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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Jul 18. 2024

5. 저울 같아라

삶 속에도 스며들기를

저울은 가축을 잡고 고기를 파는 백정들에게 꼭 필요한 도구였다.



형평사는 1923년 봄 경남 진주에서 만들어졌다. 1935년에 이름을 '대동사'로 바꿀 때까지 뜻깊은 활동을 벌인 형평사는 일제 침략 35년 동안 단일 조직으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사회운동 단체로 기록된다. 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인간 평등을 주장하며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관습을 없애려고 활동한 인권 단체로 평가된다.

1923년 4월 24일, 진주면 대안동의 진주청년회관에는 약 7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형평사 기성회. 진주전화국과 진주기독청년회관 부근이라 짐작될 뿐 위치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지만, 그곳은 3.1 운동 이후 진주지역 사회운동의 중심지였다.

3.1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1년간 감옥살이를 한 강상호 (18887~1957)는 감옥에서 나온 뒤에 <동아일보> 초대 진주 지국장을 역임하고, 일신고보 기성회, 노동공제회, 공존회 등 교육운동, 노동운동 단체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유명한 사회운동가였다. 형평사 창립 당시 조선일보 진주 지국장을 맡고 있던 신현수 천석구 역시 진주저축계 진주금주단연회 진주부업장려회 같은 여러 사회 운동 단체에 참여하고 있었다.

발기총회 즉석에서 활동 기금으로 600여 원이나 모았다는 사실도 그들의 열성과 재력을 가늠하게 해 주는 대목이다.(노: 그 당시 우리가 일본에 갚아야 할 빚이 1300만 원이었음을 비교하면 대단한 규모의 돈) 경제력이 있어도 멸시당하고 차별받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당시로서 거액이었던 활동 기금을 한 자리에서 모았던 것이다.


기생, 승려, 노비, 무당, 역졸, 광대, 백정 칠반천민이라 불린 존재들이다.


지배층인 유학자들이 주장하는 이상국가나 , 인을 받들고 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도 신분 질서의 틀 안에서 이루자는 것이지, 그것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이루자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히 신분 차별을 없애고 평등 사회를 만들자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계급을 타파하며 굴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는 사업을 통하여 평등사상을 추구하고 모든 사원이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도모하였다. 형평사원들은 수백 년 동안 써온 '백정'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그 대신에 서로를 '사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갑오농민전쟁을 겪은 조선왕조는 사회 개혁의 요구를 전혀 무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이른바 '갑오경장'이다. 백정의 일부에 해당하는 "피공의 면천을 허락한다'는 허락은 백정 전체의 신분 해방을 선언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래에서 시작된 형평, 평등에 대한 갈망과 열망은 등불처럼 번져 형평운동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형평운동 (이 글은 형평운동 책에서 발췌하여 요약하였습니다)
형평운동/ 지식산업사/ 김중섭 저

이 운동의 중심에 백촌 강상호 선생(조선시대 정 3품을 지낸 엄청난 재력과 권력가 집안 양반 자제)이 있었다. 그와 칠반천민, 천민 그중에서도 천민으로 멸시받던 백정을 중심으로 엮어 놓은 극 형평운동. 연극의 뿌리는 알았으니 이제 연극 연습으로 들어가 볼 시간. 백정이 되는 시간을 가져보겠지? 가슴이 웅장해지는 연극 연습으로 바로 출발~!






토막 상식(진주는 어떤 도시?)

통일신라시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진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치 세력이나 집단의 성정은 미약하였다. 이 때문에 일찍이 경상도 서부지역에서 일어난 변한의 여러 작은 나라나 가야의 여러 나라 가운데 진주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질 만한 나라가 보이지 않는다.

진주가 경상도의 큰 고을로 눈에 띄게 드러난 것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전국을 9주로 일컬어지는 아홉의 광역 행정 구역을 정하면서 그 가운데 한 주의 청사를 진주 지역에 두게 되면서였다. 이로써 진주는 경상도 지역의 큰 고을을 성장할 수 있게 되었고 통일신라 이후 역대 왕조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위상을 변함없이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진주의 역사를 이야기할 적에 가장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경상도 지역의 큰 고을로 일찍부터 자리 잡아 발전해 왔다는 사실일 것이다. 진주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이나 사태는 시대적 상황과 지역적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띠고는 있으나 경상도의 큰 고을이라는 무대 위에서 펼쳐진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큰 고을이었기 때문에 진주는 일찍부터 토착 세력이 힘을 얻고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중앙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한대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의 절반이 영남 인물이며 전발이 진주 출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조선 중기에는 많은 사림계 인물을 배출하여 진주 출신 인사를 중심으로 하는 특색 있는 정론이 펼쳐졌으며, 동서 분당, 남북 분당, 대소북의 분당 시기에도 정권의 한 축을 담당하여 발언권을 행사하였다.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활동하는 인사를 활발히 배출하던 이들 시기에는 진주지역 사족 가문의 세력 또한 강성하였고, 이는 임진왜란과 같은 국란이 터졌을 때 주민의 힘을 모아 외적에 맞서 싸워 전란을 이겨내는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진주 역사/ 김해영 저 / 한국문화사

(이 책은 진주 문화와 교육의 한결같은 지렛대인 (재)남성문화재단의 도움으로 (사)진주문화연구소에서 기획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성문화재단>은 어른 김장하 선생이 설립한 재단입니다. 100% 본인 돈만으로 출현한 재단에서 진주의 많은 문화, 사라질 역사가 발굴되었습니다. 끄집어 내어지고 알려지고 연구되는 문화혁명과도 같은 일이 마음만 있던 사람. 그들에게 연구비로 관심으로 전해져 (이런 표현 진부하지만) 곳곳에 씨앗으로 뿌려지고 발아하였습니다. 남성한약방에서 한약 판 돈으로 극비리, 무명의 존재로 행한 일들에 가슴 깊은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존경합니다 선생님. 어른 김장하.


현재 임시로 옮겨놓은 형평운동 기념탑. 진주성 외성 공사중인 관계로 이사는 했지만 언제 제자리를 잡을지 모르겠습니다.

남성당한약방. 현재는 폐업 상태입니다. 진주시에서 매입했습니다. 전시관으로 개관 예정이라고 합니다.

근처 향교

백정과 일반인(?)이 함께 기도했던 최초의 교회. 진주 교회입니다.

경남에서 처음으로 일었던 독립 만세 의거가 있었던 교회.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만세삼창을 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종은 강제 철거당했고 그 후 종탑만 복원하였습니다.

진주 백정들이 형평사 창립대회를 위해 모였던 곳입니다. 진주 시내 영화관 자리. 저기 쇠공 모양의 상징물이 그거라네요. 가끔 다니면서 처음 보았습니다.

이름 없는 무덤이었던 백촌 강상효 선생 묘소. 이곳을 김장하 선생이 사비를 털어 비석을 세웁니다. 그 비석과 안내 덕에 진주시에서 안내판도 세우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사진 날짜 비석 뒷면 주목. 선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겨진 글자. <진주의 작은 시민이> 라는 문구의 시민은 김장하 선생을 의미합니다. 글자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진짜 알고 봐야 보입니다.


한 달에 만 원 위안부 할머니 단체에 기부하며 생색이라는 생색은 다 내는 나와 달리, 세상 모든 어렵고 힘들고 묻혀버린 것들에 신경을 쓰고 도왔으면서 극구 이름을 지우는 분, 김장하. 형평운동 기념탑이 그분의 재단에서 시작되었다지요. 그분이 없었다면 "그런 일이 있었어?"예전에 그랬구나...로 사라질 옛날 옛적에…. 이야기였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혹시나 틀린 부분이나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백촌 강상효 선생님에 대한 설명은 연극 중간중간 기회가 있을듯하여 가볍게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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