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형평운동 관련지를 답사했다. 첫 수업에 자기소개와 몸풀기 후 바로 버스 타고 답사라니. 흐름 무엇? 종잡을 수 없는 수업 짜임새에 흥미가 돋았다. 버스 타고 여행이라는, 소풍 가는 기분과 달리 막상 위대한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보니 이 사안의 심각성 아니, 이 연극의 심오한 뜻을 알 것도 같았다. 진주에서 처음 일어난 인권운동.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자유 평등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도 차별은 존재하니-진실을 기억해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 의미까지 짚어주며 연극으로 초대를 한다라.. 뭔가 멋지다. 마음에 쏙 들어!
오늘은 처음 리딩이 있는 날. 기대된다. 사실 내 주특기는 책 읽기다. 기관 선생을 할 때도 조그맣고 시끄러우며 잠시도 나를 혼자 두지 않는 과잉 에너지 사람들과 함께라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고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책 읽어주는 시간만큼은 행복했었다. 그 시간 하나 기다리며 하루를 억지로 겨우 이젠 못 참아... 를 속으로 외치며 보낸 것도 같다. (제 한계를 알기에 그쪽으로는 구직하지 않습니다 TT) 그러니 온갖 목소리로 온갖 생명체가 되어하는 변신역할은 언제나 '기꺼이', '마이 프레져'. 그런데 어쩌자고 요즘 도서관에 가보면 나보다 연기력(?) 좋은 부모들 밖에 안 보여서 깜짝깜짝 놀라긴 한다. 뭐 어쨌든 나떼는 그랬다는 말씀.
오늘 드디어 읽고 노래도 부르는 건가? 월요일이 기다려지는데 오늘은 더욱 그렇다.
설렘설렘 가득가득.
7월 1일. 도서관은 한 달에 한 번 첫째 주 월요일에 한번 문을 닫는다. 그럼에도 12회로 정해진 수업을 마치기 위해 도서관 세미나실이 열렸다. (사서선생님 출근 쏴리~)
도서관 문 닫는 날이라 등산도 필요 없을 듯 해 원피스까지 꺼내 입고 간다. 등산에는 바지지만 아니라면 오랜만에 여자여자하자. 어느 때는 나무꾼 같은 모습 어느 때는 빨래하다 나온 아낙, 가끔은 데이트 나온 여자 같은 모습으로 변하는 게 좋다. 그게 또 연기하는, 하려는 자의 자세, 변신하는 자세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실은 매일 뭘 챙겨 입고 나오기 귀찮아서 검은 티에 검은 바지로만 살지만 있는 옷 입어야 다음에 새 옷을 살 수가 있으니 그 즐거움을 위해 입어줘야 하는 것이었다. 구멍나라, 떨어져랴 옷아~~
시간이 너무 맞네. 9시 59분이다. 도착. 모두 착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그것보다 우선 연기자들 대본 리딩하는 책상 배열이다. 이건 뭐야 기대되잖아. 오훗.
굳이 비워진 자리를 찾느니 보이는 곳에 앉는다. 어? 동생인 친구가 아직 안 왔다. 아. 갑자기 소심해지려고 한다. 겨우 친해진 사람 있다고 입이 뚫릴 참이었는데…. 서운하다. 뭐 재미도 반감 의욕도 줄어들겠지만, 킵 고잉이지 뭐. 앉자마자 보이는 간식. 아침도 안 먹고 잠깐 쪽잠(아침에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또 잤냐?) 자고 나온 참이라 공복인데 빵과 베지밀이라니. 어흑 고마워라. 아침 겸 점심 브런치로 먹어야겠다. 혼자 잡다한 생각을 하는 사이 수업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세 번째지요? 처음으로 대본 갖고 왔거든요. 오늘은 한 단락씩 읽어보면서 내용도 훑어보고 자신이 어떤 역에 어울릴지 생각해 보기로 해요. 아마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될 거 같거든요. 읽으면서 배역도 생각해 보세요. 지난번 답사 다녀왔기 때문에 머릿속에 느낌이나 동선이 좀 그려지실 거예요. 진주성, 옥봉동…. 아시겠지요?
이 연극은 기성품이 아니라 극단 현장에서 만든 창작 연극입니다. 김인경 작가님이 대본을 썼는데 이분이 대전사람이세요. 아는 분께 도움을 받았다더라고요. 사투리 해보면 아시겠지만, 경북 사투리예요. 도움 주신 분이 거기 분이라…. 진주는 "하모 하모" 하는데 여기는 조금 다를 거예요. 그래도 같은 경상권 말투니까 감정 잡기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생각보다 편하고 대사 치기도 좋으실 겁니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자 왼쪽부터….
또 저예요? (평생 교편 잡았다는 분) 예….
다 온기에?
출석함 불러 봐라!
그라까?
배건네 갖바치 고 씨 왔나?
왔다.
한 명 한 명 나오는 대사를 한 명씩 한 명씩 순서대로 해간다.내 차례가 다가온다. 자신은 있었는데 잘하려니 또 떨린다. 근데, 잘한다고 까불어놓고 대사 타이밍에 배 아파서 화장실 가야 하면 무슨 소용? 아, 연기는 글만 잘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니겠구나. 담대함 섬세함 공감력 상대와의 호흡 등등 뭐가 많이 필요할지도…. 심장이 나대니 무대에 서겠나 싶다. 이러다 망하는건가? 아냐 하던데로 편하게, 애들에게 책 읽어준다. 나이 든 아이들에게 동화책 읽는다...생각하며. 대사를 뱉는다.
사또: 햐~! 남강은 언제 봐도 직이네. 저 봐라, 저. 푸른 대숲이랑 하얀 백사장이 쫙 펼쳐가 있고, 남강물이 저래 찰랑찰랑, 내 보고 '놀러 오이소~ 퍼뜩 놀러 오이소~'손짓을 한다 아이가. 이런 풍광이 어데 또 있긋노? 이런 데서는 풍월을 읊어야하는 긴데. 내 팔자가 와 이래 꼬였노? 이기 다 저 백정놈 때문이라. 봐라! 퍼뜩 끝내자.
아우 대사 길다.
와~. 무대에서 연기하는 사람 톤인데요? 바로 올라가도 되겠어요. 잘하셨어요.
어흑 잘했다 하면 떨려서, 더 잘하고 싶어서 못 하는데 일 났네. 할수이따! 할수이따! 이게 뭐라고, 그냥 하자! 아, 배야. 이렇게 긴장할 일인가 싶지만 스위치는 켜졌다.
몇 번을 돌아 리딩이 1회 끝났다. 진짜 1시간 반이 지났다. 글자는 사투린데 출처가 불분명한 분, 진주 사투리를 찰지게 하는 분, 대구 말툰데 이야~싶게 잘하는 분. 모두 의외다. 아니 다들 이래서 온 거 같다. 자신도 있고 잘 하기도 해서 도전한 게 아닐까 싶다.
진주 사투리로 찰지게 하는 분, 대구 말투지만 오히려 더 대사를 잘 쳐내는 분 잘하시는 분들 계시네요. 그렇죠? 그것도 그거지만, 하다 보니 다들 감정이 올라와서 잘하시네요.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 건데 생각보다 잘 될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럼, 본인이 하고 싶은 역할 적어 내세요.
이 시간만은 피하고 싶었다. 원하는 게 뭐냐!? 에 대한 대답을 시원하게 적는 것.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남 앞에 패를 까는 거. 은근히 원하는 걸 돌리고 뭉뚱그려 "이거라도 괜찮아?" 할 때 못 이기는 척 받아야 부담이 없는 법인데. 솔직하게 나 이렇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야라고 홍보해야 하는 건 피하고 싶었는데 쩝. "나! 주인공 하고 싶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이왕 이리된 거, 나는 배우다 글도 쓰고 있고 하고 싶었던 연기니, 어색한 연기 보면서 내가 하면 저것보단 낫겠다 비꼬지 말고 전면에 나서보자. 주인공 흰고무래를 써서 낸다. 그 외에도 세줄 나오는 친구 2와 상인 2도 명단에 끼워 넣는다. 주인공 아니면 만만한거 행인 1, 2도 가능. 이 정도면 모든 가능성은 열어놓으면서 주인공도 주면 하겠다는 식의-전통적인 내 방식으로-의사 표현된 거 같다. 그래도 주인공 이름을 적다니. 글 쓴다는 이유든 어쨌든 발전이긴 하다. 누가 볼까 민망해서 비밀로 할 속마음인데. 이렇게 내 감정도 알고 안 하던 행동도 해보고 배우게 되는 배우 작업이다.
다음 주면, 역할이 나누어질 것 같은데 나는 누가 될까? 내가 나 아닌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는 연기.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인, 흥미로운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