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몇 시간을 서 있을 생각에 지레 걱정이 앞선다. 10시부터 12시까지 배우는 수업(뮤지컬)이 있었지만 조퇴하고 집으로 왔다. 30분만 자자. 한숨 잠으로써 잃어버릴 기력을 모으고 앞으로 방전될 체력도 미리 충전하자 싶었다. 알람을 30분 후로 눌렀다.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잠자는 능력으로 회사 취직한다면 나는 삼성이 아니라 화이자에 연구원으로 취직도 가능하지 싶다. 거실에서 남편의 커다란 기침 소리가 들린다. 아! 뭐야 하여튼 목소리 하난 끝내주게 크다니까. 잠이 살포시 깬 김에 시계를 본다. 11시 35분. 뭐? 11시 35분이라고? 이 알람이 무슨 일이야? 시작을 안 눌렀네, 어이구~ 내 정신! 점심까지 먹여놓고 출근하려 했지만 들어오며 사놓은 김밥은 나만 챙겨 급히 나간다. 실내복 차림이던 남편까지 환복이다.
왜?
당신 주차하는 데 10분 걸리잖아.
아! 맞네.
시골길을 레이싱 카처럼 달려 10분 만에 도착. 15분 거리를 10분으로,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지하 마트 앞에서 사장에게 전화를 하니 57분. 가게에는 사람이 없다. 화장실도 좀 갔다 오자. 59분, 다시 오니 젊은 남자가 있다. 와우~ 스릴 넘쳤다.
하기 싫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터에 도착해보니 다행히 몹시 어려운 일은 아니다.
계산 식. 붕어빵 같은 대만식 달걀빵? 슈크림 빵? 이름이 뭐든 십원빵 같은 동그란 모양 빵, 속은 여러 가지 골라 먹을 수 있는 앙꼬가 들었다. 설명한다. 가격, 먹는 방법, 남은 빵 보관 방법 기타 등등. 포장을 한다. 카드 현금 제로페이 뭐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는 계산을 한다. 끝.
일은 손목이 나갈 일도 복잡한 계산식에 실수할 일도 없지만 복병은 내내 서 있어야 한다는 것. 겨우 족저근막염과 발목터널증후군을 지나왔는데 무리가 될 수도 있겠다.. 만 겨우 3일이다. 한 달 몸져누우면 될 테다.
남편 부려 먹던 솜씨로 빵 구워야 하는 남성에게 자꾸 빵 담으라 얘기하다 한소리 듣는다. (계산은 좀 밀려도 됩니다. 천천히 하세요. 빵부터 담으시면서요~) 계산을 세 번째 하는데도 또 묻는다. 무슨 맛이 어디에 진열되어 있는지 적혀있는데도 자꾸 버벅거린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초보가 할 수 있는 무척이나 당연한 실수 정도라 무난한 시작이라 보인다. 문제는 내일. 토요일 몰려올 손님과 놓아버린 정신의 환상적인 컬래버로 멘붕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된다. 괜찮아. 할 수 있을 거야. 일단 어려운 일이 아니고 힘이 들면 천천히 하면 되니까. 줄이 길어서 대기 시간이 오래 걸리면 알아서 손님은 달아나게 되어있으니까. 실수하지 않는 게 중요할 테다. 바쁠 때일수록 돌아가는 여유. 심호흡하는 정신 챙김. 그거면 될 거다.
이런 멘탈 챙김 명상 중일 때였다.
사장 지인 직원이 부른다.
"여사님~!"
응? 여사님?????? 이런 천지개벽할 호칭이 있나! 크게 당황스럽네. 여사,여사,여사님. 누구한테는 성명뒤에 여사 호칭 안 붙였다고 무리의 사람이 고발하네 예의가 없네 사회적으로 문제까지 삼던데. 나는 왜 그 좋은 호칭에 이리도 화들짝 놀라나. (너무 좋아서?) 나는 어쨌든 생각이 다르네. 그러니 한 마디 해줘? 아니면 며칠 볼 사람도 아닌데 그냥 넘어가? 아냐, 그런 거 따질 때는 아닌 거 같다. 그건 그거고, 왜 부르는지 갔더니 들고 있던 팥 앙꼬 맛을 보란다
음 냠냠
어때요? 시나몬 맛이 적당한가요?
아~ 팥에 계피! (깊이 음미하며)예 적당해요.
제가 입맛이 이상한지 맛이 안 나서요.
좋아요. 적당해요.
무릎이니 발바닥이 견뎌줄지 내일 손님이 많이 오면 정신 차리며 일할 수 있을지 혼자 논문 목차 정하고 있던 때 예측할 수 없었던 한 마디. 여사님.
여사를 네이버 사전에서는
1 결혼한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
2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 주로 성명 아래 붙여 쓴다.
3 고대 중국에서, 후궁을 섬기어 기록과 문서를 맡아보던 여관(女官).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척이나 고맙게도 1번 정도로 생각하고 불러주었다 봐야하는데.
그럼에도 내가? 여사님 소리 들을 땐가? 49살이? 49살? 갑자기 생경하다. 49. 아휴 나이가 많긴 많다. 뭐 한 건 없는데 나이는 언제 이렇게 푸짐하게 한 상 차렸데? 아... 식당에서 서빙하면 아줌마 소리는 감내해야 하고 별 기술 없이 습득할 수 있는 계산원을 하려면 여사님 소리는 나를 부르는 호칭인가 보다 생각해야 하는 건가? 여사님 소리를 들을지는 정말 몰랐는데. 갑자기 이 나이 먹고 여기서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서글퍼질 뻔했다. 불과 1시간 전, 옆 칸에 어묵 파는 직원이 동생인 줄 알고 하대하려다 깜짝 놀란 상황은 기억에서 삭제되고 그냥 이 나이 먹고 30살 조카뻘 남성에게 여사님 소리를 듣고 보니 놀랍긴 하다. 아니 근데 조카뻘이면 여사님도 영 이상하진 않지만 이모도 아니고 웬 여사래? 참 여사님은 존칭이긴 하지. 나와 친척 사이도 아닌데 이모는 맞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사임 씨, 사임 님이라 부르지 않는 이상 여사님이 맞는 것도 같다.
사회생활을 많이 하지 않게 된 40대. 집 밖을 나갈 일이 많지 않았던 근 10년 동안 나는 자연스러운 호칭 변화를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은행이고 병원이고 아이를 데려가며 듣던 어머님(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이유로 어머님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내 아이 또래 아이가 제 엄마뻘 되는 나에게 하던 이모... 정도에서 일단 멈춤 해 있었는데. 그 사이 나이는 먹었고 아이를 데리고 다니지 않으니 누군가의 어머님 소리도 이모 소리도 좀 잠잠해졌다 생각했다.
뭘 가르친 것도 없는데 선생님 소리 듣는 것보다 확실히 더 생소하다. 갑자기 손녀도 없는데 나이 먹었다고 할머니 소리 듣는다면 이런 기분이려나? 아니, 군대 가자마자 아저씨 소리 듣는 대학생 마음이 이럴까?
혼자 "나는 노사임입니다. 사임 씨라고 불러주세요" 세상에 외칠 수는 없을 테다.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부장님 사장님 불리던 것도 그곳에서만이지 언제 어디서든 나이로 퉁을 쳐 통념상 정해놓은 호칭으로 불리는 때는 있을 테다. 고 이건희 회장도 시장 조사차 시장에 간다면 할아버지, 아저씨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으리라. (수행원이 많아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만)
세상을 개혁하려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통념상 이모, 여사님, 할머니로 넘어가는 여성의 호칭은 주름살만큼 붙이고 살아야 하는 그런 거겠지? 리프팅을 하고 피부를 잘라 당겨도 평생 유지되는 젊음은 없을 테니 역행보단 순리에 따라야 할지 모르겠다. 살다 살다 여사님 소리를 들은 오늘이 1일. 이제 시작일까? 여사님으로서의 삶? 혼란스러운 머리 좀 식히고 천천히 생각해야겠다.
그건 알겠는데, 아니 모르겠고. 나는 내일 사장 지인 직원에게 사임님이라 불러달라 말할까 그냥 둘지 고민은 좀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