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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May 07. 2024

다르게 구운 와플이 훨씬 바삭했다는 것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자그마한 가게 하나가 나온다. 문 앞엔 일본 선술집처럼 분홍색으로 빛나는 호롱불이 걸려 있고, 파란색 페인트로 칠해진 나무로 만든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약 2~3평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공간이 나온다. 문 바로 앞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국화빵과, 타코야끼가 들어있는 진열장이 있다. 진열장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엔 작은 칠판이 올려져 있는데, 나름대로 또렷하게 써보려고 애쓴 듯한 서체로 각 메뉴의 이름과 가격이 적힌 게 보인다. 나는 이 가게 특유의 포근한 분위기와 따뜻한 공간을 좋아한다.






처음 이곳을 알게 된 건 2023년 겨울이었다. 스마트폰을 보며 길을 걷던 중 주변시로 불그스름한 빛이 보여 이게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 보니 못 보던 가게가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엔 '술집이 생겼나'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술을 마실 수 있을까를 떠올려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굳이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며칠 후 산책을 하다 누군가 열어 놓은 문 틈 사이를 보고 여러 가지 간식을 파는 곳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퇴근을 하고 집으로 가던 중 갑자기 간식이 먹고 싶어졌다. 늘 그렇듯 편의점으로 향하려다 마침 그 가게가 떠올랐다. '지금도 하고 있으려나' 천천히 발길을 옮겨 가게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보이진 않지만 굵직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진열장 너머로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나서 가게를 둘러보았다. 왼쪽에 있는 커다란 스테인리스 틀에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묵들이 제각각 꽂혀 있었고 정면엔 타코야끼와 국화빵, 와플이 보였다.



평소 취향이라면 와플에 바로 눈길이 갔었겠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타코야끼가 맛있어 보였다. 사실 모든 게 다 맛있어 보였다. "타코야끼 하나랑 와플 하나, 국화빵 9개 주세요." 사장님은 알겠다고 말한 뒤, 진열장에서 와플 하나를 꺼내 내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쪽에서 데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주문한 간식들을 종류별로 하얀 봉지에 담아주셨고 그것들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먹고 싶었던 타코야끼부터 조심스레 꺼냈다. 듬뿍 올라간 가쓰오부시 위에 마요네즈 같은 소스가 역시나 듬뿍 뿌려져 있었다. 그날 나는 살면서 가장 맛있는 타코야끼를 맛볼 수 있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그 가게의 단골이 되었다. 몇 번 가다 보니 사장님과도 말을 조금씩 트게 되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오늘, 산책을 하다가 오랜만에 그곳을 들렀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전히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나서 앞을 보니 가게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와플 하나랑 국화빵 9개 주세요" 결제를 하고 나서 사장님께 여쭤보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랑 조금 다르네요. 어묵은 이제 파시나 봐요?" "겨울이 끝나서 그래요." 그러고 보니 진열장 옆에 염통꼬치와 닭꼬치라는 신메뉴가 있는 보였다.



"와플 구울 동안 잠깐 앉아서 쉬어요." 앉아서? 이곳에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나. "앉아... 서요?" 내가 다시 한번 묻자 사장님은 나를 보더니 보이지 않는 자신의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여기에 자리 있어요." 어묵이 있던 자리를 통해 진열장 옆을 지나가보니 각양각색의 의자 3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의자 바로 앞에 놓인 테이블엔 아주 작은 프라이팬 같은 게 있었고, 그 위에서 내리쬐는 빛으로 와플이 구워지고 있었다.



"이게 뭔가요?" 처음 보는 기구에 묻자, 사장님은 들뜬 듯 내게 설명해 주었다. 좀 더 와플을 바삭하게 구우면 더 맛있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하다가 당근마켓에서 이걸 발견했다고. 오늘 처음 써보는 거고 내가 이 방식으로 만든 와플을 산 2번째 손님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해보니까 난 괜찮더라고.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어." 그러고 나서 가게 안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 노릇하게 와플이 구워지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실내와 대조되는 빛. 순간 그 모든 것들이 편안하고 좋게 느껴졌다.



와플이 다 구워지고 간식들을 포장해 건네주시며 사장님은 멋쩍게 웃으셨다. "오늘이 처음이라 맛있을지 모르겠네." 원래대로면 별말 없이 웃으며 나갔을 테지만, 나가기 전 왠지 와플이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와플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와그작. 이미 소리부터 합격이었다. "맛있어요. 사장님." 사장님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누군가는 수없이 그 길을 걸으면서 그곳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저 힐끗 보기만 했을 뿐, 들어가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들어갔다가 간식을 산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 먹었음에도 "여긴 별로"라고 말한 뒤 다시는 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디 가게뿐이겠는가.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경험한 모든 것들이 다 그러할 것이다.



길가에 있는 아주 작은 가게에서 와플을 굽는 방식을 바꿨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알아도 "그게 뭐가?"라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자신에 대해 알아주는 사람이 있길 바란다. 자신의 입으로 알아달라고 말하긴 민망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주면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와플을 굽는 방식이 바뀐 걸 알아보는 것 또한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게 별로든 좋았든, 어쩌면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저 그것이 당신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녔다는 것. 그것으로 인해 당신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고 느껴보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무언가를 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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