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Quat Nov 27. 2022

'걱정'보다는, '믿고 있다'는 말이 더 좋아


당신이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 힘들어할 때, 당신은 어떤 식으로 위로해주는 편인가. 사람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상처 입은 마음을 보듬어주기도 하고, 응원을 건네는 사람도 있으며, 상처 준 사람을 욕하거나,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제공해주는 사람도 있다. 위로의 방식에 명확한 정답은 없다. 평소엔 자신의 힘든 상황에 대한 공감을 바라던 사람도 때에 따라선 확실한 해결책을 원할 때도 있고, 반대로 현실적인 상황을 타개하는 게 우선인 사람 또한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누군가로부터 한 가지 방법으로만 위로를 계속 받다 보면, 때로는 그것이 부담스럽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도 있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그 방법이 마치 당신을 '매번 힘든 일을 겪는 사람'이나 '제대로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 사람'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어떨까. 오늘은 "걱정보다 응원을 선호하는 이유"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해보려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수성이 있으며 자기 사람들을 너무나 잘 챙기는 사람들. 그들에게 있어 내 사람들이 겪는 아프고 힘든 일들은 마치 자신이 겪는 것처럼 가슴 아프고, 하루빨리 그 시간이 지나가 그들에게 별 것 아닌 과거의 한 순간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힘들다는 소식을 들으면 진심을 담아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랬구나, 어떡해", "참 힘들었겠다"와 같은 뉘앙스의 말을 몇 번이나 전하며 그들의 힘듦을 같이 짊어지려고 하는 것이다. 분명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의 아픔에 계속해서 이러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이러한 위로의 방식이, 힘든 일을 겪는 사람과 그러한 위로를 하는 사람 모두에게 장기적으로는 결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생각을 한다.






먼저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당장의 위로나 공감은 그들에게 있어 분명 큰 힘이 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감정'보다 '이성'에 입각한 말이나 행동을 훨씬 더 선호하는 편이기에, 기대하지 않았던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위로는 어디까지나 '위로'이다. 이 말인즉슨, 상대가 내게 전하는 위로는 어디까지나 나를 향한 마음일 뿐이고 그 상황을 견디고 극복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행동에 달린 것이다. 또한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면, 인간의 사고는 극히 '자기중심적'으로 바뀌게 된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게 되고 그것을 본인이 인지하더라도, 속으로는 '그래도 이게 전부 내 잘못 때문만은 아니잖아?'라는 생각을 하며 자기 방어적인 태도 및 합리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곁에 있는 사람이 무조건적으로 내 감정에 공감해주고, 내 편만을 들어준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은 채 '남 탓'과 '상황 탓'만을 하며, 개인주의를 넘어선 이기주의적인 태도가 점점 더 강해질 확률이 높아진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일을 할 때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난 잘못 없어"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과 누가 친해지고 싶겠는가!






이것은 정신적인 성숙 및 성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항상 평화롭고 행복하기만 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으며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로 인해 전보다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것을 견디는 법을 배운다. 넘어져 다치는 건 분명 아프고 슬픈 경험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통해, 다음에 넘어지게 될 때도 '어떻게 넘어져야 덜 아플 수 있는지'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공감과 걱정은 '너의 잘못은 없다', '네가 저지른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방식으로 분노와 짜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삭이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이런 과정에 익숙한 사람들은 스트레스 및 부정적인 감정에 매우 취약하다. 마치 무균실에서만 생활하던 사람이, 바깥으로 나왔을 때 별 것 아닌 자극에도 엄청나게 괴로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적당한 수준의 부정적인 자극은 전보다 더욱 성정 할 수 있는 밑거름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가 '덮어놓고 걱정만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이유는, 마치 나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 취급'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나를 아끼는 마음이 어떤지 알면서도, 내가 겪은 일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걱정하는 사람에겐 힘든 일을 겪었을 때 말을 꺼내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오히려 덤덤하게 "그랬었구나. 그래도 지금은 괜찮은 거지?"라고 받아주는 사람에게 더욱 편안함을 느낀다.



그들의 반응은 마치 하루 세 끼 중 한 끼를 귀찮아서 건너뛰는 것처럼, 내 힘듦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그래서 나 또한 그들에게 얘기를 하면서도 그때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에 취하거나 깊숙이 빠지지 않은 채, 지나간 일들과 당시 느꼈던 감정들을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무조건적인 위로를 '받는' 사람의 입장이었다면, 이번엔 그러한 위로를 '하는' 사람이 겪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부정적인 감정의 전파'이다. 위로와 공감을 잘한다는 건 그만큼 가지고 있는 감정의 수치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에게 있어 공감이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따뜻한 공감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 더 힘들어지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가장 많이 정신과 상담을 받는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낸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상대가 겪은 힘든 일에 대해 공감을 잘하면 잘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찾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받아내야 하는 감정들을 더욱 많아지게 된다. 감정을 다 받아낸 후에 한결 후련해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면 뿌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연락이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힘든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알면 그것에 흔쾌히 반응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조건적인 위로와 공감은, 위로를 해주는 사람도 모르게 상대를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행동이 된다. 자신의 힘들었던 경험에 대해 귀 기울여 주고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 호감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렇기에 공감을 잘해주는 사람 곁엔 현재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잘하는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수월하게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이 그것을 행하는 것을 별생각 없이 대하게 된다. 결코 그것이 쉽지 않은 것임에도 말이다. 공감 또한 마찬가지다. 처음엔 그들의 위로와 공감에 대해 감사하던 사람들도, 점차 익숙해지게 되면 그것을 자신도 모르게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처음과 달리 자신의 공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거나, 힘들 때만 자신을 찾고 괜찮을 땐 아무런 연락조차 없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서운한 감정이 들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얘기를 그들에게 하기엔, '안 그래도 힘든 일이 많은 사람인데 괜히 나까지 이런 얘기를 할 필요는 없지'라는 생각 또한 들곤 한다. 이러한 과정을 몇 번 거치다 보면 자연스레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정말 좋아한다면, 그 사람이 내린 선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기준에서 정말 아니라는 판단이 든다면 한 번쯤 진지하게 말은 해보겠지만, 그 이상 설득을 하려고 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 말 한마디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이 갈지도 모르는 데다가, 가장 중요한 건 그러한 영향을 받은 선택의 결과에 나는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내린 결정에 대해, 응원해주고 잘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는 말을 건네는 편이다. 누군가가 듣기엔 영혼 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선을 지키는 동시에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내 인생에 대해 타인이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기에, 나부터 상대를 그렇게 대해야 한다고 믿는다. 아무리 당신이 아끼고 좋아하며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결코 타인의 삶에 대해 온전히 책임질 수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누군가를 동정하는 건, 곧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참 힘들겠다'가 아닌 '지금은 힘들어도 시간이 지났을 땐 저 사람이 나보다 훨씬 더 성공할 수 있지'라는 생각을 하면, 누군가를 동정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당신 주변에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이 충분히 현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진심으로 믿고 그 마음을 그들에게 표현한다면, 그들 또한 훨씬 더 큰 힘을 얻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별 의미 없는 말이라서, 그래서 더 좋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