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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Sep 19. 2023

학부모 상담을 갔다 왔습니다.

선생님께 드릴 말씀 있습니다.

일당쟁이가 하루치 돈을 포기하고 갔습니다. 학부모 상담이 있어서요.



다행인 건요. 두 건입니다. 큰 아이 중학교. 둘째 초등학교로. 가성비 있는 일당 포기입니다. 1시 40분. 따로 선생님이 오시는 특별 수업(?)이 있는지 선생님께서 시간이 난다며 상담 시간 내어 주셨어요. 제 미술 수업이 끝나자마자 1시에 달려 집에 갔습니다. 밖에서 도넛에 커피 한잔 사 먹고 기분 좋게 상담 가면 시간 딱일 텐데.


돈 생각이 났어요. 왜 뜬금없이 나올 타이밍도 아닌데 생각날까요. 오늘 못 번 돈이 보고 싶어서인가요? 생각이 났으니 돈이 하라는 대로 해야죠. 집에 가서 밥을 먹으려는데 아뿔싸, 아침에 남기면 식은 밥 된다고 밥솥을 긁어먹은 내가 떠오르더군요. 시간도 없는데 지금에 와서 다시 뭘 사 먹을 순 없고, 모르겠다. 비빔면을 급하게 삶으니 5분 경과. 한 번 후루룩 먹고 멀지도 않은 학교를 차로 갑니다. 뭐 하는 짓인지. 1시 40분 상담 시작인데 1시 35분 도착했습니다. 교실 앞으로 가 선생님께 문자를 드립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교실 앞에 와 있는데요. 교실에서 하는가요?>하고요. 선생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예 어머님, 아이들 수업하니 교실에서는 아니고요. 2층에 교무실로 오시면 됩니다."

"예, 선생님. 알겠습니다. 2층 교무실! 가겠습니다."


올라갔더니 교무실 앞은 인산인해였습니다. 한 아이는 수업을 빠지고 싶다며 선생님을 붙잡고 아프다 하소연중이었고. 교무실 안에서는 선생님들께서 다음 수업을 위해 나오고 계시고. 해당 수업을 위해 다른 교실로 이동하려는 아이들은 삼삼오오 몰려오고 몰려 갔습니다. 교무실 앞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한 채 서있었어요. 주인님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요. 선생님은 2분 후 갑자기 아픈 학생이 생겨 조퇴시키느라 늦었다며 상담실로 안내를 하시더군요. 선생님 얼굴을 몰랐기에 조금 떨어진 곳에 계신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아마 눈인사로 양해를 구하려 하셨는데 제가 딴 곳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선생님과의 만남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어 그랬는지도 몰라요. 어른이 된 지금도 선생님 따라 어디 가려니 조금 긴장이 되더군요. 선생님의 호출로 교무실에 들어가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에요.


첫째 아이 선생님과 마주 앉아 상담을 시작했습니다. 경남은 중학교 1년 동안 자유 학기제를 운영해서 시험이 없습니다. 2학년부터 갑자기 시험이 있어 발등에 불 떨어지고 절망하고 사춘기 폭발하고 무척 혼란의 시기가 되기도 하는 듯해요. 좋은 취지이지만 제 아이는 51% 안 맞더군요. 갑자기 발동이 걸리는 추진력 있는 아이가 아니라서요. 천천히 냄비를 끓여서 본인이 공부의 냄비에서 익고 있는지도 모르게 시켜야 되는 아이인데 '공부 시작!' 하고 하려니 자기 방 문만 추진력 있게 닫더군요.


아이의 성적을 물었습니다. 물론 성적표를 일전에 봤지만 어느 정도인지 선생님께 여쭈어봐야지 졸업한 지 30년이 넘었으니 감도 안 오더군요. 선생님께서는 A, B, C등급까지 그래도 안정권이고 E등급 이하일 경우 인문계 고등학교를 확신할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역사> 성적이 별로인걸 보니 암기과목이 약하다 하시더라고요. 수학은 잘하니 외우는 걸 싫어하는 거 같은데 그럼 이과 생각을 해 보라는 말씀도 해주셨고요. 저는 평생 문과적인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 살았기에 저와 싱크로율 99%인 제 딸도 문과려니. 아이가 책도 하나 출판을 앞두고 있으니 당연히 그러려니 했었는데 신선한 문화충격이었습니다. (집에 온 딸에게 물어보니 뭔지도 모르고 이과는 싫다네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씀드렸습니다.


학교에서 졸고 있는 모습 한번 본 적 없는 모범생이라며 칭찬도 해 주셨는데. 저는 엄마다 보니 안 좋은 점을 보강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는데요. 착실한 학교생활은 당연한 것으로 넘겼던 게 사실은 아주 중요할 수도 있겠다. 아이를 칭찬할 거리일 수도 있으니 집에 가서 선생님 말씀을 빌리는 척하며 칭찬 한번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아이의 공부는 본인이 외우려 시간을 내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첫째 아이 상담 끝났습니다. 아이의 공부가 나아진 게 아니라서 답답한 마음은 있지만 그래도 선생님 얼굴 뵙고 대화도 해보니 기분이 좋습니다. 아이에게 많은 지도편달 주십사 부탁말씀도 드릴 수 있었으니까요.


상담 시작 30분 만에 다시 집에 가서 냉장고에 넣어놓은 비빔면을 마저 먹었습니다. 청소기 돌리고 식세기 돌리고 남편이 건조기에서 나온 옷들이 너무 구겨졌다며 방바닥에 내동댕이 쳐놓은걸 이혼을 할까 옷을 확 버릴까 생각하다가 다시 헹구고 빨래건조대에 널고 수고했으니 커피 한 모금 마시고는 둘째 학교로 걸어갔습니다.


꼭 학교 다닐 때처럼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걸 보니 나의 지각은 내 DNA에 새겨진 건가 보다 하며 시계를 보니 2시 40분 상담시작인데 지금 시방 왓 타임 37분입니다. 다행히 교실 안에는 다른 학부가 상담 중입니다. 휴, 정말 다행입니다. 흡사 일찍 와서 기다린 사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알람 설정 한 전화기가 울어 얼른 끕니다. 교실 안 그분이 들었는지 상담이 끝이 나네요. 이상하게 운이 그쪽으로 모자라는지 3년 동안 다닌 학교에서 2년이나 선생님이 2학기에 바뀐 둘째라 선생님을 처음 뵙습니다.(작년 선생님은 1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직을 하셨습니다. 올해 선생님은 명예퇴직을 하셨구요) 정말 내 스타일이신 남자 선생님입니다.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다부진 외모에 말이 잘 통할 것처럼 생기신. 엄한 눈빛인데 선한 인상 있잖아요. "이노움!" 하시는데 눈에 사랑이 담긴 그런 할아버지 같은 표정이 얼굴에 붙어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니까 보자마자 말이 잘 통할 것 같은 친구상이십니다. 저도 인상 쓰면서 웃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 보면 표정이 비치네요.


꾸우벅 고개를 숙이며 "누구 에밉니다" 인사를 합니다. 앉자마자 아까 만났던 사람처럼 말이 편하게 나옵니다. '선생님께서 그 어렵다는 한 학기 담임을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하고도 기쁜지 모르겠다. 아이도 선생님이 좋다고 해서 저도 선생님 뵙고 싶었고 고마움을 꼭 표현하고 싶었다'며 처음 뵈었지만 사랑을 담아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모든 아이들 중에서도 딸이 야무지고 이해력도 좋고 애살(경상도 사투리로 무언가를 더 잘하려는 열정과 노력이 많다)이 많아서 예쁘다. 선생인 나를 좋아해주니 고맙기까지 하다 말씀하시더니 사실 상담 할 것도 없다며 진심으로 칭찬만 해주십니다. 그래서 찾아온 본론을 조심스레 꺼냅니다.


"사실은 모든 아이에게 언어폭력을 하는 아이 때문에 아이가 학교에서 화장실 가서 울기도 많이 합니다. 제가 무언가 해야 한다면 방법을 알려주시고 선생님께 부담드리지 않는 선에서 나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씀드리니 '그 아이는 여러 경로로 문제를 알고 있고 매일 신경은 쓰고 있다. 그래서 나아지고 있지만 아이가 자존감에 상처까지 받을 정도라고 하니 조금 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해주십니다. 선생님을 뵈니 사실은 제 고민이나 걱정이 사르르 녹긴 했음에도 선생님께서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신다고 하니 뭐라 감사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대답드렸습니다. 그러고는 선생님은 2학기, 한 학기의 담임을 하게 된 사연도 말씀 주시고 저는 저대로 아이가 선생님을 만나서 얼마나 행운인지 아이가 공부에서는 어떤지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다 다음 상담이 있으시니 놓아드린 후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학교를 나왔습니다.


선생님과 헤어지면서 방향을 몰라 오른쪽 왼쪽을 서성이다 아무렇게나 일단 계단을 내려왔는데요. 1층으로 내려왔음에도 내가 신발을 동쪽에 벗었는지 서쪽에 벗었는지 모르겠더군요. 아까 첫째 학교에서도 여기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어서 <미하일 바르시니코프>처럼 빙글빙글 돌았네요. 알고 보니 바로 뒤에 있는 문으로 들어오면서 신발도 거기 신발장에 넣었는데 말이에요. 둘째 학교는 ㄱ인지 ㄹ자인지 모를 복잡한 형태로 생긴 건물이라 빙글빙글 돌기만 해서는 신발을 못 찾고 집에도 못 가는, 저에게 난이도가 높은 곳이에요. 결국은 앞으로 뒤로 왔다 갔다 하다가 그래도 몰라 건물을 끝까지 가서는 다른 동으로 건너가서 신발을 찾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앞에 제가 얼마나 방향과 길에 치인지 적어놓았습니다. 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정도입니다.ㅎㅎ-이번 생에 다시 만나길 바라-편)


오늘 저의 학교 방문기는 <제 신발 찾아 집으로>처럼 오른쪽 왼쪽 동쪽 서쪽 무척 온탕 냉탕을 오가는 상담이었습니다. 별 걱정 없이 간 첫째 학교는 본인이 잘 할생각이 있는지 몰라 어려워진 복잡한 숙제를. 학교 폭력으로 신고를 해야 하나 생각하고 간 둘째 학교에서는 혹시나 선생님께 부담을 드린 것은 아닌지 여러 번 여쭈었으나 걱정 마시라는 선생님의 배려로 홀가분한 기분으로 발걸음 가볍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첫째는 좋은 결과로 보답을 할 수도 둘째는 해결이 안 되어 학교폭력으로 신고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가 여기가 어딘지 감도 못 잡듯 앞일은 누구도 섣불리 예단할 수 없는 문제일 테니까요.




P.S

사실은 위 단락 정도의 내용으로 가볍게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최근 일련의 일들은 차마 입에 올리기도 힘들 정도니까요. 일상적인 학부모 상담도 선생님들께는 너무도 긴장되고 호흡이 가빠질 괴로운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들께 보통의 평범한 학부모도 있다는 걸, 학부모의 무관심이 악성 민원인이 아님을 표현하는 최종 선택지는 아닐지도 몰라 평소의 감사한 마음도 표현하고 싶어 방문하였답니다.


첫째 아이 선생님은 사실 방문 상담이 올해 처음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조금 부담은스러우셨을 거 같아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실은 아이 학교 다른 선생님께서 서울까지 가 많은 선생님들을 대변하여 기자분들 앞에서 성명서 발표하시는 것도 보았기에, 응원의 목소리도 살짝 드리고 싶었습니다. 매우 보수적인 지역에 보수당의 국회의원 가족이 운영하는 사립학교임에도 용기를 내셨기에 더욱더 그러고 싶었습니다.


학교에 오는 학부모가 민원인으로 보이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선생님을 선생님으로서 존중하고 존경하는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하여 봅니다.


선생님, 다시 한번 수많은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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