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잔 해야겠는데. 길가에 있는 슈퍼에 가야겠다. 길이 자꾸 흔들리냐?' 기분이 나빠온다. '확 한대 줘 패버릴까? 아. 내 나이가 얼만데, 좀 참자. 술! 술을 한잔 사러 가야지.'
흔들리는 길이지만 아는 길이라 망정이지. 모르는 길이었으면 돌부리에라도 걸려 넘어졌겠다.
'어 저기 슈퍼 있네. 확 아우 이 길을 그냥 밟아버려?'
술을 불콰하게 마신 아저씨가 보일 듯 말 듯 약하게 비틀거리며 들어온다. 소주, 무, 종량제 봉투를 구매한다.
"얼마야, 아가씨?"
"5,240원입니다."
묻는 그에게 가격을 말한다. 대답을 해주자 대뜸 한 소리 한다.
"왜 째려봐?"
왜 째려보냐니. 만원을 받아서 돈통을 연 후 잔돈이 얼마인지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돈을 세고 있는 나인데. 비록 눈이 네 개라고 흔히 말하는 안경잡이이지만. 엄연히 눈은 두 개고 그 두 개의 눈은 돈을 째려보고. 아 돈, 돈을 째려봤구나. 하지만 취객의 논조는 본인을 왜 째려보냐는 거였으니. 완벽하게 억울한 상황이다.
"째려보긴 뭘 째려봐요. 돈 세고 있었는데. 여기 잔돈 4,760원입니다."
"으음. 으? 택시 불러줘."
술집이 좋은지 얼굴은 벌겋게 술 먹은 티가 나는데 말도 제법 또박또박하고 시비 거는 거만 빼면 멀쩡하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슈퍼에서 물건 사놓고 택시까지 불러달라는 건 뭐지? 마침 지나가는 사장 아들에게 묻는다.
"동민아, 손님이 택시 불러달라는데?"
"예, 이모 잠시만요."
날 이모라는 부르는 사람은 언니가 낳은 조카 3명뿐인데. 족보가 영 이상한 조카가 슈퍼에 있었다. 출생의 비밀인갑다. 나도 몰랐는데 말이다. 여하튼 그 사장 아들인 나의 조카는 "잠시만요"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시골 인심인가? 이곳은 택시를 불러주는 문화가 있는가 보다.
당연한 듯 택시를 기다리는 손님이 눈앞에 있다. 이제 취객과 나의 이상한 대치상황이다. 긴장감이 극에 달한다. 그럴수록 나는 딴청을 해야 한다. 주변에 어슬렁 거리고 말 붙일 꺼리를 주면 시비에 휩싸이기 좋다.
괜히 계산대를 벗어나 과일을 정리하고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척하며 사람이 있는 곳으로 잠시 대피한다.
그러고 돌아와 보니 낙엽을 밟지 않으려 애쓰는 감성충만 5살 아이처럼 비틀거리며 문을 나가고 있다. 술이 남겨놓은 냄새와 입에서 뱉어놓은 욕이 뒤로 흐르고 있다.
"C8 다 뒈져라"
일부러 그런 것처럼 취객을 호박엿 먹인 나의 조카는 느긋하게 할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모, 손님은요?"
"어 그 손님 술이 많이 취해서는. 택시 안 잡아준다고 험악하게 욕 하더니 막 나갔어. 무시무시하다"
그러자 듬직한 곰돌이 같은 외모의 조카는 밖으로 나간다.
잠시 후 들어온 나의 가짜 곰돌이 조카는 약간 기분이 상한 얼굴이다.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아이라 취객과 한바탕 한 것 같다.
"뭐라 하디?"
"그 아저씨한테 가서 욕하지 마시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욕을 하면서 칼 들고 온다고 기다리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데요."
"뭐? 옴마야.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그러라고 했죠 뭐. 칼 가져오시라고. 근데 욕 하지 말라고 얘기했어요."
이것 봐라. 칼에 욕에 협박에, 3종세트에도 기복 없이 단단하다니. 믿음직스럽다.
중요한 건 내 가짜 조카 자랑이 아니다. 마트에 물건값들이 계단 오르듯 착착 오르더니 이젠 이상한 사람들까지 슈퍼를 맴돈다.
꼭 '나는 전설이다'속 윌 스미스가 구축해 놓은 안전가옥의 존재가 드러나 좀비들이 어슬렁 모으듯이. 점점 거리가 좁혀지는 듯 느껴진다.
쉴 새 없이 터지는 뉴스들의 홍수다. 남의 나라에서 '지구의 바다'에 오염수를 버리기 시작했다는 뉴스부터. 좁아지는 선생님의 자리를 그 좁은 곳마저 차지하여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 희생되는 선생님들.
제발 한 번이기만 바랄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길에서 생면부지의 사람을 공격한다. 이유 없는 폭력으로 타인을 죽인다. 치가 떨릴 만큼 화가 나고 그러면서도 그런 인간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길을 다니고 있을지 몰라 무섭다.
폭력을 예고하고 간 남자는 다행히 소식이 없다.
그리고 사장님은 그 남자를 단체 카톡에 올려 주의를 주었다. "이 사람과 할 말이 있으니 보이면 사장인 나에게 말 해주세요"
지난 번 집이 어디냐고 묻는 중년 남자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번 다시 못 오게 처리를 한 전력이 있는 사장님이다. 이번에도 믿는다. 어떻게든 슈퍼를 위해 슈퍼에서 일하는 직원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리라 믿고 있다.
슈퍼는 대장인 사장이 지키면 된다. 혼자가 역부족이면 경찰을 부를 수도 있다. 방법은 찾으면 된다. 그가 그렇게 할 것이라 보기에 나는 내 할일에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슈퍼 밖 세상은? 길에서 이유없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수많은 꽃다운 청춘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미래를 이끌 아이를 가르치려 한 선생님들은? 누가 보호 해주지?
저기요. 이 곳에 대장은 도대체 누구인가요? 속 시원하게 대답해 줄 이가 없는 캄캄한 밤같은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