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8일 6시 24분.
남해고속도로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언제나 해가 있을 때 가던 길을 평소와 다른 사정으로 가다 보니 시간마저 여느 때와 다르다. 갑자기 켜진 등에 눈길이 닿는다. 이 정도 간격으로 이 정도의 밝기를 뿜고 있었구나. 어둠을 물릴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 일제히 켜진 수많은 전구의 장엄함과는 달리 가로등이 내어놓은 빛은 미미하다. 강렬하지 않다. 눈부시지 않다.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음을, 존재만을 주목시키는 하얀색이다. 반딧불이가 뿜어내는 반짝임 정도다. 몇 마리 날아다녀도 숲 구석구석을 눈에 넣어주지 못하는 조도, 이경(異景)에 잠시 시선을 빼앗기는 효과뿐이다.
느닷없이 가을이 찾아왔다. 더위에 온전히 빼앗겼던 의식이 돌아오자 계절이 바뀌어있음을 느낀다. 아니 계절이 바뀌니 정신을 차릴 수 있다. 무심했던 것들을 둘러본다. 백야인 듯 밝던 초저녁의 하늘은 빠른 일몰로 바뀌어 있다. 물러갈 기미 없이 태울 듯 더위를 퍼뜨릴 때는 도대체 언제까지 해는 저기 걸려있을까 궁금하기까지 했는데 영원한 건 없다. 짧아진 해만큼이나 가로등의 불이 켜지는 시간도 일러졌다.
주변이 어둠에 잠길 때 가로등은 의지하는 무엇이다. 물론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해보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컴컴한 시골길을 달려보면 안다. 켜진 머리등(전조등)만으론 겨우 한 치 앞만 볼 수 있을 뿐. 몇 미터 앞밖에 밝힐 수 없을 때 가로등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어두운 도로를 달리는 차엔 등대와도 같은 의미일 거다.
가로등도 인가의 불빛도 없는 시골길을 달리면 막막하고 무섭다. 그런 때 만난 가로등은 유난히 밝다. 그 불이 6시를 조금 넘어 켜졌을 때보다 비침도를 높여서도, 전기를 더 많이 먹고 더 밝아진 게 아니란 것도 알지만 사실과 현실은 다르다. 옳게 가고 있다는 사실은 내비게이션만이 증명하는 밤, 국도든 고속도로에든 켜진 등은 크고 밝아 보인다. 크기도 밝기도 조절되는 첨단 장비 같다. 조그만 불빛도 어둠 속에서는 밝아 보인다.
요즈음 나는 좀 잘 웃는다. 내가 웃어서인지 웃는 사람들 속에 살다 보니 나도 웃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 그러니 누군가가 미소를 지으면 당연하게 보일 정도다. 미소도, 미소가 길어 올리는 친절도 당연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주위 사람들의 배려나 관심도 제법 편안하게 다가온다. 내 마음에서도 그런 것들은 당장 꺼내 줄 수 있다는 감정의 부유함은 호의를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누군가를 위해 출입문을 잡아주는 행동. 엘리베이터를 굳이 서둘러 닫지 않는 정도의 간단한 습관까지 말이다.
어느 늦은 시간, 집으로 가는 버스 안. 카드를 꺼내 교통 카드 단말기에 댄다. "잔액이 부족합니다"라는 소리가 나자마자 뒤에 따라 타던 친구가 "두 명이요"라고 외친다.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들어가는 고등학생의 모습에 갑자기 코가 찡했다. 서로의 배려와 친절이 당연해 자연스러웠다. 예전의 나라면, 어린 시절에 저런 소리를 듣게 되었다면 당황하며 지폐가 있나 지갑 속을 뒤졌을 테다. 아마 그럴 때 별거 아니라는 듯 대신 내어주는 누군가 있었다면 많이 놀라고 당황하지 않았을까. 호의나 친절이 일상이지 않은 때에 받은 그것은 밤 열두 시에 만난 가로등처럼 너무도 강렬해 사건으로 기억될 테다. 끈끈한 어둠을 자르고 들어오던 빛 한 덩이처럼. 더욱 크게 느껴진다.
사랑이 느닷없다 느껴지지 않는다면 난 사랑 속에 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성공이 믿기지 않아 볼을 꼬집는다면 성공 속에 살고 있진 못했던 거다. 오늘 나의 우울함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면 우울이 폭신하게 바닥을 다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환절기마다 코를 훌쩍이며 재채기한다면 비염과 알레르기 같은 증상과 오래 살았다는 증거겠다. 오늘 외로움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면 나는 외롭지 않게 살고 있었던 거다. 부모님의 부부싸움이 귀에 꽂히지 않는다면 그들의 행동은 오늘만의 난리가 아니듯.
오늘 나를 감싼 감정 또는 환경은 어땠을까? 나를 둘러싼 그것들에 익숙해져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들과 동거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보자. 지금 나는 행복한가? 작은 행복이 크게 느껴지나? 사소한 것이라도 행복이 가슴을 때리지 않는다면, 설지 않다면 나를 둘러싼 환경 구석구석 행복이 껴 있었구나 감사하자. 사소하고 자잘한 기쁨이 하루를 채워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아도 가끔은 좋겠다. 기쁨이 부족하다면 작은 기쁨에도 감흥이 크다.
예기치 못한 긴 실업에 저축한 돈도 떨어진 상태라면 십만 원은 로또 1등보다 크게 느껴진다. 다른 누군가에게 10만 원이 한 번의 미소와 치환되는 성질의 것이라면, 맛집 검색에 쓰인다면 실업 상태의 그가 받아들인 액수와 같으면서도 같을 수 없다. 10만 원의 값어치는 이토록 다를 수 있다. 내 호의에 화들짝 놀라는 누군가가 있다면 조금은 자주 놀라게 해 주는 것도 좋겠다. 그가 호의에 익숙해지도록. 편안히 느끼도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어두움 속 밝음은 유난히 크게 보인다.
오랜만에 골목 산책했습니다.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던 망경동이 개발 붐... 까지는 모르겠으나 변하고 있습니다. 무턱대고 반기게 되지는 않네요. 아직 남아있는 동네 구석을 좀 걸어보았습니다. 내일은 좀 그려보겠습니다. 오랜만에요^^
고 김대중 대통령님 다음으로 한국에 두 번째 노벨상! 한강 작가님 축하합니다. 노벨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