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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Apr 04. 2022

원하지 않던 상황이 때로는 '표지'가 된다


지난주에 몸이 으슬으슬하니 영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비염이겠거니 생각하고 약국에서 약도 사 먹었는데 차도가 없어 토요일에 이비인후과를 갔다. 진료를 받기 위해 신속항원검사를 받았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내 이름이 불렸다. 검사실로 들어가니 테이블 위에 내 이름이 적힌 키트가 올려져 있었다. 선명한 두 줄. 양성이었다.



받은 처방적으로 가지고 아래층에 있는 약국에서 약을 타고(코로나 확진이 되면 약값은 무료였다) 집으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회사에 사실을 알리고 강제적인 일주일 휴가를 받게 되었다. 연차 5일이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통화가 끝나고 난 뒤 의자에 앉았다. 쓸 수 있는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나자 조금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집 안이 고요했다. 뭐부터 할까. 사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방 안을 빙 둘러보았다. 원룸이라 방 전체를 보는데 몇 초쯤 걸렸을 뿐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과, 신발장 옆에 놓인 전자레인지 위에 뽀얗게 쌓인 먼지가 보였다. 최근에 저기를 닦았었나. 언제 닦았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본격적인 내 자가격리 첫 번째 활동은 '청소'였다.








먼저 화장실과 세탁실 문을 활짝 열어 환기가 되도록 했다. 세탁실에 놓아둔 빨래통엔 빨래가 3분의 2쯤 차 있었다. 어두운 색 계열의 옷들부터 골라내 세탁기에 전부 집어넣고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적당히 넣은 뒤 작동시켰다. 웅웅 거리며 힘차게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를 들으며 벽에 세워둔 청소기를 꺼내 방 청소를 시작했다. 평소 손이 잘 닿지 않아 대충 청소했던 구석진 곳들까지 깔끔하게 청소를 마친 뒤 원래 있던 자리에 청소기를 세워뒀다. 이제 뭘 할까. 다시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뭘 했다고 벌써 이 시간이냐는 생각을 했을 텐데,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에겐 아직 주말을 포함한 9일, 200시간이 넘는 자유 시간이 있다.



쉬고 있으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일어나 지금까지 먹은 게 없었다. 주방에 가서 찬장을 열어보니 마침 며칠 전에 사둔 라면과 즉석식품들이 몇 개 남아 있었다. 늦은 점심은 라면과 카레를 먹기로 했다.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려놓고 냄비에 물을 받아 끓였다. 금방 한 끼 식사가 차려졌고, 시장이 반찬이라고 남김없이 싹 비워냈다. 설거지는 조금 귀찮아서 나중에 하기로 했다.








배가 부르니 노곤함이 밀려왔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싶어 배달 주문을 하기로 했다. 따뜻한 커피와 함께 먹을 달콤한 디저트도 같이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조금 쉬기로 하고 노트북으로 유튜브 홈페이지를 실행해, 평소 자주 듣는 인디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최근 원했던 시간이었다. 막 청소를 끝낸 방 안에 나 혼자 가만히 의자에 기대앉아 조용하게 음악을 감상하고 있으니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와 음악소리가 겹치긴 했지만, 볼륨을 조금만 더 올리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오롯이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건 꽤 오랜만이었다.



비록 코로나 확진자가 되어서 이틀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 덕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도 분명 존재했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무언가를 얻으면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며, 반대로 포기하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분명 존재한다. 나에게 자가격리는 이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던 좋은 계기다.








원하지 않는 상황이 강제적으로 주어진다는 건 썩 달가운 일은 아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라면 편하고 익숙한 환경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 달리, 수많은 이해관계에 얽히고설킨 존재다. 동물들은 사냥을 실패하면 꼼짝없이 굶어야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집에서 5분 거리에 편의점들이 브랜드별로 즐비하고 스마트폰 하나면 웬만한 제품들은 모두 주문이 가능하다. 우리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영향으로 매우 정교한 시스템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스템 안엔 나와 당신도 속해 있다. 촘촘하게 짜인 거미줄 같은 이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데, 그 영향이 꼭 좋으리란 법도 없다. 스마트폰 하나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소식들을 접하거나, 필요한 물품들을 편리하게 구할 수 있는 좋은 영향뿐만 아니라 비대면과 익명성을 적극 활용한 무자비한 공격과 비난, 혐오 표현 등은 부정적인 영향에 속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퍼진 코로나 바이러스도 시스템 속 부정적인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가 밀접하게 엮여있기 때문에 편리하면서도 때로는 불편한, 모순적인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모든 일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완강히 거부한다고 해서 일어날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만들 순 없다. 이러한 태도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필요한 태도이다. 자신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들에 대해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강제적인 상황들은 비단 당신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 게 도움이 될까? 나는 이에 대한 답으로 '왜'보단 '어떻게'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이유를 고민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앞으로 그 일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거나, 최대한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일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바로 '우선순위'이다.



전쟁이 발생해서 타 국의 군인들이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나라로 쳐들어오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당장 몇 시간 후면 폭격이 가해질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 게 뻔한 상황에서 '왜 이 전쟁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고민한다는 건 정말 쓸데없는 일이다. 여기서 가장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할 행동은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고 군인들을 소집해 전쟁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왜'라는 고민은 전쟁이 끝난 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치밀한 분석을 하는 게 좀 더 효율적이고 올바른 순서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당신에게 닥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은 상황이더라도 리스크를 고려해야 하며, 짜증 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남들이 하는 입에 발린 말이나, 근거 없는 비난은 흘려듣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다. 친구들도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어야 한다. 그들은 쓸데없이 긍정적이지도, 지나치게 부정적이지도 않다. 인간이기 때문에 화를 내기도 하지만 금세 평정심을 찾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어야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오늘로서 자가격리 3일째이다. 지금 내가 가장 만족스러운 건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 '연금술사'에 등장하는 멜키세덱은,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 위해 고민하는 양치기 산티아고에게 표지를 따라가라고 조언한다. 표지란 자아의 신화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앞에 나타나는 것으로, 그 사람이 꿈꾸는 자아의 신화를 이룰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작년 가을부터 글쓰기를 목표로 삼은 뒤로 나 또한 몇 번의 표지를 만난 적이 있다. 아마 이번 자가격리도 나에게 있어 글쓰기라는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표지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기억하라. 지금 당신에게 닥친 원하지 않던 상황들이, 어쩌면 당신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표지가 될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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