 누르고 오라버니의 싸늘한 개그에 키득키득 웃으며 피로를 풀어본다. 아는 사람이 봤다면 뭘 잘 못 먹어도 한참 잘 못 먹었다 할 얼굴일 거다. 아무도 없는 차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을 테니 말이다.
동네에 하우스를 밀고 왕복 4차로 큰 길이 생겼다. 시골에 다닐 사람 누가 있다고 이리 길을 닦나 싶었지만 이 길이란 게 가본 적도 없는 캘리포니아 대로변 같다며 혼자 감탄한다. 미국 동부인지 서부인지도 모르는 캘리포니아가 왜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롹 스피릿' 퇴근 모드 음악과 장엄하게 펼쳐진 끝없을 것 같은 텅 빈 4차로 길. 그리고 완벽히 서쪽으로 달리고 있는 차 안. 해를 향해 무모하게 질주하는 이카루스라도 된 듯 빠져든다. 지는 해를 지평선으로 볼 수 있는 끝내주는 뷰 맛 길을 달린다.
오늘 그림 동료들에게 "나 언제까지 일할까요?"물어봤던 거 취소다. 이런 뷰 맛 길을 달릴 수만 있다면 화장실 청소만 빼고 다 할 수 있겠다. 그래 이 멋진 퇴근을 하려면 일이란 걸 나는 조금 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