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Quat Nov 25. 2022

'소중함'에 속아, '익숙함'을 외면하지 말자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라는 말이 있다. 언제나 자신의 곁을 든든히 지켜주는 사람들, 별생각 없이 느끼는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의 순간들을 당연히 여기지 말자는 의미의 말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이 말에 공감한 적이 한 번 이상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을 찬찬히 살펴보면, 마치 '소중함'이 '익숙함'보다 좀 더 우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연 정말로 그런 것일까. 반대로 '익숙함'이 '소중함'보다 더 중요한 상황은 없는 것일까. 오늘은 "소중함에 속아, 익숙함을 외면하지 말 것"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소중하면서도 익숙해지기 쉬운 것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가족', 그중에서도 '부모'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이며,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고 지금까지 길러준 존재. 태어나면서부터부터 어느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대상이기도 하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마치 바다와 같다. 날씨에 따라 파도의 높낮이는 달라져서, 파도가 커지는만큼 뭍 깊숙이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어와 때로는 바다를 보러 온 관광객들의 신발을 젖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다라는 존재가 없어지거나, 그 성질이 아예 달라지진 않는다. 부모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들 또한 사람이기에, 감정이 격해질 때면 자식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그들의 자식들에게 화를 내는 대부분의 이유는, 자신들의 사랑을 자식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그들의 사랑으로도 자식들을 이해할 수 없을 때. 이 2가지로 귀결된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그들은 많은 것들을 포기한다. 주말 아침의 단잠, 점심식사 후 커피 한 잔의 여유, 자기 전 가벼운 산책. 부모가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할수록, 자식은 더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부모가 되어보지 않은 자식들은 이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다. 부모의 사랑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엔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당신은 디스크가 터진 경험이 있는가. 조금만 허리를 숙여도 저릿한 느낌과 함께 어마어마한 고통이 허리에 느껴진다. 머리를 감을 때도, 의자에 앉을 때도, 심지어 자기 전 침대에 누울 때도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야만 한다.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빠르게 걸어도 앞서 말한 고통이 허리부터 시작해 온 몸으로 퍼지며, 제자리에 선 채 터지는 신음을 막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곤 한다.



허리디스크가 터져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게 무슨 느낌인지 바로 알아들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아픈지에 대해 상상을 하며 '대략 이런 느낌이겠구나'라고 이해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경험'과 '이해'의 차이다. 결국 부모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비슷한 경험을 하더라도 절대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들은 이런 부모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각자의 성향과 상황에 맞는 방법을 사용한다. 애교를 부리거나, 용돈을 드리거나, 부모에게 발생한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나서기도 한다. '감정'과 '그에 대한 감사'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 가족'이라는 유일무이한 공동체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렇듯 '부모'라는 존재는 대부분의 사람에겐 너무나도 소중하다. 하지만 '대부분'이라는 것은 항상 예외가 있음을 의미한다. 부모, 형제, 자매에 대한 의미가 크고 소중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겐 가족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사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크게 불거지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막대한 보험금을 목적으로 자신의 배우자 또는 자식을 해하려 드는 부모도 있다. 태어났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아주 작은 사랑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부모'임을 앞세워 경제적인 지원만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 간에 매우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입에 담기도 힘든 몹쓸 짓을 자식에게 저지르는 부모 또한 존재한다. 이들을 과연 '부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식으로서의 도리와 책임을 다해야만 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그것이 누군가에겐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거나,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겐 '사랑'이 따뜻하고 설레는 감정이겠지만, 또 다른 사람에겐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은 끔찍한 감정이 되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사랑이란 것을 단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누군가 이 사람에게 "그래도 부모님이잖아. 네가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라고 말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가족은 소중하다'라는 일반적인 인식 때문에, 정작 그것을 조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명목상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건강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냐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것에 동의하긴 힘들다.



명목상의 '소중함'에 속아,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한 것들을 당연하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당신에게 있어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당신과 관련된 모든 일과 사람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생각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가족은 화목해야만 하고, 사랑은 항상 설레고 아름다워야만 하고, 나를 포함한 모든 직장동료들이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며 깔끔한 일처리를 해야 하며, 당신이 친구들을 생각하는 만큼 그들 또한 나를 생각해주길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당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정말로 '소중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소중해야 생각해야만 하는 것'인지를 잘 구분해야 한다. 만약 그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커피 한 잔의 여유나, 잠깐 동안의 휴식조차 가질 수 없다면, 앞으로도 그것을 소중히 여길지 깊게 고민해보길 바란다.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지금 떠올린 '그것'은, 정말로 당신에게 '소중한' 것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당연히 비를 좋아할 줄 알았지, 너도 나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