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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Apr 06. 2022

고맙다는 말보단 기프티콘이 더 좋아


최근 친한 지인과 오랜 시간 동안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무려 3시간 동안. 나는 통화보단 메신저로 연락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대상이라면 예외다. 아무튼 몇 시간 동안 서로 별의별 얘기를 다 한 뒤에, 그분은 나에게 고맙다는 말과 더불어 자신의 얘기를 들어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겠다고 말했다. 나 또한 그분의 호의에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고, 통화는 기분 좋게 마무리되었다.







예전의 나라면 상대방의 이런 말에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상대방의 호의를 거절하기보단 감사의 표현과 함께 선뜻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신도 살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번쯤 겪어본 적 있을 것이다. 힘들 때 친구의 고민을 들어준 적, 내가 가진 능력으로 누군가를 도와준 적 말이다. 상황이 끝난 후 고맙다는 말과 함께 물질적인 무언가를 당신에게 주려할 때, 만약 당신도 과거의 나처럼 거절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면 오늘 이 글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어떤 사람이든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나 또한 그런 장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경청'이다. 2년 정도 상담 일을 하면서 '말을 잘 들어준다'라는 말을 꽤 많이 듣기도 했고, 이런 점 때문에 지인들도 속에 있는 얘기들을 털어놓은 적도 많았다. 내 입장에서도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기에 시간이 되는 한에서는 상대방의 고민을 몇 시간이고 들어주곤 했었다.



경청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듣는다'와 '경청'의 차이점은 상대방의 말과 그 내용에 얼마나 집중하는지에 달려 있다. 나의 경우 경청을 할 때 청각뿐만 아니라 시각과 신체 언어까지 전부 사용한다. 먼저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은 동시에 상대방의 입장과 내 입장에서 생각한다. 때에 따라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는 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표정이나 목소리의 높낮이를 통해 상대방의 감정을 파악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매우 화가 난 것처럼 보일 땐 감정을 추스를 수 있게 시선을 맞추고 말없이 들어주며,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는 등 '내가 너의 말에 공감하고 있다'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상대방이 느낄 수 있게 행동한다. 어떤가? 사용하는 경청의 방법 중 몇 가지만 서술했는데도 듣는 것과 경청의 차이점이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인지 경청을 하고 나면 에너지 소모가 크다. 지금은 예전보다 자기주장을 하는 편이어서 경청을 자주 하진 않지만, 과거에는 내게 고민을 털어놓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경청의 능력을 사용했다. 상대방도 이런 노력들 덕분에 좀 더 편하게 자신의 속 얘기를 말했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통화가 끝나기 전 내게 감사 표현을 건넸다. 그중에선 물질적인 보답을 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들의 보답을 거절했다. 무언가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진심 어린 표정과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기분 좋게 잠이 든 적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하나씩 발견되었다. 처음 느낀 문제는 '에너지 소비'였다. 정신적인 만족감은 더할 나위 없었지만, 육체적인 피로는 오롯이 내가 견뎌야 할 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늦은 저녁 시간 또는 새벽에 전화가 와서 1시간 이상 경청을 하고 나면 다음날 아침 피곤함이 느껴지는 건 감수해야 했다.



또 다른 문제는 '부정적인 감정의 전달''부족한 시간'이었다. 처음엔 누군가가 겪은 부정적인 일들을 듣는다는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고, 정말 그랬다. 하지만 자신이 겪었던 힘든 일들을 말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나는 개인 시간 중에서 꽤 많은 시간을 상대방의 푸념을 듣는데 쓰고 있었다. 하루에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끝내기에도 빠듯한데 그 와중에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 고민들 대부분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그들조차 해결할 수 없는 고민들을 계속해서 듣고 있으면, 가끔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지인을 만나 고민을 듣게 된 날이 있었다. 항상 그랬듯 열심히 상대방의 말을 듣고 공감해주며, 얘기를 들은 후 느낀 내 의견을 말해주었다. 대화가 얼추 마무리되고 나서 지인은 고맙다고 말하며 작게나마 내게 선물을 해주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평소처럼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지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한테 보답을 하려는 건 단순히 고마워서 그런 건 아니야. 내 고민을 말하려고 난 네 시간을 뺏었어. 만약 내가 너에게 고민을 말하지 않았다면, 넌 그 시간 동안 네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을 거야. 거기다 누군가의 말을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들어준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야. 넌 귀중한 네 시간과 능력을 나에게 사용한 거고, 넌 그것에 대한 보답을 받을 자격이 있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충격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그동안 나는 남들보다 내가 잘 들어준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의 고민을 아무런 대가 없이 들어주었다. 하지만 지인의 말을 듣고 나니,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나기엔 내가 너무나 귀중한 것들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랬다. 흘러간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힘듦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내가 가진 능력과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게 고민을 말한 수많은 사람들 중 오직 이 사람만이 내 가치를 진정으로 알아주고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나는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줄 때 나름의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첫 번째,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은 오랫동안 들어주지 않는다. 두 번째, 고민만 말하며,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들어주지 않는다. 세 번째, 보답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다. 이 3가지 원칙을 세운 후로는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만이 남아 있다. 그 전에는 내가 가진 무언가가 필요해서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이젠 '나'라는 사람을 찾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닌, 나와 대화를 하다 보니 가끔 고민이나 걱정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별 것 아니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겸손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겸손에도 정도가 있다. 당신은 그러한 능력을 얻기 위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당신이 가진 능력은 누구보다 당신이 먼저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능력을 남들에게 자랑스레 뽐내는 누군가에 비하면, 당신의 겸손한 모습은 칭찬받을만한 행동이다. 그러나 지나친 겸손은 자신의 가치를 낮추는 행동이다. 스스로를 억지로 높일 필요도 없지만, 낮출 필요도 없다. 그러니 누군가 당신에게 고마워하며 주는 기프티콘을 억지로 거절하진 말자. 받을 줄 아는 사람이, 그만큼 되돌려 줄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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