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얼 이스 마이 러브
이제는 밤에도 제법 덥네요?
내 말에 팔장을 낀 채 버스 전광판을 바라보던 그녀가 내 편으로 고개를 돌려 빙그레 웃었다.
그러게요...
정적이 흐를 때마다 괜히 날씨 얘기를 꺼냈다. 두 시간 동안 같은 말을 벌써 네 번이나 반복했다.
또 다시 정적. 동시에 전광판을 쳐다봤다. 버스가 도착하기까지 아직 오분 정도 남았다. 함께 기다려 주겠다고 선뜻 말한 건 그녀였다. 괜찮다고 손사레쳤지만 그게 마음에 편하다며 곁에 남아 주셨다. 먼저 가셨으면 좋겠는데. 어색함이 민망했지만, 차마 먼저 가달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필 버스가 막 떠난 참이었다. 정적 속에서 십 분 넘게 매미들의 울음소리만 귓가에 맴돌았다.
남은 시간 삼 분. 여전한 정적. 힐끔 쳐다봤지만 그녀는 건너편 허공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애프터 신청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얼른 버스 타고 떠나기만 바라고 있을까? 그래도 배웅해 주는 걸 보면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닌거 같은데. 오늘 즐거웠다고, 다음에 한 번 더 볼 수 있냐고 물어봐야 하나. 그런데 영 내키지가 않는다. 주선자 말 마따나 좋은 사람인데.
어느 날 직장 동료가 소개팅 할 생각 없냐고 물어왔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좋은 사람이랬다. 벌써 올해 세 번 소개팅을 했지만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다. 반복되는 소모적인 만남에 피로감이 누적된 상황이라 일단 고민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거절할까 했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계속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좋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착한 사람'이라는 수식어는 자주 들었어도,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좀처럼 들은 적이 없다. 부담 갖지 말고 만나 보라는 동료의 말에 못 이기는 척 알겠다고 대답했다.
잠시 후 도착. 멀리 신호에 걸려 멈춰 있는 버스 한 대가 보였다. 그제서야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오늘 즐거웠어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요. 덕분에 많이 웃었어요.
버스가 도착했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올라탔다. 차창 너머 그녀가 꾸벅 인사하고 반대편으로 멀어진다. 나는 자리에 앉아 창문을 조금 열고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차가운 새벽 내음이 느껴졌다. 버스는 고요한 도시를 부드럽게 유영했다.
과연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누군가 그녀에 대해 물으면 나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날 느낀 바 좋은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첫 만남의 어색함도 그녀가 시종일관 짓는 미소 덕분에 금방 누그러졌다. 그녀는 부정적인 표현을 삼가고, 긍정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소개팅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좋아요."와 "덕분에"였다.
*덕분에 이런 분위기 좋은 식당을 와 봅니다.
*분위기 너무 좋아요.
그녀의 긍정적인 리액션 덕분에 나도 리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많이 줄었다. 음식은 입맛에 맞나, 예약한 식당의 분위기가 괜찮은가 안절부절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마음이 포근해졌다. 이전 소개팅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모든 게 좋았다. 설레지 않다는 점만 빼고.
집에 도착해 따뜻한 물로 샤워 했다. 냉장고에서 맥주 한 켠을 꺼내 홀짝 마시며 메신저창에 무어라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집에 도착하셨어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다음번에 한번 더...
대화창에 적은 내용을 지우고 골똘히 생각했다. 한번 더 만나면 끌림이 생길까? 그동안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첫눈에 끌림이 없으면 끝까지 안 생기던데. 그래도 좋은 사람이니까 한 번 더 만나볼까? 근데 그 사람이 나한테 호감이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만약 애프터 신청했다가 거절 당하면 어떡해.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호감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서른이 넘으니까 ‘굳이?’ 라는 벽이 내 마음 속에 생겨났다. 이 단단한 방어막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내 인격이 훼손되는 것을 막아준다. 구태여 위험을 감수할 만큼의 기회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시도하지 않음으로 자존감을 지켜냈다. 그녀가 굳이 도전할 만한 사람이 맞는지 고민하는데 먼저 그녀에게 메신저가 도착했다.
집에 잘 도착하셨죠? 오늘 즐거웠어요!:)
서둘러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지만 이미 내가 메신저를 읽었다는 걸 그녀가 확인한 후였다. 빨리 답장을 보내야 하는데, 그녀가 보낸 메신저의 숨은 뜻을 잘 모르겠다. 다음에 만나자는 말이 없는 걸 보니 예의상 보낸 마무리 인사일까, 아니면 여자의 자존심 때문에 차마 만나자는 말은 못하고 내가 다음 약속의 운을 띄우기를 바라며 용기내서 보낸 문자일까? 모르겠다. 그런데 굳이 내가 먼저 나서고 싶지는 않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남은 주말 잘 보내세요
이제는 여자에 대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알겠다. 호르몬의 변화 때문에 이따금 부리는 변덕도, 쉽게 보이고 싶지 않아 갑자기 차갑게 대하는 방어기제도. 스무 살에는 몰랐던 것들을 몇 번의 실패한 연애를 통해 깨달았다. 그런데 도통 사랑은 모르겠다. 이십 대 때는 거리낌없이 건넸던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제 와 뭐가 그렇게 아까워 쭈뼜대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