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에서 '무'맛이 나요.

당신은 '딱복'파 '말복'파

by 노사임당

여름은 수박의 계절이다. 여름은 복숭아의 계절이다. 여름은 자두의 계절이다. 여름은 여하튼 맛있는 과일의 계절이다. 인간에게 더없이 풍요함을 선물하는 자연. '여름의 풍성함에 더위가 밉지 않을 정도다.'라고 거짓말을 해도 슬쩍 넘어가질 것 같다.


덥다. 더 표현할 말이 없을 만큼 올여름은 그랬다.

이곳 사람들 여름을 혐오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부산이다. 바닷바람은 항상 불었기에 여름이 '못 견디게'는 아니었는데. 여기도 강바람이 부는 도시라 그런지 험악한 계절은 아닌 모양이다. 서울서 온 어떤 손님은 이 지역 사람들은 여름을 안 싫어하더라며 더위를 공감받지 못해 자못 섭섭한 표정이었다. 그런 이 도시도 올해는 유난히 무더웠다.


섭섭해도 더운 여름이기에 얻을 수 있는 게 있다. 여름에만 먹을 수 있는 과일. 복숭아.


저장 배, 저장 사과, 냉동 딸기 과일도 있지만 아직 복숭아는 저장용이 깡통만 있는듯하다. 캔 과일은 가공식품이니 제외. 그러니 복숭아를 즐기려면 여름뿐이다. 그것도 햇복숭아는 비싸서 미루고 이제 좀 나오나 싶으면 장마라서 싱겁고 8월도 며칠은 넘겨야 이제 시작해 볼까 하며 손바닥을 비빌 수 있다.


고백하자면 과일을 좀 싫어한다. 달고 신선하고 맛있는 과일을 멀리하는 사람은 당뇨가 걱정인 내 부친밖에 못 봤지만. 여하튼 과일은 배가 고파도 생각 안 난다. 그렇다고 다 거부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하나는 있겠지 하며 억지로 고른 것도 아니다. 복숭아만은 좋아한다. 여름이 되면 은근 기대까지 한다. 냉장고에서 막 꺼내도 차갑지 않아 그 싸늘한 과일의 느낌이 적고 몰랑 몰랑해서 씹는 걸 싫어하는 내 적성에 딱 맞다.


게다가 좋지 않은 기억으로만 풍성한 내 유년시절 중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추억까지 붙어 있다. 공책부터 곤로에 넣을 등유, 한복동정까지 파는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구멍가게를 하던 어린 시절. 돈 아까워 과자 한번 안 찢어먹던 내가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던 '파는 음식'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복숭아였다. 팔려고 진열한 복숭아가 더위를 먹어 물렁해지고 썩을 기미가 보이면 엄마는 그 물이 질질(줄줄 아니다) 흐르는 놈을 칼로 대충 잘라 입에 넣어주곤 하셨다.


"빨리 입 안 오나?"


하며 넣어주셨던 복숭아. 그 몰캉하고 물이 질질 흐르는 과즙, 씹을 것도 없이 꼴깍 넘어가던 복숭아는 행복이었다. 뭐든 먹을 걸 주시면 '안 먹어'부터 말하고 보던 내가 어쨌든 엄마 등쌀에 못 이겨 입에 넣었던 복숭아는 맛났다. 바빠서 챙겨주는 게 너무 귀찮은 게 눈에 보이던, 그럼에도 일부러 시간 내어 무언가를 해주려 하신 엄마. 그런 마당에 편안하게 얻어먹기는 미안했다. 하지만 복숭아는 잘라서 바로 먹지 않으면 쓰레기가 될 판이라 제법 마음 편하게 입을 벌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맛을 알아버린지도. 엄마의 사랑이 첨가된 복숭아의 맛을.


세상 돌아가는 것에 무관심한 사람답게 올해 처음 알았다. 복숭아에 '파'가 있는걸.

부산20세기파와 칠성파를 나누던 라떼적 파도 아니고 말랑복숭아파와 딱딱한 복숭아파 일명 '말복' '딱복'


동남아 우기처럼 비가 온 올 2023년 여름.

비가 퍼붓고 난 뒤 막 나온 복숭아를 사간 고객님이 재방문을 하였다. 혼나 온 아들처럼 남편은 아내 대동했다. 아내분은 남편이 황도를 안 사고 백도를 사서 이렇단다. 본인도 농사를 짓기에 복숭아를 잘 아는데, 황도는 장마에도 기본 맛은 있다는 게 설명이었다. 그래서 굳이 강조마저 해가며 황도를 사라 여러 번 주의를 주었다는데. 남편분은 마누라가 무섭지도 않았는지 홀랑 까먹고 색도 이쁜 백도를 골라 가져간 거였다.


"복숭아에서 '무'맛이 나요. 한 번 드셔보세요. 이렇게 가져왔어요. 내가 황도 사 오라고 얼마나 말했어? 아니, 맛있는 맛이 없는 게 아니라 아무 맛도 없다니까요. 약간 싸한 '무시'(무의 사투리) 맛까지 있어서 어휴 어서 맛 좀 보세요."


썩어서도 아니고 맛이 없어서였지만 환불은 해 드렸다. 그만큼 아슬아슬한 기간이었다. 맛이 없다 안내는 하면서도 반품 들어올까 가슴 졸였던 시기. 딱딱한 복숭아는 천도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통통하게 살이 찐 딱복도 고를 수 있다. 황도 백도만 알던 자칭 복숭아 애정자가 이젠 말복 딱복도 아는 지식 업그레이드도 되었으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계산대에서 슬쩍 나와 복숭아를 보고 계신 손님에게 말을 건넨다.


"고객님, 지금 복숭아 맛있습니다. 맛이 잘 들었어요. 무얼 사셔도 다 맛이 좋을 겁니다. 어떤 거 찾으세요? 말복? 딱복?"


손님마다 딱딱한 복숭아를 선호하는 '딱복의 시대'다. 손님대접시에도 보기 좋은 딱복, 보관도 좋은 딱복이란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이리 혼잣말을 한다 '맛도 있을 때겠다. 질질 국물 흘리면서 먹을 말복 하나 사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