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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Jun 04. 2022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여행이었다


여행을 다녀왔다. 원래 계획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행을 가기 전 그곳에서 할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생각보다 할만한 게 없었다. 그래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기에, 일단 떠나기로 했다.



가는데만 버스로 3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살짝 땀이 날 정도로 날씨는 화창했다. 도착하니 시간이 12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미리 찾아둔 밥집 근처로 가는 버스를 검색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옆에 있던 여학생 둘이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살던 곳과는 다른 억양의 사투리를 들으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이 없다는 게 좋았다. 버스를 타고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지금 살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프랜차이즈 맛집과 카페들, 병원, 한글로 써진 간판들.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지만 나는 살면서 처음 온 곳에 있었다.






20여분을 달려 목적지 근처 정류장에 내렸다. 길 찾기 어플엔 정류장에서 밥집까지 도보로 10분 정도가 걸린다고 나와있었다. 아까보다 햇볕은 강해졌는데, 그늘이 하나도 없는 길이 이어졌다. 이름 모를 강 위에 놓인 작은 다리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넜다. 워낙에 길치라, 걸으면서도 계속 길 찾기 어플로 실시간 내 위치를 확인했다. 슬슬 뭐라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드디어 밥집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가게 안은 한산 했다. 남자 둘과 또 다른 남자 둘, 그리고 나 하나. 가장 대표 메뉴와 사이드 메뉴 하나를 추가로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더운 날씨에 길안내까지 하느라, 스마트폰이 사막 어딘가에 굴러다니는 돌덩이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나와 스마트폰 둘 다 걸어오면서 오른 열을 식혔다. 20분이 넘게 지나 '도대체 언제 나오나'라는 생각이 들 때서야 드디어 음식이 나왔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지만, 배고픔을 빼고서라도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사이드로 주문한 치킨가라아게 또한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한 일명 '겉바속촉'으로 맛있게 튀겨져 나왔다. 아주 깨끗하게 접시를 싹 비운 뒤 기분 좋게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밥집 근처에 괜찮은 카페가 있어서 가보기로 했다. 버스에서부터 밥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시도 스마트폰을 놓질 않았던 탓에, 배터리가 곧 꺼지기 직전이었다. 카페인 충전과 휴대폰 충전이라는 두 가지 중대한 목표를 위해 부지런히 걸었다. 다행히 카페가 가까워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한때 유행했던 현대식 한옥 구조 형태인 카페로, 본관과 별관 2군데로 공간이 나뉜 카페였다. 영화 '판의 미로'에 나오는 것만큼 기괴하진 않지만, 푸른 나뭇잎이 휘감고 있는 나무문을 통과해 마당으로 들어선 뒤 본관으로 들어가는 문 쪽으로 향했다. 문 바로 옆 콘크리트 바닥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식빵 자세'로 따뜻한 햇빛을 쬐고 있었다. 혹시나 놀랄까 천천히 문 앞으로 걸어가니 내 쪽을 흘깃 보더니 슬그머니 일어나 어디론가 가버렸다. 날씨가 조금만 덜 더웠다면 사진부터 찍었을 텐데, 그럴 여유가 내겐 없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로 향했다. 메뉴판에 내가 좋아하는 흑임자가 들어간 커피가 있었다. 커피와 함께 먹을 디저트로는 양갱 하나를 주문했다. 밥집뿐만 아니라 카페도 조용했다. 진동벨을 받아 들고 콘센트가 있는 자리를 찾은 뒤 서둘러 스마트폰을 충전했다. 내가 앉은 곳은 창가 자리였는데 밖이 훤히 보이는 유리로 되어 있었고, 맞은편엔 별관 공간이 보였다. 이곳은 비가 오는 날에 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마시고 어느 정도 스마트폰 충전도 다되고 나자 '이제 뭘 하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근처에 볼만한 곳을 찾아보니 미술관이 하나 있고, 예전에 어떤 선교사가 살았던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괜찮다는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두 곳을 가보기로 했다.



한낮의 햇볕은 정말 뜨거웠다. 도보로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는데도 이미 몸에서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살짝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도착한 '선교사가 살았던 건물'은 예상보다 더 멋졌다. 외국영화에 나오는 주택인데 세월이 많이 지나서 그런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생김새였다. 나 말고도 한 커플이 먼저 도착해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나도 건물을 빙 둘러보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너무나 더운 날씨 탓에 당장이라도 정류장으로 가서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볼 수 있는 건 다 보고 가자는 생각에, 힘겹게 미술관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그나마 밥집부터 다음 목적지들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게 천만다행인 사실이었다.



미술관은 꽤 작았는데 1층과 지하 1층으로 이뤄진 2층 건물이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색감이 아주 다채로웠다는 게 기억난다. 사실 전문가도 아닌데 이래저래 아는 것처럼 평을 한다는 게 더 웃기지 않은가. 다만 자신이 그린 그림을 이렇게 열린 공간에 전시해놓고 누군가 보러 온다는 사실이 멋지다고 느꼈다. 우리나라에만 수많은 화가들이 있을 테고, 그들도 자신의 그림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할 텐데 말이다. 내가 보고 있는 이 작품을 통해 얼굴도 모르는 작가와 접점이 생긴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미술관 투어 이후로 나는 다시 터미널로 돌아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다시 돌아갈 버스 시간까지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출발할 때와 비슷한 시간을 버스에서 보낸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채 하루도 걸리지 않은 여행이었다. 평소와 그리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밥을 먹고, 카페를 가고, 새로운 곳 한 두 군데를 더 들린 정도였다.



누군가의 시선에선 '그럴 거면 왜 갔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별 것 없는 여행 일정이었다. 당일 치기라 시간이 부족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맘만 먹었다면 좀 더 익사이팅한 코스로 여행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걸 썩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지에서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왔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나는 일상 속에서도 충분히 여행을 떠난 것처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자극적이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을 하지 않아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오히려 스릴 넘치는 무언가는 내게 불편함을 유발한다. 좋아하는 인테리어로 꾸며진 카페에서 즐기는 커피와 디저트만으로도 나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비록 덥긴 했지만 그래도 사진은 쨍쨍한 날에 더 잘 나오니까.



행복을 일상 속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금방 풀 수 있다. 조금만 시간이 나도 손쉽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할 수 있다. 굳이 큰돈을 들이고 시간을 내서 여행을 가지 않아도, 내 옆에는 나를 즐겁게 만드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결국 우리는 특별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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