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에 관한 에세이 손을 좀 봤는데 어느것이 나은지 작가님들의 따뜻한 말씀 기다리고 싶습니다.만 .. 어디까지나 희망입니다.^^>
Quo Vadis(쿼 바디스)
기가 찰 노릇이다. 나는 분명 집 앞 세탁소를 가기 위해 나왔던 참인데, 길이 사라졌다?! 지구 멸망의 날이었나? 뉴스에서 그런 예보 안 하던데? 그런 걸 예고하는 시스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면 내 눈이 이상한가? 조금 전 엘리베이터를 걸어서 탔고 층수도 내 눈으로 보고 눌렀다. 내게는 초능력이 없으니 당연하게 앞을 보며 걸어왔는데? 필로티를 벗어나자마자 부신 햇빛을 느끼며 찡그리기까지 한 것 같은데. 눈을 감았다 떠본다. 길이 보이지 않는 건 똑같다. 답은 내게 없는 것 같으니 다급할 때 찾는 분을 호출해 본다. “신이시여 어디 계시"는게 아니라 “저는 어디로 가야 하죠?”
혼자서 목적지는 갈 엄두도 못 낸다.
"현대인의 필수품 길잡이가 있지 않느냐고?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보통의 사람이라면 해당사항이 있겠다. 과장이 아니다 오해마시라. 내비게이션을 틀어놓고 우회도로를 3번은 돌아야 가라는 국도에 올라선다. 한 고비 넘겼으니 한숨 쉬는 타이밍이다. 그러고 나면 다음 길이 나누어지는 분기점, 나는 나의 운명을 모른다. 터질듯한 심장은 연애할 때도 못 느껴본 흥분의 도가니. 똑같은 길을 세 번째 돌고 그 길을 지나면 또 돌아야 할 길이라니. 한없이 나오는 게임 같은 길 위에서 영화 ‘테넷’ 속 주인공은 이런 느낌일까 싶다. 아까 본 길을 또 봐야 하는. 그 기분을 아는 분도 계실 거다. “반갑소, 우린 같은 시간여행 동지군요.”
사람 얼굴은 기가 막히게 잘 알아보면서 길은 왜 그렇게 모르는지 내가 봐도 미스터리라 가능하면 아는 길만 가고 가던 길만 간다. 정신건강을 위해 나 자신을 좀 잊고 살아야 된다. 한심한 길 찾기 기능을 보고 있으면 몸과 잠시 분리되어 어리바리 서 있는 나에게 고개를 젓고 있는 내 영혼이 보일 정도니까.
내게는 사귀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남자 친구라고 소개하긴 어중간한 인간이 있다. 만나면 서로가 좋아하는 영화를 한 편 때린다. 그러고 나면 밥이나 간단히 먹고 ‘바이(Bye)’ 안녕이다. 뭐 거의 영화 친구라고 할 판이다. 그런 남자 사람 친구에게 어느 날 차가 생겼다. 동지 의식을 갖고 영화를 본 후 헤어지던 일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차로 데려다준단다. 이 길 저 길을 지나 목적이 있으니 어쨌든 차를 타고 어디 간다. 어딘지는 모르는데 하여튼 간다. 어느 날은 다른 동네 영화관, 어느 날은 식당. 그리고 바래다준다, 집에. 그러다 보면 “어? 저 길 신기하다 되게 새롭네. 한번 들어가 보자”하며 호기심을 보이고 그러면 남자친구는 어느 순간 그 길을 가고 있다. 그래 맞다. 가본 길이고 갔던 동네겠다. 그런데 '첫 키스만 50번째'에 나오는 '드류 베리모어'처럼 오늘 처음 보는 것 같다.
내가 사는 곳은 문현동 남구. 남자는 중동 해운대구다. 해운대 스펀지에서 영화를 보고 데려다준다. 가는 길에 좋아하는 대연동을 기웃거린다. 차로. 그냥 아무 이유도 없다. 청소년수련원길로 올라간다. 가다 보면 처음, 역시나 처음 보는 골목길이 나온다. 이 동네에 소풍도 왔는데. 어쨌든 처음 보는 길이다. 빨간 지붕에 회색 벽돌이 붙어있는 빌라. 어느 틈에 올라왔는지 단 동짜리 아파트는 벌써 3층까지 공사가 진행 중이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 나오는 전문 꾼들도 저 파란 물통을 이고 있는 주택들을 보면 집 찾긴 글러 먹었다.’ 생각하며 가다 보면 길은 어느새 끝이 난다. 오늘의 목적도 없는 모험은 여기까지.
다음날도 할 일 없는 우리는 또 영화를 한 편 보고 이번엔 해운대 그랜드 호텔 뒷골목을 돈다. 갑자기 빨간불이 켜진 어른들의 공간이 나온다. 아니 이건 진짜 처음이다. 엄청 신기하다. 내가 다니는 그냥 길에 이런 빨간 집도 평범하게 있었던 거구나. 놀랍다. 삐까번쩍 해운대 관광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50년 전에도 있었던 듯 땅과 집이 이정표 같은 곳들도 나온다. 땅값이 많이 올랐을 텐데 상가로 팔 만도 하구만 여전히 주택으로. 그때 살던 사람이 살고 있다. 서로가 적대감이라도 있나 싶게 관심이 없다. 구경 온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거리, 몇십 년째 삶을 이어가는 골목길 사람이 공존하는 곳. 무슨 일이라도 터질 듯 시끄러운 공간과 마당을 쓸고 있는 오랜 동네 사람들.
다음날은 친구가 좋아하는 미포에 대구탕을 먹으러 간다. 한 그릇 뚝딱 먹어 치우고는 또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릴 거리를 찾는다. 이번에는 달맞이. 찻집이 즐비한 달맞이 윗동네는 대부분이 빌라다. 갑자기 발전한 핫 플레이스답게 중동 쪽으로는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지만 달맞이 바다가 보이는 해월정 가기 전. 그 언저리는 여전히 낮은 집들의 포복이다. 아기자기한 소품샵도 있다. 좋아하는 옷집도 보이지만 여전히 차도 다닐 수 없는 좁은 골목길은 조금만 들어가면 있다. 걸으면 끄덕끄덕 인사를 해대는 줄지어 놓여있는 시멘트로 만든 배수 뚜껑들. 저마다 투박한 음으로 말을 건다.
차 한 대도 들어갈 수 없는 좁은 맹지에 있는 집들이 붙어있는 골목길. 처음 보는 골목길이지만 어디에나 있을 만한 사람들이 편안함마저 준다. 기술 좋은 미용실 주인이 볶아준 뽀글 머리를 이고서 쓰레기를 내러 나왔지만 아는 사람인가 싶어 주던 눈길을 얼른 거두어 집으로 들어간다. 지금 세상 중요한 건 저녁 먹은 상을 치우는 일 일거다. 3층에는 주인이 사는 세를 준 집들. 어느 집 할 것 없이 아이들의 고함과 울음소리가 콘크리트 벽을 뚫고 김치찌개 냄새처럼 새어 나온다.
차에서 내리려 동네에 차를 세운다. 그저 우리 집에서 10미터만 멀어졌을 뿐이었다. 매일 다니던 길이지만 집에서 한 발만 더 들어가면 처음 보는 낯선 집들의 세상이 펼쳐진다. 이런 곳이 우리 집 위에 있었다고? 깜짝 놀란다. 나와 같은 지하철 2호선 지게골역을 이용했을 이웃이지만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다.
그래 나는 심각한 길치다. 방향치 기능도 내포된 것 같다. 어디인지도 어느 쪽인지도 감이 안 잡히니까. 그런 내가 좋아하는 게 있다. 골목길 여행이다. 아주 위험하고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미지의 세계를 헤매는 듯 신비로운 곳으로의 그것. 위험하게도 혼자 들어간다면 이번 생에 빠져나오지 못할 위험까지 있는 도전이다. 본 적 없는 길이지만 그곳에는 어제도 봤던 사람들이 지난 생에도 살았던 것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젠 그 무시무시한 도전을 용감하게 할 수 있다. 내겐 이제 남자 사람이 아닌 남편이 된 모험 동행자가 생겼으니까. 사실은 그 동행이 더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것 같지만 어쨌든 나의 심각한 부족을 함께해 줄 동반자이니까. 그래 그 스릴 넘치는 도전은 더 스릴 넘치는 도전 때문에 조금은 덜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다. 남편! 우리의 앞을 알 수 없는 도전보다 안전한, 오늘 모험 한 번 어때?
[사진은 지금 살고 있는 시골 동네 골목입니다. 아직도 골목 여행은 즐겁습니다. 대신, 큰길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습니다. 안전을 위해서]※참고로 집의 모양은 사람얼굴 알아보듯 기억을 잘합니다. 그 집이 어디있는지 말을 시작하면 어버버가 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